< 개전 (3) >
연산관(連山關)은 더러 아골관(鴉?關)이라고도 하며, 예로부터 천험의 요새로 일컬어지던 곳이다.
"첩첩한 산이 사방으로 둘러 있으니 가히 금성탕지(金城湯池)라 할만 하오이다."
북벌군이 진군을 시작하자 이리저리 동팔참 인근을 찔러보던 청군은 급히 퇴각하여 방어 태세를 구축하는데 진력했다.
"높은 뫼와 험한 재를 또 하나의 성벽으로 삼아 버티고 있으니 빠른 시일 내에 점령할 수 있을지 의심되오이다."
도원수 이자원 이하로 유림, 임경업, 이완, 김충선, 오삼계, 김준룡 등 모든 군영의 지휘관들이 모였다. 그 면면도 화려하여 후방 지원을 맡은 삼도수군통제사 강진흔 정도를 제외하면 조선이 끌어모을 수 있는 명장은 다 배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북벌군이 조선의 명운을 건 군대였으니 당연했지만, 그렇기에 이들의 고민도 깊었다.
'도르곤이 호거를 토벌하기 전까지 심양을 함락해야 한다.'
그런데 연산관부터가 척 보아도 험준하니 기를 쓰고 정공으로 나아가도 어쩔 수 없이 상당한 시간 발목을 잡힐 것 같았던 것이다.
"기치를 들어라."
이자원은 우선 대답하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도원수 대감께서 기치를 들랍신다!"
이자원의 명령은 각 군영으로 전달되며 이때까지 숨기고 있던 군기가 펄럭 올랐다.
- 조선국(朝鮮軍) 팔도 도원수(八道都元帥) 이자원(李子元)
사방에서 이 군기가 올랐으니 연산관의 성루에서 지켜보던 청군이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었다.
"이, 이자원이라고?"
보고를 받은 아다리가 입을 떡 벌리며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 분명 북벌군은 다른 장수가 이끌고 있다 하지 않았느냐?"
이미 온정평 싸움에서 쓴맛을 보았던 아다리다.
그 전투를 지휘했던 이자원이 직접 5만이나 되는 북벌군을 지휘하고 있으니 아다리의 얼굴이 파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혹시 놈들이 계략을 쓰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어떤 주장이 제가 아닌 다른 장수의 이름만 빌려 이런 짓을 하겠는가.
"그만 두시오. 장군이 그런 반응을 보여보았자 우리 병사의 사기만 떨어트릴 뿐이오."
좀 더 경험이 많은 상가희가 그리 충고했지만 그 역시 얼굴이 딱딱히 굳어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는 호란 때 종군하여 청군이 이자원의 상대 아래 무너지는 꼴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래도 조선군은 어디까지나 방어전만 치루어 보았을 뿐, 연산관 같은 요지를 점령해본 적은 없을 것이다. 놈들이 자랑할 만한 것은 오직 화포인데, 이 연산관의 성벽은 높고 두꺼우니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다. 의미없는 포격이나 몇발 주고 받다 운제를 걸어 공성을 시도하고, 병졸들의 목숨을 갈아넣어야겠지. 그리되면 이 싸움은 할만하다.'
연산관만 굳게 지키고 있다면 요양이든 심양이든 조선군은 나아갈 수 없다.
어쩌면 이번 싸움으로 조선군에 큰 타격을 입히고 설욕을 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으리라 애써 마음을 달랜 상가희였다.
그때였다.
- 콰쾅!
성벽을 넘어온 포탄이 연산관 내에 작렬했다.
"무슨!"
상가희가 바깥으로 나가보니 포탄을 맞은 창고가 화르륵 불타고 있었다.
다행히 화약창처럼 위험한 곳은 아니었기에 추가적인 폭발은 없었지만, 안심하기는 아직 일렀다.
성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포성과 함께 포탄이 하나둘씩 성벽을 넘어 날아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팡포하라! 팡포하라!"
훈련도감 별파진군관 닐스 크네흐트(Niels Knegt)가 외쳤다.
별파진 병졸들은 이 교관의 어색한 '팡포' 소리에도 익숙해진터라 군소리없이 익숙한 손길로 불을 당겼다.
- 씨이잉
강한 압력에 의해 바람을 가르며 시원스레 날아가는 포탄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일반적인 대포의 포탄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으니,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보통의 포탄과는 달리, 몹시 높이 치솟았다 급강하하는 곡사 형태를 그리며 연산관에 떨어진 것이다.
지금 발사하는 포는 유럽에서 도입한 구포(臼砲)였기 때문이다.
16~17세기에 걸쳐 독일에서는 최고 품질의 대포가 생산되었고, 구포 또한 이즈음 그들의 손에서 생산되기 시작했다.
박격포와 일정 부분 비슷한 개념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이 시대에는 보병용보다는 성벽을 넘어 포탄을 날려보내는, 공성용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조선군이 사용하는 것은 여기서 조금 더 개량된 버전으로 네덜란드의 반 쿠호른 남작이 개발한 17세기 후반의 구포에 가까웠다.
여기에 비격진천뢰를 넣어 쏘아보내니 제아무리 높고 두터운 성벽을 자랑하는 연산관이라 할지라도 무방비하게 포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 퍼펑!
"으악!"
비격진천뢰가 터지자 사방으로 비산한 쇳조각에 의해 청군들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는 불길과 연기가 상황을 더욱 수습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반격해라! 홍이포를 쏘아라!"
상가희는 급히 반격하려 했지만 이미 선수를 빼앗긴 터라 연산관의 병사들은 제대로 된 저항을 시도하지 못했다.
"저놈들······."
상가희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동팔참을 빼앗긴 후로 청의 최전선이 된 연산관이었던지라, 수시로 성벽을 보강한 탓에 웬만한 포격으로는 끄떡도 않을 것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실제로 정상적인 공성전이라면 수없이 포격을 감행해야했겠지만, 이 높은 성벽을 비웃듯 넘어오는 포탄에 병사들은 손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연산관의 성벽이 두껍다 한들 성벽 위를 훌쩍 지나 작렬하는 포탄까지 막아낼 수는 없는 까닭이었다.
"바보 같은! 정신만 차리면 관문을 지킬 수 있다! 아직 피해는 미미하고 성벽은 멀쩡하다! 조선군은 이 연산관을 조금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상가희가 독려했지만 병사들의 혼란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연산관을 바라보며 이자원은 말했다.
"지금이다! 보졸들은 공성을 시작하라!"
이자원은 이어서 미야모토 무사시를 보고 물었다.
"왜검수들이 선봉에 서면 능히 성을 함락시킬 수 있겠는가?"
"맡겨만 주십시오."
미야모토 무사시가 자신만만히 말했다.
그는 도감군 살수 일부에게 칼을 가르쳤으되 정식으로 조선의 신하가 된 것은 아니라, 어디까지나 지금은 자문역으로 종군하고 있었다.
그는 왜검 쓰는 이들이 백병전에 무척 능하므로 수십 인만 올려보내더라도 한인이 주축이 된 녹영 쯤은 단숨에 해치울 수 있을 것이라 부연했다.
"좋다, 항왜들을 풀어라!"
이자원의 군령이 떨어지자 곧장 운제가 성벽 밑에 세워지고, 미야모토 무사시 밑에서 검법을 배운 병사들이 성벽을 타고 올랐다.
"적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이자원의 호령에 개미같이 달라붙은 조선군이 청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하나둘씩 연산관의 성벽을 타넘기 시작했다.
"커헉!"
"이 왜놈들이!"
훈국 병사가 휘두른 카타나가 녹영병의 가슴에 작렬했다.
특히 물만난 고기처럼 날뛰는 이들은 김충선을 따라 훈국에 들어온 항왜 2세들이었다.
이천일류의 훈국용 검법을 익힌 그들은 청군 중에서는 당해낼 자들이 없었다.
"문이 열린다!"
연산관에 진입한 조선군은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을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과연 항왜들의 칼쓰는 솜씨는 일류올시다."
임경업이 감탄하며 말했다.
"당장 성문에 병력을 보내라! 반드시 막아야 한다!"
한편 상가희는 애타게 부르짖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일부 팔기들이 말을 타고 성벽으로 달려가 문을 여는 항왜들을 베려 했지만, 대열을 무너트리고 성문을 수복하기는커녕 오히려 중과부적으로 쓰러질 뿐이었다.
'수성을 위해 녹영을 위주로 배치한 것이 실수였던가!'
본래 여진족은 성을 끼고 싸우는데 능숙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청군 자체의 수성과 공성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의마하지는 않는다. 청에 항복한 항병으로 구성된 우전 초하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연산관을 지키는 대부분의 병력은 녹영병이었다.
팔기가 조금 있긴 했으나 지금의 교전에서 보듯 그리 많지 않은 숫자였던 것이다.
상가희가 참담한 심정으로 혀를 빼물었다.
"이, 이런."
곁에 있던 아다리는 순식간에 무너지는 연산관을 보며 당황했다.
상가희는 그런 아다리를 보며 소리쳤다.
"장군은 어서 군세를 보존하여 퇴각하시오! 비록 연산관이 떨어지더라도 청석(靑石), 회령(會寧) 등의 준령에 의지하여 길을 끊고 요양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아야 하오!"
연산관이 요양으로 나아가는 최후의 관문이라 하나, 그 뒤로 비록 성곽은 쌓지 않았으되 청석령과 회령령 등 험한 고개는 있고, 낭자산(狼子山) 같은 큰 산협이 존재한다.
상가희는 아다리가 그런 지세에 의지해 최대한 시간을 끌라고 소리친 것이다.
원래 같으면 한인 항장 따위가 황족인 자신에게 명령한 것에 분노했을 아다리이나 지금처럼 얼이 빠진 상황에서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연산관이 함락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열린 성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조선군은 함성을 지르며 첫 승전을 만끽했다.
"청장 상가희가 자결했습니다!"
연산관에 들어선 이자원에게 가장 먼저 올라온 보고는 그것이었다.
"명은 배신했으되 청에는 절의를 지켰군."
이자원이 중얼거렸다.
원래 역사에서도 삼번의 난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하다 아들 상지신에 의해 유폐되어 죽은 이였으니 놀라울 것도 없었다.
"목을 베어 조정에 보내고, 임금과 대비께 승전보를 고하라."
이자원이 담담히 말했다.
가장 까다로운 난관이 될 것으로 예상했던 연산관을 쉬이 함락하자 조선군의 분위기도 빠르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를 가만히 지켜보던 누군가가 이자원을 찾았다.
===
연산관을 함락한 조선군은 하루를 머무른 뒤 병력을 나누어 진군하기 시작했다.
관(關) 뒤에는 대천(大川)이 있고, 그곳을 지나 언덕을 오르니 옛 사당터가 하나 나왔다.
그 주변에 석탑과 석비가 있기에 이자원은 마침 그를 찾은 문사를 보내어 누구를 기리는 사당이었는지 알아보게 했다.
"비면(碑面)에 '무안왕묘(武安王廟)'라고 새겨져 있사오이다."
무안왕이라함은 곧 옛날 진(秦)의 명장 무안군 백기를 이름이다.
"백기가 비록 이름 남긴 장수라고는 하나 수천리 너머 사람이거늘 요좌(遼左, 요동) 사람이 무슨 애모하는 마음 있어 묘를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사(文士)의 말에 이자원이 답했다.
"조선에 널려 있는 것이 관왕(關王, 관우)의 묘이다. 조선 사람들은 무슨 관련이 있어 관왕묘를 만들어 놓았겠는가. 이곳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컨대 무신, 명장을 숭앙하는 것은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기왕 묘를 보시었으니 조촐하게나마 제사를 지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무안군이 요동과는 몰라도 장군과는 깊은 인연이 있을듯하니 말입니다."
무슨 의미냐는듯 이자원이 바라보자 문사, 이암은 태연히 웃으며 답했다.
"백기는 진나라를 위하여 장평에서 40만을 묻고, 또 한(韓)·위(魏)·조(趙)의 수십개 성을 취했지만 끝내 소양왕의 미움을 받아 죽었지 않겠습니까."
- 스릉
어느 틈에 뽑힌 적비의 칼이 이암의 목에 겨누어졌다.
"그만."
이자원은 적비를 제지했다.
"이리 불경한 말을 늘어놓는 것은 필시 내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일터. 그 저의가 무엇인가?"
오삼계를 통해 그에게 뵙기를 청한 이암이다.
기억의 편린 속에서 그 이름을 끄집어낸 이자원이기에 응한 것이나, 무슨 생각인지 도발부터 하지 않는가.
"소인은 단지 옛 이야기를 전한 것 뿐입니다."
"시답잖은 변명이로군."
이자원은 짤막히 답하고 침묵했다.
이외엔 별다른 질책없는 이자원의 모습에 이암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잠시 후 이자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리 있는 경고이나 그대가 내 막하에 머물고자 한다면 당장의 위험부터 고해보라."
이자원이 뜬금없이 그리 말하자 이암은 잠시 고민했다.
고개를 휘휘 저어 지세를 살펴본 그는 손뼉을 쳤다.
"연산관에서 죽지 않은 청군이 많습니다. 생각 있는 장수라면 필경 회령의 길을 끊고 장군을 기다리고 있겠지요."
이자원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박철균을 보며 눈짓했다.
그 말만으로도 알아들은 박철균은 휘하의 정초군을 이끌고 앞서 달려나갔다.
'이암······.'
원래 역사에서 그는 결론적으로는 실패한 책사였다.
그러나 지금 관찰해본 바 야망과 더불어 나름 재지(材知)있는 인물로 보이니,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사용할 수 있는 자로 보였다.
"박 별장이 앞서 갔으니 시간이 조금 남겠군."
이자원이 말했다.
"제사를 지내도록 하지."
===
연산관이 허무하리만치 무너졌다.
이 소식을 전달받은 심양의 청나라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도대체 아다리와 상가희는 어찌 했기에 연산관을 잃었단 말인가?"
강덕제 쇼서가 몸을 가늘게 떨며 말했다.
그를 지켜줄 범문정은 유배가고, 다시 허수아비 한으로 전락한 그였지만 그보다 두려운 것은 외적의 침입이었다.
"도로이 바루르 군왕, 조선군을 막을 수 있겠는가?"
도르곤도 도도도 없으니 아지거가 방어를 도맡은 최고 책임자였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신이 요양성으로 가서 직접 적을 막겠나이다."
아지거는 도르곤이나 도도보다는 직접 전공을 드러낼 기회가 적었지만 군재만큼은 동생들 못지 않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도르곤이 그더러 심양을 비워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를 남긴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면 경이 요양으로 가도록 하시오."
쇼서의 말에 아지거는 길게 읍한 뒤 물러났다.
"도로이 바루르 군왕이 묵던을 나갔으니 틈을 엿보아 대학사를 데려올 수는 없겠는가?"
그가 물러나고 나자 쇼서는 내관에게 귀엣말을 하며 물었다.
"어려울 것입니다. 대학사 일파가 모조리 쓸려난지라······. 게다가 적이 연산관을 뚫은 마당에 자중지란을 일으키셔서는 아니되옵니다."
조정의 신하 중엔 더이상 자신의 말을 따르는 자가 없다.
오직 자신이 날 때부터 섬겨온 이 내관과만 논의할 수 있을 뿐.
그러나 그마저 이런 말을 하니 쇼서는 몸에 힘이 탁 풀렸다.
"호거, 도르곤, 그리고 이제는 조선군······."
쇼서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중얼거렸다.
눈 앞이 캄캄했다.
< 개전 (3) > 끝
ⓒ 핏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