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전 (2) >
북벌군이 도성을 빠져나가 북상하던 그 시각.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지 얼마 되지 않았거늘 국력을 기울여 전쟁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일지 모르겠나이다."
강석기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청이 달단을 치러 군대를 뺄 것이란 말을 믿지 않으십니까?"
"아니요, 믿습니다. 도원수의 말은 지금껏 틀린 적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선왕인 고종은 이자원의 말을 무조건 신뢰했다.
만약 이자원이 확신한다면 그 역시 군사를 일으켰으리라.
"이 딸 또한 그렇기에 도원수를 믿고 북벌을 결행한 것입니다."
대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석기는 둘째딸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남편을 잃고 아들을 보위에 올렸다. 그 심정이 오죽하겠냐만은, 유지를 받들기 위해 여자의 몸으로 북벌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병조판서에 삼군부제조, 훈련대장에다 도원수입니까. 삼사가 지금 같아서 망정이지, 이전같았으면 그들이 완강히 반대했겠지요."
고종 시절 풍문거핵이나 불문언근 등의 특권이 폐해진 후 삼사는 상당히 위축된 측면이 있었다.
그 이전에 조정 자체가 왕당파 일색이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청서를 이끌며 고종의 수족으로 활동한 강석기 본인조차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어디까지나 난세를 헤쳐나가는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은 하였지만······.
"북벌이 끝나면 이 사람은 물러날 것입니다."
"······손자의 보위를 든든히 받쳐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정승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나이다. 세간에서는 금천 강씨 세도니 무어니 하며 떠드는 말도 많지요. 이 늙은이보다 사위가 더 쓸만하지 않겠습니까."
강석기는 황명마저 물리치고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떠난 사위를 떠올렸다.
어쩐지 인간같지 않다는 느낌마저 문득문득 받고 있지만 그래도 이 나라 조선을 위해 자신의 안위를 도외시하고 북벌을 결행한 이가 아닌가.
차라리 자신이 물러나는 한이 있더라도 조정이 그를 보호해야 하리라.
그런 강석기를 바라보며 대비가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아버님."
"예, 대비 마마."
"전하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게 남기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자원과 삼정승을 내보낸 뒤 중전을 불러 남긴 유언.
그것을 강석기는 주의깊게 들었다.
강석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것이 선대왕의 유조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대비가 강석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대비는 화제를 돌렸다.
"정선흥(鄭善興)에게 적당한 자리를 알아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갑자기 이름도 없는 자를 이르시는 이유가 무엇이온지······?"
강석기가 의아해 묻자 대비는 얼굴을 살짝 돌리며 말했다.
"그가 인열왕후의 조카이니 그런 의리로 하는 것입니다."
정선흥은 전 이조참판 정백창의 아들로, 어머니는 인조의 정비이자 대행왕의 어머니인 인열왕후 한씨의 여동생이었다. 즉 오촌조카가 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지금에 챙겨줄 이유는 없었다.
강석기가 그것을 눈치채고 조용히 캐묻는 시선으로 대비를 바라보자 대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실은 내명부에서 청이 있었습니다."
"내명부에서요?"
대비의 말에 강석기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선왕의 후궁 중 저를 그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이가 있는데, 죽은 정백창에게 은혜를 입었다 하니 그 보답이라도 해주려 합니다. 모쪼록 아버님께서 도와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사사로운 정으로 관리를 임용하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불가한 일이었지만, 그리 높은 관직을 알아봐달라는 것도 아니니 대비도 가벼운 마음으로 꺼낸 말이리라.
"허면 신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아, 아버님."
그만 일어서려는 강석기를 대비의 목소리가 잡아끌었다.
"유주는 어찌 지내나요? 안세는 상감의 배동이니 자주 입궐하지만 유주는 근래에 찾아오지 않아서 말입니다."
대비의 물음에 강석기는 돌아보고 말했다.
"둘째를 가진 모양입니다. 아직 전해듣지 못하신게로군요."
"회임을?"
대비는 웃음을 지었다.
"산달까지는 사위가 돌아와주는 것이 좋겠지만, 나랏일을 하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겠지요."
강석기의 말에 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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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탕! 탕!
조총에서 훅 빠져나온 초연이 시야를 가렸다.
엇박자를 두고 발사된 총탄이 청군에게 날아갔다.
그러나 피해는 미미했다.
"녹영군이 넘어온다!"
까맣게 넘어오는 녹영병들을 쏘아대며 가도군 하나가 외쳤다.
노밀총은 투르크계 화승총을 개조한 것으로, 이 시기에는 드문 후장식이다.
그러나 구조 자체가 복잡하여 대량양산은 불가했고 소수만이 운용되고 있었다.
가도군 기병이 저멀리서 팔기와 맞부딪혔다가 처참히 깨져 돌아오는 모양이 보였다.
"제길, 우리도 조선군처럼 그 수발총이란 놈을 지닐 수 있다면."
오삼계가 중얼거렸다.
조선군에서 수발총은 그리 많이 사용되지 않는다.
비용 문제도 있는데다 부싯돌의 수급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훈련도감이 아무리 최정예라 한들 화승총 3정을 포기하고 수발총을 쥐여줄 정도로 아직 나라 살림이 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기엔 예외가 있었으니, 기병들만큼은 수석식 권총을 사용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마린르 부르주아가 발명한 부싯돌식 격발장치는 권총에까지 적용되어, 앞으로 2세기는 족히 사용될 물건이었다.
이 플린트락 피스톨을 네덜란드를 통해 빠르게 받아들인 조선군 기병은 세 자루씩 차고 다니며 화력을 보강했다.
물론 훈련도감 기병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서, 아직 어영청이나 정초군, 다른 속오군 기병들은 어림도 없었다.
그들은 주로 창칼과 활 등 냉병기를 사용했다.
"저놈들이 저리 맹렬히 움직이는 것을 보니 달단을 치러가는건 맞는지 의심이 됩니다."
중얼거리는 부하를 보며 오삼계가 핀잔을 줬다.
"청군들이 있든 없든 우리는 명령에 따를 뿐이다. 어찌 거역하겠느냐?"
오삼계의 말에 부하들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삼계는 핏발선 눈으로 상대편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그에게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봉황성 인근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교전은 이미 일상이 된지 오래였지만, 반년 전 진강에서의 싸움만큼 맹렬히 파고 들고 있지는 않다는 것 때문이었다.
"가도에 남아있던 병력들도 모두 올라오고 있습니다."
대부분 병력이 금주와 진강에 나누어 주둔한 뒤에도 가도에는 일부 병력이 남아 해상을 관리하고 가도를 지켰다.
그런데 이자원의 명에 의해 육병(陸兵)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이곳에 올려보낸다 하지 않는가.
"정말 북벌을 할 셈인가."
지금 후방에서 동원되고 있는 조선군들을 보면 그들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강한 오랑캐들의 멸망이 목전까지 왔다니.
오삼계는 믿기 힘든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흥분을 참지 못해 부들부들 떨렸다.
'이번에 공을 세우면 실로 일등공신도 꿈이 아니로다.'
개국 이래 저 청나라만큼 명의 숨통을 죄었던 대적이 있을까.
저 옛날 야선(也先, 에센 타이시)마저 운이 좋아 영종을 사로잡았을 뿐, 싸울 때마다 이기고 명의 땅을 영구히 빼앗지는 못했다.
그러나 청은 달랐다.
운이 좋다면 제 조상인 금나라 놈들처럼 천하의 반절 쯤은 쥐었을지 모르는 자들이었다.
"부총병 대인, 가도군에 누군가가 와있는데 대인을 뵙기를 청하옵니다."
"뭐?"
그때 부하 하나가 흥분에 취해있던 오삼계를 깨웠다.
오삼계는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누구가 누군지 똑바로 이야기를 해야할게 아니냐?"
웬 떨거지를 데리고 왔을지 알게 무언가.
한참 꾸짖은 오삼계는 그제야 사람을 들이게 했다.
"소인은 하남의 문사 이암이라고 하외다."
오삼계가 들어보니 과거는 붙었으되 관직에도 나아가지 않고 세월만 보내는 촌 선비였다.
그러나 하남 구석에서 머물고 있는 자가 어떻게 가도를 거쳐 조선까지 왔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전장은 먹물 먹은 촌부가 함부로 돌아다닐 곳이 아닌데, 무슨 일로 온 것인가?"
오삼계가 짐짓 거만한 태도로 묻자 이암은 태연하게 답했다.
"내 듣기로 가도 총병은 용맹하고 지모가 있어 오랑캐들을 한 칼에 쓸어 없앤 것이 다 거기서 기인한 바라고 하던데, 부총병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가 보오."
"그럴리가 있겠느냐!"
오삼계가 성을 냈다.
그는 오히려 격장지계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헛기침을 두어번 했다.
"보아하니 적당히 관직이나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유세(遊說)하러 다니는 모양인데, 지금의 상황을 논해 보아라. 청이 달단을 노리고 있다 하는데 되려 적병이 튀어나와 싸움을 걸고 있으니 어찌 생각하는가?"
이암은 웃으면서 말했다.
"맹수는 짖지 않는 법이니 저들이 적은 군사를 쪼개어 봉성 일대를 노략질하고 분탕을 치는 것은 능히 허장성세(虛張聲勢)임을 파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바로 튀어나온 대답에 오삼계는 당황했다.
흡사 자신이 몰라서 물은 것으로 착각할까봐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오삼계였다.
"허면 우리 군만으로 능히 연산관을 취할 수 있지 않겠는가?"
가도군이 지닌 홍이포가 여러 문이다.
북벌군에 앞서 미리 연산관을 두들기고 군대를 몰아가면 단독으로 연산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오삼계는 그리 생각했다.
"그 또한 적의 노림수일 수 있습니다. 이미 청병이 심양을 빠져나갔으면 모르되, 함부로 연산관에 접근하다 대병이 일거에 쏟아져나와 가도군을 섬멸하면 대업이 초장부터 어그러지지 않겠습니까?"
이암은 조선이 움직이는 것을 가도에 와서야 알았다.
그러나 상황을 보고 듣자 그의 눈에는 어떻게 움직여야할지가 보였다.
과연 원래 역사에서 일개 역졸 출신인 이자성이 잠시나마 천하를 얻게 해준 모주(謨主)답다고나 할까.
"음."
오삼계가 숙고해보니 과연 이암의 말이 맞는 듯 했다.
"내 장막에 자리 하나를 내어줄터이니 그곳에 앉아 나를 위해 꾀를 내겠는가?"
오삼계가 이암을 귀히 여겨 물었지만 이암은 고개를 저었다.
"부총병께서도 총병의 막하에 계신 몸인데다, 조선군이 북상하면 어차피 같이 움직여야 할 터가 아닙니까. 우선 총병부터 만나뵙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리 핑계를 댄 이암은 오삼계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자도 자못 영웅의 풍모가 있으나 욕심이 재주를 앞서는 부류라 들었다.'
진강에서 있었던 일은 불과 반년전 전투였으니 금세 오삼계가 어떤 인간인지 파악할 수 있었던 이암이다.
훗날 강희제에 맞서 주나라를 일으켰다가 그 후손은 절멸되었으니 이암의 사람보는 눈은 제법 정확하다 할 것이다.
"본국의 상황은 어떠하오?"
오삼계가 묻자 이암은 답했다.
"홍승주와 조대수 양 장군은 싸울 때마다 이기나, 돌아서면 잡초가 자라듯 기민이 도적이 되고 다시 역군(逆軍)이 되니 실로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명나라 말기의 상황이 그러했다.
궁지에 몰려 죽창 하나 들고 일어난 반란군이 무에 그리 잘싸우겠는가.
그러나 명군이 열번을 이겨도 얻는 소득은 없고 군사와 양식만 소모되지만, 근본적인 원인인 기근 구제는 제대로 될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러니 끝내 숭정제는 불타는 황궁 안에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맞는 말이오."
청이 망하면 반란을 진압하러 다시 본국에 건너가야 하려나.
오삼계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멀리서 파발 하나가 튀어왔다.
"총병 대인께서 조선군을 이끌고 의주에 다다르셨습니다!"
이자원이 도착한 것이다.
< 개전 (2)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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