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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33화 (133/213)

< 개전 (1) >

대비는 이자원이 했다는 말을 듣자 결단을 내렸다.

"나중에 대국이 추궁하면 어찌하나······."

그런 말을 덧붙였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이 중요한 북벌의 기회를 날려버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자원이 예상했던대로였다.

"병조판서 겸 삼군부제조 겸 훈련대장 이자원에게 팔도 도원수를 제수한다."

명목상 좌의정 신경진이 도체찰사를 맡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도성에 남아 후방의 지원만 지휘할 것이므로 실질적인 북벌의 전권은 이자원이 휘두르게 되었다.

오군영의 고위 무관들은 모두 이자원의 명을 받들기 위해 훈국신영으로 향했다.

그는 우선 박철균을 바라보며 말했다.

"박 파총."

"예, 도원수 대감."

"지금부터 정초군 별장을 맡아라."

이자원의 말에 배석한 이들이 놀랐다.

"박 파총이 그 자리를 맡은지도 제법 되었고, 그간 공훈도 많았으니 승차를 시켜도 어색하지는 않사오나······ 훈국이 아니라 정초군을요?"

훈련중군 김충선이 물었다.

정초군은 원래 역사에서는 병자호란 직후 병조의 기병 중에서 정실(精實)한 이를 가려뽑아 창설한 부대로, 훗날 숙종대 금위영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도 꾸준히 북벌군을 증강시키려는 선왕에 의해 창설되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훈련도감, 어영청, 정초군을 묶어 역사에서와 같이 삼군문(三軍門)이라 부르기 시작하니 곧 북벌을 맡을 중앙군의 핵심이었다.

이 정초군은 본래 병조판서의 지휘하에 있었으니 따지자면 이자원의 직속 부대이다.

다만 그 밑으론 참판 이하의 병조 관리들이 아니라 별도의 별장과 낭청 등을 두어 관리했기에 병조와 지휘 체계가 완전히 호환되지는 않았다.

그 별장 자리를 박철균에게 맡긴 것이다.

'도원수가 정초군을 완전히 장악하려 하는군.'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병판이 행사하는 정당한 인사권이니 누가 감히 무어라 하겠는가.

"훈련도감, 어영청, 정초군은 모두 출정 준비를 마쳤는가?"

"그렇사오이다, 도원수 대감."

어영대장 이완이 말했다.

"삼남의 속오군도 며칠 후면 도성에 도달한다고 하오이다."

경상 감사로 자리를 옮긴 김준룡이 이끄는 경상도 속오군이 양평에 다다랐고 전라도, 충청도 속오군도 마찬가지였다.

수만이나 되는 군세가 한 덩이가 되면 움직이는 것도 쉽지가 않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중앙군은 지금쯤 출진해야 했다.

"허나 이리 움직이는 것을 구왕이 눈치챈다면 출진을 보류하지 않겠습니까?"

이완이 물었다.

그러나 이자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을 것이오."

아마 도르곤은 굳게 믿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명나라의 명을 거절한채 북벌군을 지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미 그렇게 믿고 있다면, 속여넘기는 것도 쉽다.

그리고 그 믿음을 확신으로 바꿀 수 있는 재료는 도르곤 본인이 쥐여주었다.

'스스로가 판 함정에 걸리게 되었군, 도르곤.'

이자원은 등채(藤策)를 서안에 내려찍으며 말했다.

"이 시각부터 삼군문은 청을 토멸하기 위해 출진한다! 각 군영은 명을 받들라!"

"예, 도원수 대감!"

훈련중군 김충선, 어영대장 이완, 정초별장 박철균이 답했다.

"정초군은 대로를 따라 이동하며 북병의 동원 상황을 점검하여 내게 고하라!"

"예, 대감."

"훈국과 어영청은 평양까지 진군하라!"

이자원이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호명되지 않은 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어청과 총융청은 도성의 방비를 맡으라."

이자원의 눈길이 그들을 향하자 수어사와 총융사는 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수어청과 총융청은 삼군문에 비해 지원도 적고 정예함도 뒤떨어지는터라 이제까진 비교적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삼군문이 출진하니 도성의 방비는 전적으로 그들에게 달린 것이다.

아마 막대한 중압감이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을 것이다.

이자원의 시선이 잠시 그들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김충선과 이완, 박철균을 향했다.

"가족이 도성에 있는 자들은 오늘 내로 만나고 와도 좋다 일러라."

무수한 장졸들이 타지에 몸을 뉘일 것이다.

이것이 군인이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

모두가 이자원의 집무실을 떠난 그때.

남아있던 박철균이 슬며시 물었다.

"대장 영감께서는 마나님을 뵙고 오셨사오이까."

도원수 대감이라 칭할 때는 언제고 다시 '대장 영감'으로 돌아가버린 호칭이다.

"나는."

이자원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품은 결심을 다하자면, 가족을 볼 이유는 없었다.

차라리 외면하는 것이 나았다.

'어차피 목적을 위해 이룬 혼사일 뿐.'

이자원은 고개를 저었다.

'잃더라도 아쉬울 것은 없다.'

===

북벌을 위해 조선은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병자호란 때 충청수사를 맡았다가 지금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강진흔(姜晉昕)이 군선과 조운선을 가리지 않고 양곡을 실어 북쪽으로 올려보내고, 전국에 하달된 속오군 동원령탓에 각지의 감사와 병마사들이 바삐 움직였다.

"드디어 전란이 끝날란가."

"저 오랑캐 놈들이 우리를 얼마나 괴롭혔는가. 성상께서도 흉참한 일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분통이 터지고? 이제야 한을 풀게 생겼군."

"임금님 돌아가신건 내 모르겠고, 우리 아들이나 몸 성히 돌아왔으면 좋겠네 그려."

백성들은 구름같이 몰려들어 삼군문을 전송하는 통에 장안이 텅 비었다고까지 일컬을 정도였다.

그처럼 환호성과 함께 떠나가는 삼군문이지만 정작 훈련도감 초관 허응선은 한숨을 쉬었다.

"진강 다녀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전쟁인가?"

벌써 무과에 입격하여 초관밥을 먹은지도 오래.

고향의 자식들 얼굴 한번 보러갈 틈없이 전장에만 불려다녔다.

나름 그간 전쟁에서 공훈 있었던 터라 품계도 높아졌지만 역시나 한해에 두번이나 출진하는 것은 제아무리 훈련도감이라 해도 힘들었던 탓이다.

그러나 군관된 몸으로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형은 왜 일신의 고단함만 생각하시오? 죽으나 사나 상감의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소? 대비 마마께서도 도원수 대감이 올린 글월을 보고 당장 출진을 하라 명하셨다던데."

동료 초관인 이사룡이 말했다.

"와아아!"

백성들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행렬 중간에 백마를 타고 넘어오는 이자원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남도 사람들은 통제공을 그리 각별히 생각한다던데 거기에 못지 않은 것 같소."

"전란을 이겨내고 사방을 종횡무진하며 오랑캐를 토평한 영웅이 아니신가."

호란 때 떠돌던 이자원에 대한 흉흉한 소문마저 이제는 비범한 상승장군(常勝將軍)의 일화 쯤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오랑캐 황제를 죽이고 전란으로부터 백성을 구한 영웅.

그들은 이자원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 이자원 뒤를 따라가는 여러 군관들 사이로 웬 아이 하나가 보였다.

"저기, 신 초관아."

허응선이 부르자 곁에 있던 누군가가 고개를 쭉 빼밀었다.

"예, 선진(先進) 나으리."

신류(申瀏)라 하는 이 초관은 본래 문과를 준비하다 몇 차례 낙방했다고 한다. 그러다 근 몇년 무관들에 대한 인식과 대우가 상당히 좋아진 까닭으로 무과로 돌려 단번에 합격했다.

제법 성적이 좋았던 모양인지 신출내기가 훈련도감에 들어와 허응선과 이사룡 밑에 배치된지 반년쯤 되어갔다.

"저기 저놈, 훈련도감 영채에 갇혀있던 놈이 아니냐?"

"예 그렇습니다. 도원수 대감의 호위가 근래에 데리고 다니는 것 같던데······ 북벌에도 종군하는 줄 몰랐소이다."

소문에는 원숭환의 아들이라 하던데, 그게 사실이라면 사기를 북돋는데는 더할 나위 없으리라.

영원성에서 청군을 때려잡던 원숭환의 명성은 요동 전역에 퍼져있었으니.

그 말처럼 원문필은 이자원이 명나라 소기(小旗) 직위를 맡겨 종군케 한 터였다.

그러나 실상 원숭환의 아들이라는 프로파간다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도원수 대감 풍모는 당당한데 어째 영 엉망인 양반도 있구려."

이사룡이 손가락으로 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손가락 끝에는 얼굴이 잔뜩 구겨진 마병별장 황익이 있었다.

"제길, 제길······ 간만에 한고비 넘겼는가 했더니 다시 출진이라니."

그것도 이전같은 소규모 전투가 아니라 나라 전체를 흔들어 만든 5만 대군이다.

아예 청을 멸망시키려고 움직이는 원정군인만큼 죽어나갈 인간도 많을 것인데, 그 중 하나가 자신이 되지 않으리란 법이 있는가.

각자가 저마다의 생각을 품고서, 조선군은 출진했다.

===

심양.

이곳으로 날아온 급보를 받아든 수크사하는 곧장 우익왕정으로 향했다.

"원문필이 보낸 서신입니다."

"그놈이 살아있었던가?"

도르곤이 의외의 소식에 미간을 좁히며 서신을 받아들었다.

원문필은 숭정제의 의심을 자극하기 위해 던진 버림패일 뿐.

이자원이 그를 받아들일줄은 몰랐다.

"이자원은 명나라에 입조할 것이고, 북벌군은 이완이란 자가 이끌 것이라······."

믿을만한 정보일까.

"아무리 그래도 그 원숭환의 아들이 아니겠사옵니까. 제 아비의 후광이 드리워진 결과겠지요. 이번 조선군에도 종군한다 하니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수크사하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도르곤은 이자원이 원숭환의 아들이란 이유 따위로 그를 썼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나 수상하군."

도르곤이 중얼거렸다.

원문필이 북벌군에 종군을 한데 더불어 이자원이 순순히 명나라에 입조를 하다니.

차마 명과 각을 벌리고 싶지 않아하는 조선의 입장상 황명을 따르리란 생각은 했지만.

"쉬워, 너무 쉬워."

도르곤이 말했다.

무언가를 놓친듯한 찜찜함.

"허면 몽골 원정을 취소해야겠습니까?"

수크사하가 물었다.

그러나 도르곤은 고개를 흔들었다.

"원문필의 필체는 확실하던가?"

"그렇습니다."

"······."

원문필은 태어났을 때부터 청나라 사람이었다.

그 핏줄이 원숭환에게 닿아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기에 명나라에 증오를 품고 있지 않던가.

"이자원의 입조 자체는 사실일듯 하군."

제 목을 위해서든 조선을 위해서든 이자원은 입조해야할 것이다.

게다가 몽골 원정을 준비하고 있는 도르곤 입장에선 그것이 사실이어야만 했기에, 마음속 찜찜함을 애써 털어냈다.

조대수가 대동을 되찾았지만 호거가 입은 군사적 타격 자체는 미미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명나라를 압박할 경로가 사라지고 경제적으로 고립되었다는 것.

군사력을 충분히 들여 화북을 약탈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4오이라트 연합이 동진했으니 호거는 그리로 전력을 집중해야만 했다.

"응창만 얻는다면 호거는 갈곳이 없다."

근거지를 두번이나 잃은 주인을 모시고 따라나설 팔기도 없을 것이고, 머지 않아 호거를 이탈해 청에 다시 흡수되리라.

"호거를 참하고 이 대청(大淸)의 영광을 다시 되찾겠다!"

도르곤이 선언했다.

그의 눈은 야망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대저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은 발 밑의 함정마저 잘 보지 못하는 법이다.

"다만 범문정 그 늙은이는 없애고 가야겠지."

도르곤은 호거가 범했던 실수를 할 생각은 없었다.

먼 곳으로 유배갔다 하나 무슨 짓을 꾸밀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도로이 바루르 군왕, 그대에게 맡기겠소."

"예, 대왕."

아지거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범문정과 범문채 형제를 죽이라는 명이었다.

아지거는 성격이 진중하고 무엇보다 동복형제인지라 미더웠다.

그에게 심양을 맡기고 범문정까지 제거한다면 걱정할 일은 없으리라.

도르곤은 몽골을 향해 군사를 일으켰다.

< 개전 (1)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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