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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32화 (132/213)

< 기로 >

조선왕의 정통성은 여러 가지 경로로 세워질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명 황제의 승인과 책봉이다.

따라서 새로이 왕위에 오른 이백이 고종의 적장자임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책봉을 미적지근하게 미루어 두었다는 것은 정통성에 치명적인 문제였다.

"황제께서 진정 그리 말씀하셨단 말이오?"

대비가 묻자 황급히 귀국한 구인후는 고개를 조아렸다.

얼마나 급히 되돌아왔는지 잡다한 물건과 일행들은 모두 뒤에 떼어놓고 책봉주청사 구인후가 직접 벽란도에서 말을 몰아왔을 정도다.

"병판."

"예, 마마."

"정말······ 인조대왕께서 청군의 손에 돌아가신게 아니란 말이오?"

대비 강씨는 당시 강화도에 있었기에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자원에 의해 조작된 진상을 들은 다음엔 그러려니 했고.

'선왕의 입장에서도 좋을 것이 없는 이야기였으니.'

대비가 모르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인조는 청군 손에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이자원이 망설임없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가 선수를 쳤다.

"인조대왕께서는 분명히 오랑캐의 손에 훙서하셨사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신을 믿으소서, 대비 마마. 신이 목을 걸고 보증하겠나이다."

영의정 최명길의 말이었다.

언제나처럼 곧은 목소리로 말을 꺼낸 그를 수렴 너머에서 바라본 대비는 한숨을 쉬었다.

"내 영상을 믿겠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어린 아들을 위해서라도 그것은 진실이 되어야만 했다.

"황제께서 오랑캐의 참소를 믿고 우리를 의심하니 매우 가슴아픈 일이오. 게다가 우리가 대국의 땅을 탐낸다는 말까지 퍼졌다니······."

따지고 보면 진강과 동만주를 손에 넣었으니 명나라의 영토를 먹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북벌을 위한 기반이 아닌가.

선왕도 정말 땅을 탐내 취한 것은 아닐 터였다.

대비는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조는 그럼 영영 책봉을 아니해주겠다 하였소? 설마 북벌조차 가로막는 것은 아니겠지?"

"청은 천조의 대적이기도 한데 어찌 그것을 허락치 않겠사옵니까. 다만,"

구인후가 말을 이었다.

"북벌을 완료하면 다시 요동을 천조에 넘기라 하였사옵니다."

"······."

이자원은 입을 다물었다.

바닥을 향하고 있는 그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

"본래 요동은 대국 영토이니 어찌 의리상 그러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러나 이자원과 달리 조정의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지당한 말씀이옵니다.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으니(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북벌의 뜻은 복수설치에 있지 땅에 있지 아니하나이다."

"신 또한 조선은 오로지 임금의 원수를 갚고자 할 뿐이지, 대국의 땅에는 한치 욕심도 없음을 분명히 하고 왔나이다. 신이 그리 고하자 황상께서 조칙을 내리시어 곧 책봉할 칙사를 보내겠다 하셨사옵니다."

"잘하시었소. 이미 사위(嗣位)한지 오래거늘 책봉이 더 늦어지면······."

대비와 주청사가 나누는 대화가 울려 퍼졌지만 이자원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가.'

대비에게 중요한 것은 아들이 명에서 원활히 책봉을 받는 것, 그리고 신하들에게 중요한 것은 인조의 원수를 갚는 것 뿐이다.

요동이 명의 영토인 이상 그들이 감히 가질 수 없고 탐내서도 안되는 물건인 탓이다.

이들에게 그것은 부모의 재산을 강탈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에.

유학은 조선의 통치이념이며 대외관계에서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다.

국초(國初), 홍희제를 담력없는 임금이라 비웃던 조선인들은 지금 시점에 이르면 진실로 명나라 황제를 어버이로 섬기고 있었다.

부모가 제아무리 어리석고 의심많다 해도 저버릴 수 없는 것이 유학의 기치.

임진왜란 이후 존주대의란 개인의 생사나 국가의 존망보다 중요한 불변의 가치가 되었다.

단순히 '황태극을 죽였으니 재조지은을 갚았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부모의 은혜를 자식이 모두 갚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여기에 청이 망하면 당연히 명이 국세를 회복하여 이전으로 되돌아가리란 현실인식이 더해졌으리라.

그러니 나라의 전력을 소모해 5만의 군세를 동원하고 북벌이 성공한 뒤에도 그냥 물러나겠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

이자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병판은 어찌 생각하오?"

"······지당하신 하교이옵니다."

혈관을 타고 치솟는 어떤 감정을 억누른채, 이자원은 그렇게 대답했다.

주청사 구인후는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대비에게 말했다.

"하옵고 황상께서 이른 말씀이 하나 더 있었사옵니다."

"무엇이오?"

"병판이 천조 총병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들을 고하지 않은 점이 괘씸하다며 입조하라는 명이 떨어졌사온데······."

그리 보고하던 구인후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이자원의 입에 보는 사람도 놀랄 정도로 싸늘한 웃음이 감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명 황제가 이자원을 소환했다고 하옵니다."

도도의 말에 도르곤은 오랜만에 한껏 웃음을 터뜨렸다.

"대왕의 말씀이 정확히 들어맞았사옵니다. 그 의심많은 황제가 역시 두고 볼리는 없었겠지요."

"가도 총병이란 직이 그놈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진짜 청군이 조선왕을 죽였는지, 아니면 요토가 삼전도에 끌려갈 때 외쳤다는 말처럼 다른 의혹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것은 그저 조선을 흔들어놓기 위한 미끼일 뿐.

여기에 더해 조선에 대한 의혹을 수 개나 던졌으니 그 숭정제가 가만 있고 배길까.

"명나라가 이자원을 불러들이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의 행동에 대해 명의 장수로서 보고하지도 않았으니."

이 문제들에 대해 조선을 질책해놓고 이자원도 건드리지 않은 채 넘어갈 수는 없으리라.

그러니 이자원을 소환하는 것은 예상했던 바.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도르곤이 짠 계략의 핵심이었다.

"이자원이 북경에 들어가면 어떤 처벌을 받겠습니까?"

"원숭환처럼 제거해버리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지금은 이자원을 죽이려고 불러들이는 것은 아니다."

도르곤이 말했다.

숭정제는 원숭환처럼 정말 괘씸했다기보단 자신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기 위해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것이리라.

"아마 가도 총병직을 면직시키고 그 자리에 한인(漢人)을 앉히려 드는 정도겠지."

조선이 힘들여 복구시킨 가도의 군병들은 고스란히 다시 명의 손에 들어가는 것이다. 당연히 지금처럼 실질적으로 조선군 휘하에 있는 것보단 나았다.

게다가 더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었다.

이자원이 순순히 명나라에 들어간다면 조선의 북벌은 늦춰지거나 그가 없는 상태로 진행해야 한다.

전자라면 당연히 호거를 토벌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는 셈이고, 후자라 할지라도 그리 두렵지 않았다.

그때 아지거가 물었다.

"허나 그가 황명을 받들지 않는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대왕."

"그렇게 되면 이자원은 끝장이오."

도르곤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조선이 이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명에 맞설 생각을 하지 않는 이상.

그리고 도르곤은 그럴리는 없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어찌할테냐, 이자원."

자신의 목을 걸고 청을 토벌하러 북상할 것인지.

혹은 명에 입조하여 이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릴 것인지.

그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리라.

===

이자원은 병조판서가 된지 오래였지만 그는 대개 경희궁 인근 훈국신영에서 업무를 보았다.

훈련도감이야말로 그가 초관부터 몸담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곳이었으니 모든 면에서 병조보다 편했던 것이다.

이자원은 찻잔이 식을 때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황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자원은 조선인이나 명나라 관직을 받든 가도 총병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명분상으로는 황제가 부르면 달려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원숭환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조정에 들어갔다 죽었으니 이자원에게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있겠는가.

"소인이 이리 부탁드리겠나이다. 입조하십시오."

적비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상관이자 감시 대상.

상대가 상대였으니 정이나 의리 같은 감정은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맞다.

단지 이자원을 감시할 뿐이지 섣불리 조언을 건네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자원은 청을 멸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다.

숭정제의 의심에 휘말려 죽어버려서는 안되었다.

그의 양부같은 이는, 한 사람 뿐이면 충분했다.

그러니 아직 숭정제의 의심을 풀 길이 있을 때 푸는 것이 좋았다.

"황상께서는 진실로 장군이 배신했다 믿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장군의 안전은 소인이 보장하겠습니다."

"알고 있다."

이자원은 조용히 말했다.

"황제가 진짜로 나를, 조선을 의심해 못견딜 지경이었다면 금주의 우리 병력부터 빼라고 했겠지."

각지에서 산발하는 반란이고 뭐고 조대수를 금주로 돌려보낸 뒤 심기원을 내쫓았으리라.

그렇다면 숭정제가 원하는 것은 책봉을 인질로 요동을 탐내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이자원을 입조시키는 것.

이를 통해 소위 '기강 다지기'를 하는 것일 뿐.

진심으로 이자원을 의심해 죽이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 북경으로 떠난다면, 북벌은 남의 손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

그리되면 설사 북벌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죽 쑤어 개를 주는 결과가 되겠지.'

이자원의 눈이 적비를 향했다.

"장군께서는 이미 결심을 굳히셨군요."

그 눈을 본 적비가 말했다.

"장수가 외방에 나와있으면 임금의 명이라 할지라도 듣지 않는 법이라던가."

이자원이 중얼거렸다.

대비도 조정도 가타부타하지 못하고 이자원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북벌을 지휘할 사람은 이자원 밖에 없었기에.

'황명과 북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으니 무어라 말을 못꺼내는 것이겠지.'

그들의 입장은 이해가 갔다.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황명을 거부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마 전쟁이 끝나고 나면 문제가 되겠지."

이자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입조를 하지 않은 점에 대해 숭정제가 추궁하면 조정의 입장에서 가장 간편한 방법은 모든 책임을 이자원에게 떠넘기는 것.

북벌을 이루고 나면 사냥개의 쓸모도 다한 뒤일 터이니 문제 없으리라.

군부를 장악한 외척을 잃은 대비야 속이 쓰리겠지만, 제 아들이 재위 내내 명나라의 압박을 받는 것보단 낫다고 여길 것이다.

지금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않더라도 결국 최후에 조선 조정은 그런 결론에 다다를 터.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군.'

이자원 한 명의 희생으로 조선은 인조의 복수를 하고, 명은 요동을 되찾으며, 어린 임금은 조부의 원수를 갚고 아버지의 유언을 이루는 군주가 될 수 있다.

그렇게 기존의 천조질서를 회복하여 이것이 만세불변(萬世不變)토록 이어지기를 원하리라.

'싸워야 할 상대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군.'

이자원은 식은 차를 들이켰다.

씁쓸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적비."

"예, 장군."

"나는 청을 멸할 것이다."

"······."

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을 위해서도 아니라,

이젠 자신의 기억에만 남아있는 그 나라를 위해서.

"박철균."

이자원의 말에 박철균이 곧장 대답했다.

"예, 대장 영감."

"대비께 가서 전하라. 내게 도원수 직을 맡겨 북벌케 해주신다면, 모든 책임을 내가 안고 가겠노라고."

그것을 위해선 앞을 가로막는 것이 청이든 명이든,

혹은 조선이 되었든.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 기로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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