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문곡직 >
도르곤이 서쪽으로 간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북벌에 관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청의 주력이 빠지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대비 강씨에다 최명길, 신경진, 강석기의 삼정승도 찬성한 일이었으나, 오로지 단 한 사람만이 이자원에게 맞서고 있었다.
"벌써 밀과 보리가 말라죽어 온 들이 붉게 물들었으니, 이는 전고에 없던 큰 재변이옵니다. 풍(風)·수(水)·한(旱)·상(霜)의 재해가 혹독하고 백성이 먹을 것이 없는데 어찌 한해에 두번이나 군사를 일으키겠사옵니까. 자전께서는 통촉하여 주소서."
경상 감사로 나간 심열을 대신해 호조판서의 직에 오른 김육이 바로 그였다.
"병란(丙亂) 이래로 재액 없는 해는 없었으나 그간 군사를 일으키는데 어려움은 없었소이다. 그때 움직이지 않았다면 오랑캐들을 지금의 지경에 몰아넣지 못했을 것이오. 하물며 지금이겠소이까."
대비를 대신해 이자원이 말했다.
그러나 김육은 고개를 저었다.
감자와 고구마 등 구황작물의 보급으로 남는 박토(薄土)라도 갈아 소출을 얻게 되었으되, 그렇다 해도 어디까지나 굶어죽는 것만 겨우 면하게 되었다는 뜻일뿐.
"기근에는 세를 덜 걷거나 아예 걷지 않는 것이 나라의 법도요. 최소 삼분지일로 경감해야 마땅하거늘, 군사를 일으킨다면 쓰임을 도저히 줄일 수 없을 터이니 고스란히 민력의 부담으로 이어질 것이오."
이자원과 김육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김육은 이자원의 눈을 피하지 않고 노려보았다.
이자원 덕에 여러가지로 나라 사정이 개선된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대동법 확대를 간하고, 각지에 들어선 염전과 인삼밭으로 물산이 흥성하였으며, 구황 작물도 보급이 되었다.
북방 마시와 가도, 벽란도를 통한 무역의 활성화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이자원은 북벌에 집착하고 있었다.
"군부의 원수를 갚는 일인데 어찌 백성들이 입을 것, 먹을 것을 아낀단 말이외까."
이자원의 말에 김육은 이를 악물었다.
이 나라의 국시는 북벌이다.
인조가 오랑캐의 손에 죽었다는 명제가 흔들리지 않는 이상 이 논리를 반박하는 것은 불충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김육은 대비를 향해 일성을 내질렀다.
"자전께서는 굽어 살펴주십시오. 지금은 군사를 일으킬 때가 아니옵니다. 올해 농사를 그르치면 마땅히 창오(倉?)의 양식을 풀어 기민(飢民)을 구제하여야 할 것이온데, 다시 군사를 일으킨다면 군량의 소용 때문에 굶어죽는 자가 속출할 것이옵니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곳에서도 병자호란 이후로 매년 흉년이 들었다.
그것을 그동안은 어찌저찌 메워온 것일뿐.
그러나 김육의 피를 토하는 듯한 간청에도 이자원은 단호했다.
"나는 선왕의 유조를 받들어 북방으로 나아가려 하건대, 하루라도 빨리 오랑캐를 섬멸하는 것이 백성을 돕는 것이오."
고종이 남긴 유조에다 대비와 삼정승의 지지를 받고 있고, 외척이자 권신인 이자원에게 이렇게 대놓고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작금 조정에선 이 김육 뿐이리라.
'당신이 좋아하는 민생을 위해서라도 근 수년간 끌어온 북벌을 끝내는 것이 낫다'는 말에 김육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국시를 포기할 것이 아닌 이상 말이야 맞는 말이 아닌가.
'물론 거기서 끝은 아닐 것이다.'
이자원은 말을 이었다.
"대비께서는 모쪼록 교지를 내시어 팔도의 양곡을 모으고, 가려뽑은 장정으로 하여금 북방으로 나아가게 해주십시오."
이자원의 청에 대비 강씨가 말했다.
"병판의 말대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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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북벌을 하러 가는 것이외까."
박철균이 침을 튀기며 말했다.
충청도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로 예전처럼 방정맞은 성격은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흥분에 슬쩍 그런 면모가 다시 드러난 모양이었다.
"국운을 건 싸움이 될 것이다."
반면 이자원은 어느때보다 냉정했다.
훈련도감군이 6천, 어영청군이 2천 5백, 정초군이 1천이니 합이 1만.
평안과 황해에서 1만 5천.
다시 가도군과 삼남 등에서 끌어모은 병력까지 포함해 5만.
소요되는 군량과 병기의 양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실패하면 뒤가 없다.
'조금 더 준비를 했어야 했을까.'
너무 서두른 것이 아닐까.
몇년간 차근차근 시간을 들이며 어영청과 정초군을 훈련도감 수준으로 끌어올렸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목숨을 걸어야겠지."
목을 건다는 이자원의 표정은 거짓 같아 보이지 않았다.
반쯤 들뜬 기분으로 말을 건넨 박철균은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섬짓했다.
'대장 영감은 도대체 어째서······.'
옛날 제갈량은 수어지교를 잊지 못하고 유비의 유언을 받들었다 하지만, 이자원은 달랐다.
폐주의 아들인 그가 인조에게 무슨 대단한 은혜를 입었다고 북벌에 목까지 걸겠는가.
- 이자원은 무엇을 위해 이런 방략을 짜내고 있단 말인가?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것은 아민이 던진 물음이다.
"대장 영감께오서 북벌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이오이까."
박철균은 기어이 입을 열어 물었다.
"소관이 그간 지켜봐온 바로는, 대장께서는 인조대왕이나 고종대왕 두분께 모두 애틋한 정을 갖고 있지는 않으시오이다."
이자원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헌데 호조판서의 말씀처럼 수많은 백성들을 전쟁에 몰아넣어가며, 수많은 생령을 잃어가며 북벌하시려는 이유가 무엇이오이까?"
"······."
이자원은 박철균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언젠가 선왕에게도 건넸던 말이었다.
"그래서 민생에 어려움이 있어도 북벌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이오이까?."
"북벌이 목적이라고 누가 이야기하던가."
"예?"
그럼 두메산골 호랑이나 때려잡자고 이 난리를 치고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잠시 멍해있던 박철균은 이어지는 이자원의 말에 놀랐다.
"북벌 또한 수단일 뿐이다."
인조의 죽음을 복수하려는,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에게는 목적이겠지만.
이자원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 내가 보니까 상황이 심상치가 않아. 제수씨랑 애들이라도 어떻게······
너무 오래 썼던 물건인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공교롭게도 손에서 붓대가 빠직, 하고 빠그라졌다.
"대, 대장 영감. 피가······."
"허둥대지 마라."
이자원은 흰천으로 손에서 배어나오는 피를 닦았다.
자수가 놓인 손수건이다. 유주가 직접 놓은.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이자원은 입을 열었다.
"원문필을 불러와라."
도르곤이 펼친 공작질은 조선에만 한정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명에도 수작하려 들리라.
스스로의 계책이 완벽히 통했다고 믿을 때에만 그는 움직일 터이니, 그렇게 믿도록 해주어야 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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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새로 보위에 오른 이백의 책봉을 청하기 위해 보내진 사신들은, 저번 책봉주청사와는 달리 가도의 협조 덕에 순탄히 이곳에 닿을 수 있었다.
자금성의 위용에 찬탄을 금치 못하며 들어선 책봉주청사 일행이었으나 이내 그들의 감탄은 팽팽한 명 조정의 분위기에 누그러졌다.
"······소방이 불행하여 짧은 시기에 임금을 둘이나 잃었으니 모쪼록 황상께서는 은덕을 베풀어 인신과 고명을 내려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사신단이 들어설 때부터 노기가 서려있던 숭정제 때문에 표문을 읽어내려가는 구인후의 목소리가 떨렸다.
숙부인 구굉이 이자원과 함께 선왕의 책봉을 주청하러 갔을 때는 황제가 매우 흔쾌히 칙사를 보내주었다 들었다.
그런데 이 분위기는 무엇인가.
숫제 죄인 취급이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너희 나라가 대국을 속이고서 감히 책봉을 해달라 하는가?"
표문을 모두 읽자마자 노기 어린 음성이 튀어나왔다. 그에 구인후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더듬었다.
"소, 소방(小邦)은 천조를 부모처럼 섬기고 있사온데 어찌 그런 일이 있겠나이까. 번신은 조선의 고관이나 감히 천조를 속인다는 의논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인지 몰라 다급히 변명한 구인후였지만 숭정제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원숭환은 나라를 배신한 죄인인데 그 아들 원문필을 잡았으면 당장 목을 베거나 대국에 보낼 일이지 오히려 그를 보호하고 있지 않느냐?"
예상했던 추궁이었다.
구인후는 침착하게 답했다.
"소방에서 조사를 하여보니 허황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목을 취한다면 금주의 군심이 동요할 것이 뻔하기에 잠시 소란이 잠잠해질 때까지 두고 보았다가 경사로 압송하려 하였나이다."
"허면 너희 나라에 간 오랑캐 사신이 천하를 나누어 갖자는 말을 한 것은?"
"분수를 모르는 오랑캐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긴 하오나, 저희 임금께서 단호히 명을 내려 전부 추포하였다고 들었사옵니다."
잉굴다이를 비롯한 사절단이 옥에 갇힌 것은 책봉주청사가 출발한 뒤의 일이었지만, 뒤따라오는 소식은 계속 듣고 있었던 그들이었다.
책봉주청사의 해명은 계속 머리를 맞대고 짜낸 것이었으므로 숭정제의 의심을 풀기에는 충분하다 여겼다.
"오히려 밤낮으로 북벌을 위해 군마를 조련하고 있사오니, 조만간 금적(金敵)을 멸하여 군부의 원수를 갚고 천조를 위할 수 있을 것이나이다."
"그래?"
숭정제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임금의 원수는 실상 오랑캐가 아니라 하던데?"
"예, 예?"
구인후의 등에 땀이 쭉 났다.
"금의 자칭 구왕(九王)이 알려오기를, 성벽을 넘은 것은 사실이나 직접 충문왕을 저희 군사가 죽였다는 증좌는 전혀 없다 하였다."
이미 호란 때 삼전도에서 넘겨진 요토가 제기한 의문이었지만 그간 조선이나 청 누구도 깊이 파고 들지 않았다.
조선은 진상을 아는 몇몇 신하들 외에는 그리 굳게 믿고 있었고 청도 어차피 홍타이지가 죽은 이상 인조라도 죽였다고 선전하는 편이 나았으니.
그러나 도르곤이 갑자기 이것을 들춰낸 것이다.
"너희 임금이 야인 군대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복수를 하러 북벌을 하려 드는 것인가? 너희가 요동을 탐내 그리하는 것이냐?"
숭정제는 의심이 가득 찬 눈빛으로 물었다.
"폐하! 번신들은 오로지 충문왕(忠文王, 인조)의 원수를 갚기만 원할 뿐 다른 마음은 전혀 없나이다! 금나라 도적들이 하는 말을 어찌 믿겠나이까!"
"네놈들이 동북을 병탄하고서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
"······!"
명조는 흑룡강 일대에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를 설치하여 지배를 시도했다.
물론 유명무실한 것으로서, 명의 직접 지배 하에 들어간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지금으로선 명나라가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아민이 죽고 조선이 동만주를 장악한 것은 명분상으로는 명의 영토를 침범한 것.
'이미 요서까지 밀려난데다 각지에서 반란이 터져나오는 명이니 적당히 눈감을 것'이라는 이자원의 판단은 옳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숭정제가 그런 명분을 들고 나오니 구인후로서는 할말이 없었다.
"그 땅의 야인들은 청에 대항해 싸우고 있으니 관리와 장수를 보내 잠시 돕고 있을 뿐이옵니다."
구인후는 땀을 흘리며 그리 답했다.
"그렇다면 너희가 여진을 멸하고 나서도 황토(皇土)에는 전혀 욕심이 없겠구나."
사신단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북벌은 당연히 해야할 일이었지만, 그 뒤의 미래에 대해선 크게 생각해보지 않은 그들이었다.
청이 망하면 당연히 명이 주도하는 천하질서가 회복될 것이고, 그리되면 싫어도 요동은 돌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이옵니다."
그러니 사신들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숭정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가도 총병 이자원은 천조의 관직을 받았음에도 이런 보고를 올리지 않았으니, 엄히 문책해야 하리라."
숭정제가 말했다.
"직접 입조하여 해명토록 하라."
< 불문곡직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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