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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28화 (128/213)

< 승천 >

"대장 영감께 서둘러 입궐하라는 명이옵습니다."

궁에서 나온 선전관의 말에 이자원은 서둘러 창경궁으로 향했다.

이미 어린 세자가 임금의 옆에서 고사리손으로 병구완을 하고 있고, 영상 최명길, 좌상 신경진, 우상 강석기의 삼정승이 앉아있었다.

그 외에는 이자원 뿐이었으니 당금 임금이 신임하는 신하는 모두 불러모은 것이다.

임금은 침전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력이 쇠잔하여 정신을 잃고 쓰러진지 벌써 며칠이라, 내관이 이자원이 왔음을 일러주어도 따로이 인사를 할 정신이 아닌듯 보였다.

"제신(諸臣)은 들으라."

"예, 전하."

"나라가 환란을 당하여 인조대왕께서 돌아가시고 운명이 위태로웠을 때 그대들 같은 현신(賢臣)이 있었기에 종사를 보전할 수 있었다. 이제 세자는 아직 연소하여 물정을 모르고, 중전은 현명하나 규중의 아녀자에 불과하므로 그대들이 나를 섬겼듯 세자를 보좌해야 할 것이다."

임금은 쇠약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세자께서 인군의 자질이 있으시고 또 중전께서는 감히 여느 사내가 미치지 못하는 분이시니 어찌 보전치 못하겠나이까. 신들을 믿어주소서."

최명길이 엎드려 말했다.

인조의 죽음도 눈 앞에서 본 그로서는 차마 임금을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이미 옥체는 버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신경진과 강석기도 눈물을 글썽이며 비슷하게 답했다.

"훈련대장은 답이 없는가."

"세자께오서 신을 믿고 쓰시는 한 신 또한 몸을 아끼지 않고 충심을 다하겠나이다."

이자원이 말했다.

눈물을 필사적으로 삼키고 있는 다른 신하들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살짝 어두웠을 뿐이다.

그러나 임금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대의 재주는 나보다 백배는 나으니 능히 대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임금으로서 내놓기 쉽지 않은 말이었지만 어차피 후일을 부탁하는 판이니만큼 이를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세자야."

임금은 어린 아들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세자는 그 나이에도 임금에게 드리운 죽음의 기운을 느꼈는지 눈물이 흘러넘쳤다.

"너에게 이 나라의 대업이 맡겨져있느니라. 항상 삼가고 조심하여 종사를 보전하고, 북벌의 대업을 완수하여라. 여기 삼정승과 병조참판이 너를 도울 것이다."

누운 임금에게서도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같이 어린 아이에게 너무 과중한 짐을 지게 하니 내가 죄인이로다. 하지만 원수를 치는 일은 한시도 멈추거나 게을리해서도 안되는 법이다. 네가 사리를 분별할 수 있을 때까지 바깥일은 이자원에게 맡기고 안의 일은 삼정승에게 물어보도록 하거라."

세자에게 하는 말이지만 실상 수렴하게 될 중전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했다.

유언을 남긴 임금은 이내 중전 강씨를 들어오게 했다.

삼정승은 흐느끼며 침전을 빠져나갔고, 이자원은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이제는 내 손에 모든게 달렸군.'

그를 강력히 지지하던 임금은 죽고 물정 모르는 세자가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외척으로 떠오른 그를 견제하는 세력은 필경 생겨날 것이고,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는 자들도 많으리라.

"아이고, 아이고!"

건물을 채 빠져나오기도 전에 곡소리가 울려퍼졌다.

발걸음을 옮기던 삼정승은 사색이 되어 도로 침전으로 달려갔다.

이자원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1641년 8월.

임금이 창경궁 정침(正寢)에서 승하했다.

스물여섯에 아비의 죽음을 겪고 왕위에 올라, 북벌에 매진한지 4년만의 일이었다.

이제 대위는 보령 여섯의 어린 세자 백(栢)에게 돌아갔다.

본시 석철이란 아명을 썼으며, 원래 역사에서는 경선군(慶善君)이라 불렸던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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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렴을 맡게 된 중전, 아니 대비 강씨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대행왕의 묘호와 시호를 정하여 올리라 한 것이었다.

"신 등이 품의하건대 대행대왕의 묘호로는 광종(光宗), 열종(烈宗), 고종(高宗)이 합당할듯 하옵니다. 모쪼록 자전께서 택하여 주소서."

무엇 하나 명군의 몫이 아닌 묘호가 없었다.

비록 대행왕 치세 4년에 불과하다 하나 오랑캐에게 망할줄 알았던 나라를 부흥하여 성세를 떨친 공이 컸기 때문이다.

그때 문리에 밝은 인평대군이 나서서 말했다.

"열(烈)이라는 묘호는 인조대왕께서 훙서하셨을 때도 올라온 바 있으나, 남당(南唐)의 전례를 살펴보니 그 나라의 끝이 흉했던 까닭으로 쓰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광종은 명나라 태창황제(泰昌皇帝)가 이미 사용한 묘호이므로 대행왕께 바치는 것은 옳지 않나이다."

그럼 남은 묘호는 하나 뿐.

고종이다.

"고(高)는 기강을 만들고 표준을 세웠다(肇紀立極)는 뜻인데 이는 개조(開祖)의 업이니, 사기(史記)에서 한나라 태조를 두고 고조라 일컬은 것은 그 때문이오. 대행대왕의 성덕이 하늘을 덮었다 하나, 배움이 짧은 아녀자의 소견으로는 혹 털끝만치라도 태조의 묘호를 범하는 우가 아닐까 저어되는구려."

대비 강씨가 짐짓 걱정스레 말했다.

"신 등이 생각컨대 고종은 중흥한 임금에게 올리는 것입니다. 은나라 양왕(襄王)은 게으름과 편안함을 멀리하였고, 3년간 오랑캐를 토벌하여 왕업을 이루었으니 자못 대행대왕의 행적과 일치하는 바가 있습니다. 또 당 고종이 사해를 정벌한 것은 우리 전하께서 북벌하신 것과 같고, 송 고종이 강남에서 부흥한 바는 전하께서 남한(南漢)에서 사직을 물려받은 것과 비슷합니다.

이미 우리 왕실에 태조가 있고 다시 태종이 있었으니 하물며 고종이겠습니까. 마땅히 이 같은 상시(上諡)를 올리더라도 대행왕의 위망을 다 살피지 못할까 두려운 마음 뿐이오니 자전께서는 신들의 청을 가납하여 주소서."

대비 강씨가 인평대군이 말한 바를 알지 못할리는 없다.

그러나 구태여 이렇게 모르는 척 물어보아야 신하들이 대행왕의 공덕을 한 목소리로 드높일 것이고, 어린 주군에게도 자연 고개를 숙일 것이 아닌가.

"허면 대행왕의 묘호는 고종으로 결정토록 하겠소."

본래 후대의 조선왕 이명복에게 돌아갔어야할 묘호는 이렇게 역사에 없었던 군주, 이왕(李汪)의 몫이 되었다.

게다가 그것을 주도한 이는 바로 그의 직계 조상인 인평대군이었으니,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고종이라.'

대비는 열이라는 시가 불길하다 하여 반려했지만, 묘호의 불길함으로 따지자면 최소한 한국사에서는 고종을 따라갈 묘호가 없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이미 흔적없이 사라져버린 원래 역사의 일.

원래 고종이란 묘호 자체가 세종에 버금가는 명군에게 주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선 실로 이왕은 복에 넘치는 묘호를 받은 것이었다.

"비록 망극한 일을 당하였으나 국사는 한시라도 비워둘 수가 없사옵니다. 대비께서 정사를 청단(聽斷)하는 일은 도성의 신민들은 이미 알고 있지마는, 지방에서는 혹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 중앙과 지방에 유시(諭示)하소서."

"좋소."

대비가 말했다.

시아버지에 의해 세자빈에서 폐해져 비참한 죽음을 맞았을 그녀이나 지금은 중전을 거쳐 대비까지 올라왔다.

원래 역사에서의 행보만 보아도 여걸이라 할만한 이였으니 그녀는 거침이 없었다.

"대행왕께서 탁고(託孤)하신 바에 따르면 북벌을 도맡을 사람으로는 병조참판 겸 훈련대장 이자원만한 이가 없다고 하였소. 그를 병조판서에 제수코자 하는데 여러 신하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음."

신하들이 술렁였다.

대비의 아버지인 강석기가 우의정이자 고명대신인 판에 그 제부(弟夫)마저 병조판서에 오르다니.

저 문정왕후 시절 대비의 위세를 빌려 전횡하던 소윤이 떠오른다.

강석기는 양식있는 사람이고, 대비도 마찬가지였으니 대놓고 그런 말을 꺼내지 못하지만 말이다.

"신은 나이 어리고 지금도 일이 많으니 그런 대사를 감당할 수가 없나이다."

이자원이 나서서 사양했다.

그러나 그 말을 진심으로 믿는 이는 없었다.

"이미 병조참판은 수년 전에 남한산성을 구하고 오랑캐를 격멸하지 않았소. 선왕의 유조가 있는데다 훈련도감만 보더라도 대사를 맡을 이가 그대 밖에 없으니 명을 받드시오."

이자원은 대비가 선대왕의 유언까지 들먹이고 나서야 말했다.

"삼가 자전의 전교를 따르겠나이다."

신하들은 애써 납득했다.

어차피 선왕 시절에도 병조참판을 겸했던 이자원이니만큼, 병조판서로 승차하는 것이야 그럴 수 있었다.

비록 지방관도 거치지 않고 고관이 되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이를 간할 삼사도 무력화된지 오래가 아닌가.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비변사(備邊司)는 종래에 외침에 의해서만 모여 품의하는 곳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점차 의정부(議政府)를 대신하게 되었으니 사리로 보아 그럴 수는 없는 것이옵니다.

의정부는 대신들이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모든 정사를 규찰(揆察)하는 곳으로서 중요하기가 다른 관서와는 아주 다르니 비국을 의정부의 속사로 삼으면 삼았지 지금 같은 폐단은 고쳐야 함이 마땅하옵니다."

이자원의 청에 대비는 잠시 고민했다.

비변사의 폐단이 심화되는 것은 좀 더 후대의 일이요, 독자적인 기반을 갖춘 산림계 대신들이 비변사를 통해 왕권을 견제하던 것도 원래 역사의 현종, 효종대 일이다.

그러니 대비로서는 서둘러 이를 혁파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또한 국초에는 의정부가 정부(政府)로, 삼군부가 무부(武府)의 역할을 맡고 있었던 만큼 전례를 따라 삼군부를 재설치하고 비변사의 군무를 삼군부로 이관하는 것이 어떠하겠사옵니까?"

이자원의 말에 대비의 표정이 변했다.

나라의 군령·군정권을 비변사에서 분리해 삼군부에서 맡게 하자는 뜻이 아닌가.

어영대장 이완은 봉림대군의 사람.

비록 봉림대군이 도제조에서 물러났다고는 하나 대비로서는 어영청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봉림대군이란 사람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아들을 지키려는 어미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기에.

'병판은 주상의 이숙이니 믿을 수 있다.'

피로써 연결된 이자원 밑으로 군령을 일원화한다면 혹시 모를 변란을 철저히 억제할 수 있다.

"듣고보니 그 말이 맞소. 내 비록 병법을 모르는 아녀자이나 삼군이 한몸처럼 움직여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알고 있소. 삼군부(三軍府)를 부활시키고, 병판으로 하여금 그 제조를 겸하게 하여야겠는데 여러 신료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각 군영은 독자성이 강하다.

이자원이 병조참판에 오른 뒤에도 어영청이 그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삼군부가 재설치되면 군영의 대장들은 모두 삼군부의 유사당상으로 흡수되니, 이자원이 오군영 전체에 효과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자전의 전교를 받들겠나이다."

신하들은 그런 눈치를 읽었기에 차마 아무말하지 못했다.

지금의 정국은 마치 조금만 의심을 사도 목이 날아갈 수 있는 판.

"나이 서른에 병조판서 겸 삼군부제조 겸 훈련대장이라."

금천 강씨 세도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냐며 혀를 끌끌 차는 이들도 있었지만 속으로만 그리할 뿐, 감히 그것을 입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대비와 이해 관계가 일치한 덕에, 이자원이 나라의 병권을 모조리 움켜쥐었을 때.

청나라에서 조문사절이 도착했다.

< 승천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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