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육지정 >
개국 이래 쫓겨난 임금이 여럿 있었으되, 노산군 이홍위의 경우 연산군 이융(李?)이나 광해군 이혼(李琿)과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즉위하자마자 계유정난을 당하여 왕위를 빼앗겨 별다른 실정을 저지른 바 없고 그 비참한 죽음 때문에 죽은지 수백년이 넘도록 민초의 동정을 사고 있지 않은가.
"신이 그윽이 살피건대, 옛날 우리 세조 혜장 대왕은 하늘이 내신 성군(聖君)으로서 하청(河淸)의 운을 만나 화란(禍亂)을 평정하니, 천명(天命)과 인심이 돌아갔습니다. 노산군께서는 이를 보시고 요(堯) 임금이 순(舜) 임금에게 선위한 것을 본받아 별궁(別宮)으로 물러나 상왕(上王)이라고 일컬었으니 실로 요순 이래의 성인이라 할만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노산군의 왕호를 추복하여 주시옵소서."
"음."
신하들의 계청에 임금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이들이 노산군에 대한 동정심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닐터다.
그보다는 어린 세자의 정통성을 확고히 세워주고자 하는 일일터.
"전하, 이는 성급히 결정할 문제가 아니옵니다."
임금의 측근인 이조참판 박로가 말했다.
그는 원래 도승지를 지내다 청서 소수파였던 이식이 물러난 뒤 그 자리에 임명된 터였다.
"노산군은 보위를 감당할 그릇이 아니었으나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도 여러모로 구차한 일이 많아 강등당한 것이 아니옵니까. 우리 종사는 세조대왕으로부터 이어져오는 바인데 노산군을 추복함은 온당하지 못한 처사일 것입니다."
"닥쳐라!"
그때까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임금이 소리쳤다.
"노산군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 어찌 세조대왕의 정통을 해한단 말이냐?"
임금의 노성에 편전이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
그간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보필해온 박로에게 이처럼 일갈한 것은 실로 뜻하는 바가 명확했다.
물론 임금 또한 죽은지 수백년이 된 노산군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 따위로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복권시킴으로 인하여 세조가 저지른 것과 같은 일은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허나 지금 논할 일이 아니라는 말은 옳다. 대신들은 속히 이치를 따져보고 상신하도록 하라."
임금이 뒤늦게 헛기침을 하며 이리 이야기했지만 이미 어심을 깨달은 신료들은 감히 다른 주장을 내놓을 수 없었다.
자연스레 그들은 올릴 묘호와 시호를 논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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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꾀를 내시었소."
봉림대군이 접대용으로 내온 차를 입술에 적시며 말을 꺼냈다.
꽤나 불퉁한 말투다.
장현이 직접 이 집에 가져다놓은 차는 꽤나 고급이었지만 그는 정작 차맛을 제대로 감상할 계제가 아니었다.
아무말않고 있는 상대방에게 봉림대군이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할 때, 뎅- 하고 소리가 울려퍼졌다.
봉림대군은 화들짝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자명종이라 하는 기물이외다. 해시계니 물시계니 하는 물건과 달리 시간을 퍽 정확히 알려주지요."
쿠케박케르에게 받은 선물을 언급하는 이자원에게 봉림대군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나도 알고 있소. 남만승들을 통해 천리경 따위를 선물받기도 하고 종종 기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오."
자신을 우물 안 개구리로 보는줄 아냐는 듯 자존심을 세우는 봉림대군을 이자원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훑어보았다.
"남만승들과 자주 어울려 지내시나 보오이다."
"뭐, 그거야······."
형인 주상의 목숨을 살려주기도 했고, 또 남만사에 드린 치성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들을 얻기도 하였으니-최소한 부부인 장씨는 그리 믿었다-호감을 갖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또 그들은 승려인데도 화포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 어영청 차원에서 종종 초빙하기도 하는 것이다.
상당히 서양 사람과 문물에 익숙해진 봉림대군을 보며 이자원은 생각에 잠겼다.
"큼, 어쨌든 내 말은 혹 대장이 나와 주상 전하 사이를 갈라놓으려 꾀를 낸게 아니냐는 말이오."
"소관이 무엇을 하였기에."
"국구(國舅)를 추동하여 노산군을 복권시키자는 말을 꺼내게 한 것이 대장 아니오?"
"증좌는 있으신지요."
그러자 봉림대군의 말문이 막혔다.
본인이 담담하게 그리 물어보는데 심증만으로 물어본 그로서는 더 할말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짓을 꾸밀 사람이 훈련대장 말고 더 있소?"
"소관은 두분 대군께 살아날 길을 터준 것 뿐이오이다."
이자원은 차분하게 말했다.
원래 역사에서는 40년 쯤 뒤의 일이고, 또한 지금에서는 일어날지조차 모르는 일이지만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불안하던 숙종이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의 세 당숙을 모조리 쓸어내며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꼴을 보면 결코 과언이 아니리라.
"노산군을 복권하는 김에 대군께오서도 어영청 도제조 자리를 내어놓겠다 하십시오."
봉림대군은 얼굴을 굳혔다.
원래라면 여느 종친들처럼 정사에 관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한량처럼 지내며 일생을 보냈을 그다.
그러나 나라가 뿌리채 흔들리자 그의 자질을 눈여겨본 형님에 의해 어영청 도제조에 앉았다.
마치 전 훈국 중군 이현달처럼 어영청 내에서 비리를 벌이던 인간들을 쓸어내고, 그 자리에 전란에서 두각을 드러낸 이들을 앉혔다.
군비가 모자라면 군비를 마련하기 위해, 화약이 모자라면 화약을 마련하기 위해 바삐 뛰어다녔다. 그렇게 분골쇄신하는 와중에 일하는 재미를 알았다.
지난 수년간 이완과 힘을 합쳐 쏟아부은 노력에다 진강에서의 싸움에서 깨달은 바까지 취합하여 이제 훈국 못지 않은 부대를 만들려 하는 차가 아닌가.
"아무리 도제조가 관리와 감독만을 맡는다 하나, 지금 같은 시국에서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계심은 칼날 위에서 춤을 추는 것과 다름없지요. 대군께서도 알고 계실겝니다."
"······."
대군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가 아무리 조카의 자리를 노릴 마음이 없다고는 하나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나도 다 알고 있소."
봉림대군은 어렵사리 말했다.
그도 노산군 복권이 수면 위로 떠오른 이유는 얼굴 붉히지 말고 완곡히 종친을 견제하려는 신료들의 뜻임을 알았다.
임금이 당장 이 안건을 내치지 않은 것은 암묵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이고.
"아바마마를 해친 오랑캐들, 그자들의 생살을 씹어삼켜도 분이 풀리지 않소. 밤낮으로 어영청 일에 매달린 것은 그 복수에 일조를 하고 싶다는 뜻이었고."
인조를 죽인 것은 수어청 군사들이지만 이자원은 굳이 그 진상을 알려주진 않았다.
그것은 그 자리에 있던 몇명만이 알고 있는 진실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봉림대군은 뼈있는 말을 던졌다.
"허나 정 앞날이 걱정된다면, 종친 뿐 아니라 외척도 물러나야할 터인데, 대장은 욕심이 많구려."
이자원은 말없이 냉소(冷笑)로 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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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이만 도제조 직을 내어놓고자 하옵니다."
창경궁에 든 봉림대군이 그리 말하자 임금은 미안한 얼굴로 답했다.
"네가 어영청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 먼저 이리 나서주니 이 형이 몹시 고맙구나."
임금은 괜히 사직을 반려한다거나 하는 쇼를 벌이진 않았다.
이 사직의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는 판에, 동생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듯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하께서 신을 얼마나 총애하셨는지 알고 있사옵니다.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하오니 너무 심려치 마소서."
봉림대군도 임금의 애정을 느끼며 울컥했다.
임금은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국구가 노산군에게 왕호를 올리라 한 뜻은 알고 있다. 외척이 직접 종실을 치는 모양새가 되면 좋지 않으니 이런 방법을 쓴 것이겠지. 허나 너나 국구 모두 이 나라 조선의 충신들이 아니냐. 사감은 없을 것이다."
"······훈련대장도 그렇겠사옵니까?"
"이자원과 사이가 여전히 좋지 않은 것이냐."
임금이 한숨을 훅 쉬었다.
동생이 이자원을 내심 질투하고 있는 것은 임금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자신도 동갑인 이자원이 세운 공을 생각하면 가끔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거늘-물론 놀라 털어버리곤 하지만-같은 신하인 봉림대군으로선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봉림대군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능력은 신도 알고 있사옵니다. 훈국은 날로 발전을 하니 신도 필사적으로 따라잡으려 노력하고 있지요. 신이 단지 우려스러운 것은······."
그가 만약 도제조에서 물러난다면 과연 어영청이 훈련대장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자원은 병조참판을 겸하고 있다.
명분상으로도 어영청에 간섭하지 못할 바는 아니고, 게다가 세자의 이숙(姨叔, 이모부)이라는 위세까지 업고 있으니 어영대장 이완만으로 그의 입김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그간 어영청이 이자원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나름의 방식을 고수해온 것은 왕의 친동생이자 무품(無品)의 대군이 도제조로서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봉림대군은 차마 이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흡사 이자원에 대한 임금의 신뢰를, 그것을 질투하여 참소하는 것 같지 않은가.
임금은 그런 봉림대군을 보고 입을 열었다.
"아우야."
"······예, 형님."
임금이 잠저 시절처럼 그를 불렀으니 대군도 마찬가지로 답했다.
"이자원은 부나 권세를 탐하는 자가 아니다. 오로지 그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음이니."
봉림대군이 염려하는 것처럼 아마 병권을 쥐고 전횡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형(愚兄)의 목적은 그자와 일치하였기에, 그 등에 올라타 여기까지 왔다."
임금은 씁쓸하게 말했다.
돌이켜보면 실로 많은 것을 이루었다. 호란을 이겨내고, 가도를 토벌하고, 팔참을 취하고, 동해여진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아직 모자랐다.
이자원에게 기대어 더 많은 것을 이루고 싶었지만······ 아마 그것은 세자의 몫으로 맡겨두어야 하리라.
"이자원을 믿고 마지막까지 달릴 수 있게 놓아두어라. 그리한다면 그는 죽으라 하여도 스스로 칼을 물고 죽을 것이다."
임금이 말했다.
어린 세자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터이니, 가까운 종친인 봉림대군이라도 알아두었으면 하는 심정에서였다.
봉림대군은 묵묵히 임금의 말을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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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이 중지를 모아 논한 결과 노산군의 왕호를 추복함이 가하옵니다."
신하들의 말에 임금은 명령했다.
"허면 속히 노산군의 위호를 의논하여 올리도록 하라!"
임금의 추상 같은 명령에 황급히 모인 당상들이 묘호(廟號)를 올리기를 단종(端宗)이라 하니, 곧 예를 지키고 의를 잡는다는 뜻으로, 원래 역사에서 받은 것과 같았다.
또 시호는 상왕 시절 세조가 올렸던 존호인 공의온문(恭懿溫文) 넉자에 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을 더하여 올리니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일이 완료되었다.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은 어디서든 통하는 법이군.'
봉림대군은 어영청 도제조에서 물러났고, 단종 복권이 내포한 의미를 알게 된 이상 종친들은 함부로 나서지 못할 것이다.
임금의 건강이 악화될 때마다 정국의 위험 수위도 치솟는 상황에서, 변수를 성공적으로 제거한 셈이다.
남은 시간은 길지 않았다.
단종의 신위가 종묘에 모셔지고 난 직후, 임금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골육지정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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