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자 (3) >
세상이 끝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양부(養父)가 누명을 쓰고 형옥에 들어가고, 이내 죄상이 확정되어 능지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하인들은 죄다 가산과 집기를 챙겨 흩어지고, 식구들은 멍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 유일하게 정신을 부여잡은 그는 배가 불룩 부푼 양부의 첩을 잡아끌었다.
'서모(庶母), 이럴 때가 아니오! 태중에 아버님의 아이가 있지 않소, 어서 피하시오!'
금의위의 동료로부터 곧 들이닥칠 것이란 이야기를 전해들은 터라 마음이 급했다.
그러자 서모가 당황해 물었다.
'어, 어디로?'
그 물음에 그의 말문도 턱 막혔다.
어디로 가야하는가? 이미 칙명이 떨어진 이상 이 대명의 천하에서 도망갈 곳도 없을 터인데.
'어디든지 가시오. 그리고 아버님의 억울함이 풀리면 반드시 돌아오시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대문을 닫아걸고, 서모가 피할 때까지 버티기로 했다.
'역적을 잡아라!'
'한놈도 빠져나가게 두어선 안된다!'
명나라의 군대는 무너진지 오래였지만, 금의위만큼은 여전히 정강했다.
순식간에 태도가 돌변해 자신을 잡으러 온 동료들을 보며 그는 중얼거렸다.
'다 아는 얼굴들이로군.'
'순순히 오라를 받게.'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이 이리 한순간에 안면을 몰수할줄은 몰랐다.
그의 무예는 군계일학이었지만 채 숫자는 당해내지 못했다.
눈이 가려진 채 단단히 묶여 끌려간 그는 자신이 양부의 뒤를 따라 처형당하리라 생각했다.
명나라의 연좌제는 실로 엄혹하므로.
이미 가인(家人) 중 16세가 넘은 남자는 모조리 처형하고 나머지는 3천리 밖으로 유배보내라는 황명까지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체념한 채로 고개를 떨구고 있던 그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닿았다.
'역적의 아들이 금의위에 들어와있다니, 실로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닌가.'
안대가 풀렸다.
눈 앞에 서있는 남자는 금의위의 상관인 낙양성이었다.
그는 낙양성을 향해 외쳤다.
'아버님 같은 분이 감히 배신하실리가 없습니다. 무언가, 무언가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낙양성은 만면에 비웃음을 띄고 그를 내려다보며 말할 뿐이었다.
'안다.'
'예?'
'헌데 황상께서 그리 믿고 계시니 어찌하겠는가? 황상께서 명하시면 역적을 만들어서라도 바치는 수밖에 없다. 이 금의위는 그렇게 움직여온게야. 네놈도 알고 있지 않으냐?'
낙양성의 뻔뻔한 말에 그는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를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런 식으로 죽은 자가 양부가 처음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입을 다무는 길을 택했다.
'원래는 너 또한 죽여 없애야 하나, 그간 한솥밥을 먹은 정을 생각하여 나는 두가지 길을 제시할까 한다.'
낙양성이 말했다.
'첫째는 이곳에서 목없는 귀신이 되어 나가는 것.'
손가락이 하나 더 펴졌다.
'둘째는 상서의 아들이 아니라, 내가 부리는 그림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
대답을 위해 입을 열었을 때,
적비는 눈을 떴다.
옆에서는 어린 원문필이 새근새근 잠들어있었다.
"나오시오."
도성에 돌아오자마자 적비는 훈련도감의 심처(深處)에 끌려가 갇혔다.
원문필을 즉각 죽여 없애라는 명을 거절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남의 눈이 닿지 않게 하기 위해 박철균이 직접 나서서 그들을 처넣었다.
원래 적비를 꺼려하던 박철균이었으니 태도가 고울리가 없었다.
"대장 영감."
이자원의 앞에 대령한 적비가 무릎을 꿇었다.
"이상하군."
이자원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을 시켜도 해낼 수 있는 사내라 믿었거늘, 무엇 때문에 내키지 않았던 것이냐?"
"소인은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째서냐?"
적비는 그 악명높은 금의위 출신. 수도 없이 더러운 일을 해보았을 터였다.
이제 와서 아이를 죽이는데 거리낌이 생겨났다느니하는, 감상적인 대답은 나오리라 믿지 않았다.
이자원은 그렇기에 적비에게 싸늘한 눈길을 던졌다.
"다른 일은 모두 하겠나이다. 그러나 그 아이만은 살려주십시오."
적비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이자원이 냉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정을 고하지 않고 살려달라고만 하면 되겠는가."
"······."
"적비."
이자원이 말했다.
"너는 누구냐."
"소인은······."
적비의 목이 메었다.
간자는 결코 진실한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된다.
금의위에서 귀에 피가 나도록 들은 바였고, 스스로도 지키지 않은 적이 없었다.
허나 원문필을 살리려면 어쩔 수 없다.
눈 앞의 인간에겐 거짓을 말해보았자 통하지 않을 터이니.
"소인은 병부상서 원숭환 대인의 양자 원조기(袁兆基)라 하오이다."
그 말에 이자원이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던만큼 이자원은 재차 물었다.
"사실이냐?"
"무엇하러 거짓을 고하오리까. 소인은 부친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금의위에서 도지휘사가 시키는 일을 맡아하다, 그의 명에 따라 장군을 따라나선 것이오이다."
"지독한 우연, 아니 인연이군."
적비가 은혜 운운한 것이 이해는 갔다.
청 태종의 반간계가 숭정제의 의심병을 자극하여 원숭환을 숙청하는데 이르게 했으니, 홍타이지를 죽인 이자원이 은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자원이 말했다.
"너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황조(皇朝)를 저버린 셈이로구나."
"저버린 것은······."
"감시해야할 오랑캐에게 정체를 모조리 털어놓았으니 황조를 저버린 것이 아니면 무어냐."
적비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이자원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조정의 간신들이 아버님을 죽였지만 소인은 끝까지 충성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동생을 살리고자 그간 바친 충절을 헛되게 하였으니 비통할 뿐입니다. 죽여주십시오."
"널 죽여보았자 명나라의 목없는 충신만 늘어날 뿐, 내게는 아무런 이득도 없다."
이자원은 감흥없는 표정으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다만 살아있는 네게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많을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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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적비는 늘어져 자고 있는 원문필을 걷어차서 깨웠다.
"윽! 가, 감히 원 상서 대인의 아들인 나를!"
"닥쳐라, 간자."
적비가 차갑게 말하자 원문필의 눈이 커졌다.
"글쎄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몇번을 얘기해야······."
"살고 싶으면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대로 해라. 우선 옷부터 갈아입도록."
예친왕은 애초에 버림패로 원문필을 보냈을 것이다.
아직 머리가 덜 여문 동생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듯 하지만.
적비는 새 옷을 원문필에게 던져주고 그를 바깥으로 끌어냈다.
"저 두 놈을 그대로 놔두어도 괜찮겠사오이까."
티격태격하는 형제를 보며 박철균이 이자원에게 물었다.
"동생의 목숨을 내가 쥐고 있으니 형 쪽은 꼼짝도 못할 것이다."
적비는 그간 숭정제의 눈이나 다름없었으니, 그에게 숨겨야할 일은 많았다.
그러나 원문필이 적비의 약점임을 안 이상 그런 걱정은 놓아두어도 될 터였다.
"역으로 명나라의 내밀한 사정을 알 수 있겠지. 원문필도 마찬가지다."
'반간(反間)은 쓸모가 있지.'
역정보를 흘릴 수 있는 경로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도르곤도 바보가 아니니 원문필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는 일단 의심하고 보겠지만, 그거야 믿게 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형은 명의 간자, 동생은 청의 간자라.'
이자원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맺혔다.
죽은 원숭환은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든 상황일 것이다.
"역시 대장 영감의 헤아림은 소관이 따라갈 수가 없사오이다."
박철균이 감탄하며 말했다.
그러더니 일순간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자원은 그 까닭을 알고 있었다.
"너에게는 선택지가 없었을 뿐이다."
이자원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나 또한 그러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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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의정 강석기의 집.
임금의 병세는 더욱 중해졌다.
"전하의 병중은 어혈(瘀血)이 뭉쳐 적취(積聚)가 생긴 까닭이라 하매 정기를 보하여 덩어리를 없애는 방향으로 약을 쓰고 있다 하더군."
강석기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공적으로는 모시는 임금이요, 사사로이는 둘째 사위가 아닌가.
임금의 병환이 더할수록 이 집안의 분위기도 어두웠다.
강석기의 다섯 아들들은 아직 관직이 낮았고, 큰사위 정태제는 지방에 나가있다.
이런 일을 의논할 상대는 막내 사위인 이자원 뿐이었다.
한의학에는 따로 조예가 없는 이자원이기에 어혈이나 적취 등의 용어는 잘 알지 못했지만 덩어리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전하께서 따로이 장인께 내린 말씀은 없으신지요."
이자원의 물음에 강석기가 말했다.
"우리 삼정승이 충심으로 종사를 보필하고 있으니 걱정은 덜었다 하시었고, 또······."
잠시 뜸들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회은군의 동태에 대해 물어보셨네."
회은군 이덕인은 성종의 고손이다.
현 왕계(王係)와는 거리가 멀지만, 제법 인망이 있어 폐주 시절 반정을 모의할 때 잠시나마 이름이 임금 후보군에 올라가있었으며, 원래 역사에서는 심기원이 그를 옹립하려 했다하여 사사당한 인물이다.
"선대왕 시절부터 종친들이 여러 차례 역모에 엮이었으니 성려(聖慮)가 크신 바, 회은군을 주의해야한다 생각하시는 것 같더군."
임금의 불안은 이해한다.
비록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임금이었지만 자신이 죽고 난 뒤는 또 다른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이자원은 차분히 장인에게 대답했다.
"따지자면 회은군보다는 두 대군이 더 위험하지요."
병권에 간여할 수 있는 위치인 봉림대군과 덕망 높은 인평대군.
두 사람을 거론하는 이자원에게 강석기가 황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어허!"
강석기는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자네의 말은 이해가 가네만 전하께서 두 형제분을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하시니 나도 그런 흉사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네."
"하오나 어심은 어심이고, 현실은 현실이지요."
이자원의 말에 강석기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분 대군의 덕망은 익히 알려져 있으나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마음속은 모르는 법. 하지만 이런 시국에 괜히 외척이 종친을 헐뜯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으니······. 어찌해야 좋겠는가?"
강석기가 물었다.
세조가 제 조카에게 저지른 것과 같은, 그런 흉참한 일은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
비단 자신의 외손자라서가 아니라, 한 명의 신하로서 세자가 무사히 계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자원은 무슨 꿍꿍이인지 모를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장인께서 뜻하시는 바가 오로지 두 대군을 견제하는데만 있다면, 종친들에게 직접 화살을 날릴 필요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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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를 비롯한 청서 일파가 주도한 논의는 최근 평온하던 조정을 뒤흔들었다.
"신 등이 생각컨대 국조 이래 여러 임금이 있었지만, 노산군(魯山君)의 일만큼은 대체로 시골의 아낙네와 아이들마저 슬퍼하는 바이옵니다. 전대의 제왕(帝王)은 비록 선위한 이성(異姓)의 임금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 위호(位號)를 추후하여 깎아내린 일이 없으며, 명나라에서도 성화(成化) 연간에 경태제(景泰帝)에게 시호를 올렸으니 옛 임금을 받드는 도리가 이와 같사옵니다."
"전하, 본시 임금의 적자에게는 대군(大君), 공주(公主)라 일컫는 법이온데 노산군은 문종대왕의 적자로 보위에까지 올랐으나 세조대왕 이래로 지닌 바 군호 뿐이니 몹시 원통하옵니다. 모쪼록 복권하여 묘호와 시호를 올리소서."
청서가 이렇게 나서자 신경진을 위시한 공서 일파는 급작스런 논의에 당황했다.
"전하, 이 일은 성조(聖祖)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가볍게 의논할 수가 없지 않겠사옵니까. 모쪼록 통촉하여 주소서."
원래 당파간 견해의 차이는 있으되 근왕이라는 공통된 인식 덕에 양당은 딱히 이전처럼 격렬한 입씨름을 벌인 적은 없었다.
실무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상당히 협치가 잘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러나 노산군의 복권에 관한 문제는 사전에 귀띔도 없었던데다 딱히 국사에 관련된 문제도 아니었기에, 공서는 당연히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임금의 반응은 달랐다.
노산군을 복권하라는 청이 나오자 당황하던 그는 금방 강석기의 의도를 알아챘다.
곧 임금의 입꼬리가 보이지 않게 올라갔다.
< 간자 (3)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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