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자 (2) >
임금의 용태가 좋지 않다.
그것을 확인한 이자원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 해도 당장 손쓸 수 있는 일은 없다.'
학질처럼 키니네로 치료할 수 있는 병이 아니었으니 임금의 명을 늘릴 방법도 없었고.
임금이 몇년만 더 버텨준다면 되겠으나, 과연 그것이 가능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앞으로 한걸음이다······.'
대업이 실로 손에 잡힐 듯 하거늘, 이대로 임금이 떠난다면.
이자원은 냉철히 현재의 판도를 떠올려보았다.
"영의정 최명길, 좌의정 신경진, 우의정 강석기."
수년간 이 인선은 바뀌지 않았다.
임금은 자신이 깊은 신뢰를 보내는 소수의 측근들을 중용했고, 능력까지 갖춘 그들을 함부로 교체하지 않았다.
공서든 청서든 왕당파가 독주하는 현재의 조정인데다 삼사의 발언권마저 크게 약화되었으니 반발은 적었다.
저 세 사람은 이자원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
'이들이 있는 이상 조정 내부는 걱정없다.'
그리고 세자가 즉위할 경우 수렴을 맡게 될 중전.
이자원에게는 처형(妻兄)되는 이였으니 역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남은 것은 종실 식구들 뿐이다.
그 중에서 어린 군주가 즉위했을 때 나설 수 있는 가까운 종실들.
'종실 식구 가운데 모해(謀害)를 끼칠 기미를 보이는 자는 없사오이다.'
적비가 말했다.
인평대군은 학식과 예술에 밝으나 은연자중하는 이이니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이 이자원을 공박하는데 가담하긴 했지만 실지로는 이자원을 치려하는 두 송씨에게 이름만 빌려준 것 뿐이다. 지금은 호란 때 얻은 심병을 다스리느라 요양 중이었으니 다시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진 못하리라.
"한 사람 있지 않은가."
"봉림대군 말씀이시오이까."
봉림대군 이호.
어영청의 도제조를 맡고 있는 자.
물론 관리감독만을 맡은 도제조이기에 실질적인 지휘권은 어영대장 이완에게 있었으나 이완도 봉림의 측근이 아닌가.
군권에 밀접한 왕자는 가장 큰 위협이다.
게다가 그와 대군의 사이는 참 미묘했다.
봉림대군은 이자원을 견제하는 일에 한 발을 걸치기도 했지만, 임금에게 키니네를 처방하는 일에는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한편 전쟁터에 다녀온 후에는 순순히 훈련도감의 도움을 받아 어영청을 개조하는 중이었으니 일종의 선의의 경쟁 관계로 정착이 되어가고 있는 셈이지만, 만약 상황이 일변한다면.
'과연 나와 손잡을 수 있을까.'
이자원은 생각했다.
"다만 내명부 쪽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나이다."
"당연하다."
적비가 제아무리 금의위 출신에다, 훈련도감의 자원을 활용해 눈과 귀를 풀어 놓았다 해도 은밀한 궁중에까지 촉수를 뻗칠 수는 없었다.
그쪽이야 정사나 군사에 관여할 수 있는 루트도 없으니 일단은 신경쓰지 않아도 좋았다.
'문제는.'
이자원의 신원이 밝혀질 경우 위에서 열거한 모든 상황이 뒤집힌다.
중전이든, 삼정승이든, 누구든 간에 어린 세자를 끼고 있는 자는 반드시 이자원을 제거하려 들 것이다.
'조금 더, 확실히 해두어야하나.'
이자원은 우선은 여기서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그러다 적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심기원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왔더군."
한창 가도를 통해 조선으로 오고 있는 원문필에 관한 이야기였다.
"······소인에게 그 말씀을 하시는 연유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손자가 이르기를, 간자의 종류에는 향간(鄕間), 내간(內間), 반간(反間), 사간(死間), 생간(生間)이 있다고 했지."
향간은 적 고을의 백성을 활용하는 것이요, 내간은 적국의 관리를 포섭하는 것이며 반간은 적의 간자를 내 간자로 삼는 것, 사간은 고의로 역정보를 퍼뜨리는 것, 생간은 적국에서 살아돌아와 보고하는 것이다.
"원문필은 어디에 해당할 것 같은가?"
"그가 간자라는 말씀이시오이까?"
이자원은 원문필에 대한 보고를 들었을 때부터 그리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원문필의 뒤에서 일렁이는 도르곤의 그림자를 느꼈다.
적비에게서 의심에 사로잡힌 숭정제의 눈빛을 느끼는 것처럼.
"이것은 조선과 명을 분열시키려는 술책이다."
조선에서는 원숭환에 대한 동정론이 강하다.
지난날 춘신사(春信使) 박난영(朴蘭英)이 심양에 갔을 때 후금이 용골대 등을 시켜 ‘원공(袁公)이 우리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일이 누설되어 체포당했다' 운운하며 반간계를 시도하다 간파당한 적도 있지 않은가.
그런 상황이었으니 조선에서는 그가 뒤집어 쓴 것이 누명임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명은 여전히 원숭환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상황.
원문필 하나로 외통수를 건 것이나 다름없다.
"그를 죽여라."
이자원의 말에 적비가 몸을 움찔했다.
아주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것을 놓칠 이자원이 아니었다.
'의외의 반응이군.'
그러나 적비는 언제 그랬냐는듯 어느새 본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와있었다.
"그 아이는 함정이다."
도르곤이 판 것이 분명한 함정.
그 자가 도성 내에 들어서는 순간 귀찮은 일이 발생하리라.
결과가 어찌 나오든 상관없이, 자중지란이 일어나는 것은 이자원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대장 영감께서는, 그가 원 상서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이오이까."
적비가 일부러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착각일까.
"진짜인지 아닌지는 관심없다."
가짜로 몰아 죽여버려도 진짜라 믿는 자는 나올 것이고, 최소한 금주 장병들이 동요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이자원의 명령에 적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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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전하께서 여색에 실덕(失德)하지 않으심은 실로 군자의 풍모이십니다. 하오나 그 탓에 영춘헌·집복헌 등이 비어 선왕의 후궁들이 여전히 거하고 있사온데, 이는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이옵니다. 모쪼록 출궁을 명하소서."
"이미 내가 즉위할 적에 대개는 사가(私家)로 돌려보냈고 어린 자식을 기르는 이만 조금 남아있을 뿐이니 논할 바가 못된다. 새로이 궁궐 밖에 후궁가를 중수하여 폐단을 끼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임금은 부쩍 피곤한 기색으로 말했다.
왕이 죽으면 후궁들은 출가한 아들딸의 집에서 지내거나, 자식이 없는 이들은 친정이나 자수궁, 인수궁 같은 후궁가로 가게 된다.
임진왜란의 와중 후궁가는 크게 훼손되었으니 별다른 수리도 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본래 이런 후궁가가 완전히 혁파되는 것은 현종대의 일이나, 지금도 실질적으로 쓰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른 곳에 쓸 돈도 모자란 판이니 임금에게 후궁가를 수리하자 간하는 신하는 나오지 않았다.
돈 핑계를 대긴 했으나 임금은 다른 목적도 있었다.
'아바마마의 후궁들이라도 중전의 말동무를 해주면 오죽 좋겠는가.'
가끔씩 입궐하는 여동생을 빼놓고는 담소를 즐길 상대도 부족할 터이다. 자신의 몸도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중전이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임금이었다.
이렇게 이 안건을 넘긴 임금은 다음 사안으로 넘어갔다.
"천조 병부상서 원숭환은 옛날 악충무(岳忠武, 악비) 같은 명장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으되 아조에서도 여전히 흠모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헌데 그 자식이라 칭하는 자가 한창 도성으로 오고 있다 하오니 어찌 처결하오리까."
"원숭환의 자식이 청나라에 의탁해 이날 이때까지 살아온 것은 실로 믿기 힘든 일이다. 허나 사실이라면 인정으로 돌봐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임금이 묻자 신하들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 영의정 최명길이 나서서 말했다.
"하오나 대국에서 이를 추궁하고 든다면 어찌하겠나이까. 함부로 원문필을 받아들인다면 곧 역적의 자손을 사사로이 보호하는 것이 되지 않겠사옵니까."
원숭환이 희대의 명장이었다 하나 이미 목없는 귀신이 된지 오래다.
살아있는 권력인 숭정제와 괜히 틈을 벌리느니 여기에서 깔끔하게 내치고 넘어감이 마땅했다.
그러나 봉림대군은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어찌 영상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시오? 옛날 한신(韓信)도 종리매(鍾離昧)를 가엾게 여겨 거두었거늘 원숭환 같은 명장의 아들을 내쳐야 하겠소?"
"옛날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할 때에 한신은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는 공이 있었으나, 끝내는 머리가 소금에 절임을 당하였습니다. 예로부터 군신 사이에 털끝만큼이라도 불충한 단서가 있으면, 공(功)으로써 죄를 덮을 수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한신도 종리매를 받은 끝에 화를 당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감상적인 티를 벗지 못한데다 숭무(崇武)하는 기질이 있는 대군이었지만 최명길이 그렇게 차분히 반박하자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병조참판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임금이 물었다.
"기실 심기원이 고한 바에 따르면 가도 총병인 그대에게 처결을 맡긴 셈이 아닌가."
가도가 조선의 일부처럼 움직이고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직제상으로는 이자원을 수장으로 한 명나라의 군진일 뿐이다.
따지고보면 가도군에게 의탁한 사람을 조선 조정에서 논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언젠가부턴 조선이 가도를 좌지우지하고 있었기에 임금이 말하기 전까진 이를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진상을 알아낸 후 처결하겠나이다."
이자원은 그리 대답할 뿐이었다.
원문필이 조선땅에 발을 딛기도 전에 죽으리라 확신하면서.
===
벽란도.
본래 가도에서 조선으로 향할 때는 주로 평안도의 석다산에 입항했지만, 조선이 가도를 흡수한 뒤에는 해로에 밝은 이들을 대거 얻게 되면서 아예 배를 타고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그 덕에 비용은 말할 것도 없고 시간도 훨씬 절약되었다.
때문에 가도에서 출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원문필은 벽란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여기가, 조선······."
양팔이 꽁꽁 묶인 채 벽란도의 항만시설을 신기하게 둘러보던 원문필은 마중나온 누군가를 발견했다.
"총병 대인의 명으로 포로를 압송하러 온 적비라 하오. 호송하러 온 분들은 이만 인계하고 돌아가시면 되겠소."
적비가 이자원의 수결이 적힌 문서를 꺼내자 병사들은 귀찮은 일에서 해방되어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아이를 넘겨주었다.
번성하는 벽란도에 왔으니 회포나 풀고 돌아가려는 속셈이리라.
적비는 말없이 원문필을 데리고 걸었다.
이자원의 명대로라면 문답무용으로 죽여서 파묻어야 한다.
그러나 적비는 대신 입을 열어 물었다.
"원 대인의 아들이라 주장한다 들었다. 너의 신분을 증명할 것이 있느냐?"
"아버님께서 남기신 소도(小刀)가 있습니다."
금주에서 잡혔을 때도 여러 병사들에게 보여주었던 소도를 들이밀며 원문필이 말했다. 적비가 살펴보니 과연 명의 고관이나 쓸 법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것 쯤은 청에서도 만들어내고자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너는 변발까지 했으니 실상 한인이 아니라 여진족인줄은 어떻게 알겠느냐?"
적비의 말에 원문필이 발끈해서 대답했다.
"내 어머니는 원 상서 대인의 측실로 성은 호씨라 하고, 명나라 경사 출신이시오. 나를 아버님과 무척 닮았다 하셨으니 이 또한 증좌가 될 것이오."
"그래?"
적비는 그 말에 굳이 부정하지 않고 원문필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 보았다.
"그럼 무엇하러 금주군에 투항하였느냐?"
"무도한 오랑캐 밑에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들고 두려워 기회를 엿보아 도망쳤소."
적비는 대답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그의 멱살을 잡아 바닥에 패대기쳤다.
열두살 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였으니 쌀가마니를 드는 것보다 쉽게 적비의 손에 휘둘렸다.
"눈이 흔들리는구나. 오랑캐들은 거짓을 감추는 법도 가르쳐주지 않더냐?"
"······나를 죽일 셈이오?"
원문필의 물음에 적비는 입을 다물었다.
이자원의 말이 맞았다. 이 아이는 도르곤이 파놓은 함정이다.
자신보다 훨씬 어리고 미숙하지만, 이미 한 사람의 간자인 것이다.
아마 구왕(九王) 도르곤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치기로 약조하였으리라.
'사사로움을 끊어내야 한다. 나는 오로지 봉공 두 자를 마음에 써서 품고 다닌다.'
'아버님.'
그 순간 아버지의 말이 귓가에 스쳤다.
적비는 이를 악물고 칼을 꺼냈다.
원문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 간자 (2)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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