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자 (1) >
심양궁 숭정전.
"거이커르의 소소쿠가 조선과 결탁하여 동만주를 통째로 넘겼다고 한다. 소소쿠는 우리 황실의 부마거늘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강덕제 쇼서가 신하들에게 물었다.
"······."
한의 하문에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청이 동해여진에 가하던 공납 등으로 인해, 즉 부덕한 정치 때문에 그 영향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더란 이야기를 어찌 하겠는가.
소소쿠가 비록 청의 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하나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군기대신은 도대체 무얼 했기에.'
쇼서의 마음속엔 불만이 가득찼지만 함부로 이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도르곤은 진강에서 패전하자마자 묵던으로 바로 귀환했다. 채 조정에서 눈치챌 새도 없이 저지른 빠른 회군이었다.
연산관에서 저지하는 것은 고사하고 심양 내의 도도마저 성문을 열어젖혀 형을 맞아들이니 순식간에 심양은 도르곤의 손에 떨어졌다.
이젠 정쟁으로 해결할 생각도 않고 아예 무력으로 전권을 쥔 도르곤은 제일 먼저 범문정과 범문채 형제를 삭탈하고 유폐시켰다.
쇼서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한편 도르곤이라고 마음이 편할리가 없었다.
"닝구타가 조선군의 손에 넘어갔다고?"
도르곤은 밑으로부터 올라온 장계를 내팽겨쳤다.
아민이 골골거리는 것이야 진작에 알고 있었으니 그 밑의 바트마와 족장 몇만 포섭해둔다면 다시 동만주를 되찾는 것이야 어렵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아민이 죽고 나면 그 뒤를 이을 자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도르곤이 진강의 패전을 수습할 틈도 없이 조선군이 닝구타를 장악해버렸다.
"호거······."
도르곤이 이를 갈며 외쳤다.
따지고보면 호거가 쳐놓은 사고가 아닌가. 그가 제 아비가 숙청한 아민을 놓아주었을 때,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선수를 쳐서 범문정을 실각시키고 완전히 심양을 틀어쥔 것만 해도 중외에서 나오는 말이 많았다.
아민이 살아있을 적엔 겉으로나마 청의 영토였으나, 이젠 완전히 조선땅이 되어버렸으니 도르곤에 대한 시선이 어찌되겠는가.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바로 군사를 내어 징벌해야한다."
도르곤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조차 성공 여부를 확신할 수 없었다.
'묵던에서 닝구타까지 천리가 넘는다. 조선군이 닝구타를 지키고, 소소쿠 같은 반역자 야인놈들이 그것을 도울텐데 대군을 움직이지 않고서야 가능할까.'
도르곤은 동복형 아지거를 흘긋 바라보며 말했다.
"도로이 바루르 군왕께서 이번에도 수고를 해주셔야겠소."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대왕."
이미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진 청 조정이다.
다른 종친들도 믿을 수 없고, 한족 대신들도 믿을 수 없다면 믿을 사람은 자신의 동복형제 밖에 없었다.
"예친왕(豫親王)."
"예, 대왕."
조선말로는 도르곤이나 도도나 같은 예친왕이지만 한자가 다르다.
동생인 도도를 부른 도르곤은 이내 말했다.
"너희 정백기에 있는 그 아이를 불러오너라."
도도는 형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금방 알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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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아비가 없었다.
회임한 몸으로 먼 길을 달려 도망온 소년의 어미는, 몇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소년은 곧 고아가 되었다.
예로부터 고아가 먹고 살기 위해선 군문에 드는 것이 최선이다.
소년은 그래서 한 정백기인(正白旗人)의 쿠툴러, 노예병이 되었다.
노예병이라고는 하나 열살도 되지 않은 그가 직접 창칼을 들고 싸움터에 나갈 수는 없다. 만주인이라면 어릴 때부터 활을 쏘고 싸우는데 익숙하겠지만 그는 한인(漢人)이었으니, 말을 관리하고 물긷고 밥짓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소년은 자신이 '그' 군기대신 예친왕 도르곤의 관심을 받고 있을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청의 최고 권력자나 다름없는 도르곤의 앞에 느닷없이 불려온 소년은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처, 천인(賤人)이 예친왕 전하를 뵙습니다."
"천인이라. 대명(大明) 병부상서 원숭환 대인의 유일한 친자가 천인이라면 세상에 존귀한 자가 누가 있으랴."
도르곤의 말에 소년은 얼굴을 바닥에 갖다대고 부들부들 떨었다.
"소인이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그러나 도르곤은 그런 그를 재밌다는 듯이 내려볼 뿐이었다.
"원문필(袁文弼)이라 했던가."
"그렇습니다, 대왕."
흠, 하고 턱을 쓰다듬은 도르곤은 원문필을 바라보며 말했다.
"원 상서는 비록 적이었지만 칭송을 받아 마땅한 명장이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한조(漢朝)의 황제가 실로 참혹히도 그의 목숨을 없이 하였으니, 너희 집안의 모든 영락(零落)이 거기서 비롯된 것이다."
원문필은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랐기 때문에 그런 사정은 익히 알고 있었다.
다시 그것을 일깨워준 도르곤은 이어서 물었다.
"정식 기인(旗人)이 되고 싶지는 않은가?"
원문필은 당황한듯 눈동자가 떨렸다.
기인이 된다는 것은 노예에서 정식으로 대청의 신민, 그것도 만주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인들로 구성된 우전 초하마저 팔기가 아니라 녹영으로 편성된 판이 아닌가.
기인이 되는 것은 그가 지금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임이 분명했다.
"소인이 무엇을 하면 되겠나이까?"
원문필이 묻자 도르곤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일러주었다.
원문필이 물러나자 아지거가 물었다.
"저 아이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겨우 열두 살 난 아이가 아닙니까."
"그러니 어찌되든 좋지 않은가."
어차피 손에 쥐고 있어보았자 어린 쿠툴러 하나에 불과한 녀석이다.
조금이라도 적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면 족하다.
"한인들이나 조선인들은 충신과 명장을 숭상한단 말이지."
반역자로 규정되었으나 그것이 누명임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원숭환의 아들.
실로 갑론을박이 심할 것이다.
"이자원, 네놈만 반간계를 쓸줄 아는가."
도르곤은 남쪽을 노려보며 뇌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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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미쳤다.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가뭄이 연거푸 이 시기의 중원을 휩쓸었다.
숭정 12년(1639년)에는 백 년에 한번 있는 대기근이,
숭정 14년에는 사백 년에 한번 있는 대기근이,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숭정 13년에는 천팔백 년에 한번 있는 대기근이 덮쳤다.
중원은 신음하고 있었다.
농사를 지어도 소용이 없으니 농민은 유랑하는 빈민이 되었고, 빈민은 도적이 되었고, 도적은 다시 반란군이 되었다.
"하늘이 명조를 망하게 하려는 것은 분명한데."
재이가 끊임이 없으니 백대의 성군이 나온들 손쓸 도리가 없을 터였다.
하물며 저 홍치제 이후로 줄줄이 임금 같지 않은 임금만 나온 이 명나라라면 그 목숨은 결코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틈왕(闖王, 이자성) 정도라면 가능성이 있어보였으되, 끝내 잡혀 죽었으니 그에겐 천명이 없었다는 뜻일게고."
장헌충 같은 자는 성격이 포악하여 사람 죽이기를 즐기니 몸담을 바가 되지 않았고, 정지룡은 일개 수적에 불과하니 천하를 호령하기보다는 도적질한 돈을 지키는데 관심이 많아 보였다.
"허면 저 오랑캐들이 중원을 차지할 것인가?"
그러나 한때 산해관 너머에서 금방이라도 중원을 삼킬 것 같던 저들도 조선에서 세가 꺾였다.
"조선이라."
마치 두더지 부부의 사위 찾기처럼 물고 물리는 관계의 끝에는 조선이 서있었다.
"옛 기자의 땅에는 이 한 몸 재주를 중히 써줄 사람이 있을런고."
한 고조에게는 자방(子房, 장량), 명 태조에게는 백온(伯溫, 유기).
스스로 그 둘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자부하는 사내, 이암(李岩)은 그렇게 조선으로 떠났다.
그러나 하남 기현의 한 선비가 몸을 펼칠 곳을 찾고자 조선으로 떠난 것은, 당금 중원에서는 사소하디 사소한 사건에 불과했다.
천신만고 끝에 대동을 되찾은 조대수였지만, 그는 임지인 금주로 돌아가지 못했다. 반란부터 진압하라는 황명 때문이었다.
어디 지역의 반란을 누르라는 말도 아니었다. 중원 전역에서 도적떼가 횡행하니 조정에서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몰랐다.
다분히 이자원의 의도대로였지만 이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넋이 나간 이도 있었다.
"빌어먹을."
심기원이 중얼거렸다.
조대수가 기약없는 반란진압을 위해 떠나버린 까닭에 자신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금주의 방비를 수행해야만 했다.
"차라리 가도가 그립구나."
그때는 도성에서는 떨어져 있지만 치부(致富)하기는 참으로 좋았다.
게다가 군사도 오삼계가 알아서 관장하는 지라 싸우다 죽을 염려 하나 없었으니 안심이었지만 금주는 어림없었다.
그러나 심기원의 고난은 예서 끝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도 아무일없이 넘기기만을 빌던 심기원의 바람과 반대로, 금주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대명(大明) 병부상서 원숭환 장군의 유복자인 문필(文弼)이오! 틈을 봐 오랑캐들 손아귀에서 벗어난고로 다시 대명에 귀순하려 하니 나의 망명을 받아주시오!"
"뭣이?"
뜬금없이 10여 년전 죽은 원숭환의 아들이, 심지어 청나라 쪽에서 튀어나오다니.
"필경 거짓부렁이 아니겠습니까. 반드시 목을 베어야 합니다. 아니, 진실이라 하더라도 역적의 자손이 아닙니까?"
심기원 휘하의 가도군은 대부분 문답무용으로 목을 베라 주장했다.
원숭환의 아들은 곧 모문룡의 원수요, 가도군 또한 그에게 좋은 기억이 없었다.
비록 이자원이 옥석을 가려내고 오삼계가 부지런히 조련했다 하지만 주축을 이루는 것은 기존의 가도군이 아닌가.
"무슨 소리!"
그러나 금주에 남아있던 일부 조대수 휘하의 병력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원 상서가 비록 역적의 오명을 쓰고 돌아가셨다 하나 진위를 가려보지도 않고 목을 베라하다니? 조 총독께서 계속 남아계셨다면 결코 그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조대수는 원숭환의 막하에 있으며 그와 가까웠다.
휘하 장졸들 또한 원숭환 생전 그를 깊이 존경했으니 사실 여부를 가리기도 전에 죽이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빌어먹을. 안그래도 사이나쁜 놈들을 조율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는데.'
그동안 아낌없이 베푼 사랑-주로 금품과 향응-이 무색하게, 다시 이 문제로 양쪽이 대립하는 꼴을 보자 심기원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문제는 나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원숭환의 죽음은 조선에서도 무척이나 안타깝게 생각하는 바였다.
그가 당한 것이 누명이란 사실은 조선에서 파다하게 퍼져있었으니 저 원숭환의 유복자라 는 소년을 죽인다면 세간의 비난을 피할 수 없으리라.
'젠장, 영영 조정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 붙박혀 살 수도 있지 않은가.'
심기원의 등에 땀이 축축하게 배였다.
저 말을 거짓으로 몰아 죽일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라도 들통난다면 그만한 오명이 없을 것이다.
"우, 우선 총병께 여쭈어야겠다."
심기원의 상관은 가도 총병 이자원이었으니 그에게 묻는 것이 순리라는 것이었다.
북경에 보고해보았자 죽이라는 황명 밖에 더 돌아오겠는가. 심기원은 황명이라 할지라도 제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싫었다.
"놈을 묶어 도성으로 보내라. 총병께서 알아서 처결하시지 않겠는가?"
심기원은 그렇게 떠넘기기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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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창경궁 바깥에서 대기하던 적비는 퇴궐하는 안세를 보자 그를 들추어 업었다.
"아저씨, 오늘은 소학을 배웠다?"
안세는 적비를 잘 따랐다.
아버지인 이자원은 무뚝뚝한데 반해, 적비는 항상 친절하게 대해주기 때문이었다.
물론 적비는 감시 대상의 일가와 친밀히 지내야 한다는 꿍꿍이를 품고 그리한 것이지만.
적비는 안세의 이런저런 이야기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서도 귀를 열고 출입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아무리 작고 은밀한 이야기라도 적비는 철저하게 듣고 기억해두었다.
금의위에서 배운 간자의 소양이었다.
개중 쓸만한 이야기를 건지지 못해 허탕치는 날이 허다했지만 적비는 항상 날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때 그의 귀에 누군가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글쎄,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명나라 병부상서의 아들이 가도에 왔다는구만."
"만약 진짜라 치면 우리 조정에선 어찌 할런가. 죽이기엔 의가 아니요, 죽이지 않는다면 역적의 자손을 보호하는 것일 터인데."
그 이야기를 듣던 적비의 눈이 흔들렸다.
< 간자 (1)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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