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림길 (4) >
아민은 평소 업무를 보던 널찍한 방에 걸터앉아 있었다.
몸상태를 보자면 누워있어야 했으나, 그는 죽을 땐 죽더라도 마지막까지 권력을 휘두르던 이곳에 있고 싶었다.
바깥에는 아민들을 따르던 족장들이 대기한 가운데 박철균이 조선군을 대신해 방에 들어왔다.
파리한 초로의 사내가 앉아있는 모양을 보고 박철균은 그가 아민임을 짐작했다.
"영고탑주(寧古塔主)를 뵙소이다."
나름 예의를 차린 모양새였지만 아민은 그런 것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영고탑주라는 호칭에 코웃음을 쳤다.
"이젠 너희가 이 닝구타를 통째로 들어먹을 터인데 무슨 놈의 영고탑주란 말이냐?"
바트마의 반란이 허무하리만치 진압된 것은 그간 닝구타에서 군림해온 아민의 덕이 컸다.
조선군이 시기 좋게 밖에서 공격해들어간 덕에 양람기가 무너져내린 것이 사실이지만, 실상 완전히 점령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민은 그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소소쿠가 나를 대신하기란 어려울 것이라.'
소소쿠는 변방 대족(大族)의 족장이라면 모르되, 조선과 청 틈에 껴서 한 세력을 거느리며 조율하기엔 모자란 인물이다. 본인도 그것을 아는지 감히 바라지 않았고 말이다.
"함경병마사 영감이 잠시 영고탑에 머무르며 민생을 위무할 것이고, 그 뒤에는 부윤이 부임하여 호적을 거두고 군현을 다스릴 것이외다. 훈춘, 야춘, 남강도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관리가 파견될 것이지요."
박철균이 설명했다.
나머지 영토와 부락들은 신속만 한다면 크게 간섭하지 않겠다 하나, 이쯤되면 동만주가 통째로 조선에 넘어간 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민 입장에서는 충격적이었을 법하련만, 그는 폭발하기는커녕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뒤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주인은 이런 결말을 다 예상하고 있었겠지?"
"훈련대장 영감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아마 그럴 것이오이다."
박철균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죽어가는 눈 앞의 사내에게 굳이 거짓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이자원이라면 이미 알고 있었을 공산이 크다 여겼다.
"그래, 네 주인은 이제 무엇을 할 생각이라더냐?"
단 한번 전장에서 맞부딪혔을 뿐이지만 아민의 인상에 이자원은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가 바라는 것, 그가 하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동팔참도, 이곳 북변 땅도 모두 조선의 손에 들어왔소이다. 이제 청에게는 요양과 심양, 그 주위를 둘러싼 요동 일부 밖에 없지요."
비록 만주에서 요심 지역이 핵심이긴 하나, 만주와 몽골 전역을 쥐고 있던 수년 전에 비하면 초라한 영락이다.
거기다 이번 싸움에서 청군을 야지(野地)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전훈까지 얻었으니.
"우리 조선은 드디어 북벌(北伐)을 할 것이외다."
"북벌이라, 무엇을 위해서?"
"당연히 복수설치(復讐雪恥)가 아니겠소."
지금까지 군대를 키우고 남만과 통교하며, 사방을 종횡무진한 것은 바로 이 넉 자를 위해서가 아닌가.
인조대왕의 원수를 갚고, 이 세상의 질서를 오랑캐들이 어지럽히기 전으로 되돌린다.
먹물 먹은 선비들부터, 저자의 무지렁이 백성들까지.
모두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 임금의 생각일지는 몰라도, 네 주인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박철균의 말을 차분히 들은 아민이 지적했다.
"내가 본 그의 눈은 한인(漢人)이나 너희 조선인들이 말하는 충의지사의 것과는 전혀 달랐으니."
"영고탑주는 우리 대장께서 역적질이라도 할 것이라 생각하시오이까?"
박철균은 불쾌한 표정으로 답했다.
비록 정상적인 관계가 아닌, 강압에 의한 통정(通情)으로 생긴 아이라 하나 이자원은 폐주의 아들이다.
그러나 이자원은 폐주에게 별다른 정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걸림돌이 될 것 같자 망설임없이 제거하지 않았는가.
그는 조금이라도 그런 욕심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러니 궁금한 것이다."
아민은 박철균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한 사내로서 너른 벌판을 질타하고, 발길에 닿는 모든 곳을 쥐려 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그리고 아민 자신이 그러했다.
"한인(漢人)들이 운운하는 충정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 또한 이해가 간다."
숭정제의 손에 죽기 전까지만 해도 청의 일대 대적(大敵)이었던 원숭환 같은 자가 그러했다.
"그러나 이자원은 둘 모두 아니지.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이런 방략을 짜내고 있단 말인가?"
조정에 대한 충정 따위를 운운할 정도로 곧은 자는, 자신을 이용하겠다는 책략을 짜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스스로 난세에 우뚝 서려는 자도 아니라면 도대체 이자원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박철균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오리다."
어차피 죽을 자의 넋두리라 생각하고 들어주던 박철균은 한방 먹은 기분에 간신히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 그럴 수 있겠지. 네놈이라 해서 어찌 알겠는가."
아민은 말했다.
"그러나 네가 이자원의 속을 모르듯이, 그의 윗사람도 그러할 것이다. 모략도 군략도 용맹도 지재도 모두 갖춘 자가, 도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인지 멋대로 오해하겠지."
윗사람은 그런 자를 오래 두고 보지 못한다. 홍타이지가 자신을 숙청한 것처럼.
"결국 충의예지를 따지는 조선인이나 너희가 오랑캐라 멸시하는 우리 만주인이나 다 같은 것이다."
그것을 얼마나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느냐에 따라 달렸을 뿐.
아민은 그렇게 답했다.
"네 주인에게 전하라. 결국은 남의 위에 올라서든지, 아니면 참혹하게 잘려나갈 뿐이라고."
박철균은 스스로도 머리가 그리 좋지 않다 여겼다.
그러나 그런 그로서도 아민이 은근히 자신을 추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대장 영감은 주상 전하의 지극한 신뢰를 받고 있소이다. 영고탑주가 바라는대로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오."
박철균이 말했다.
임금과 그의 상관은 옛날 소열제와 제갈무후의 관계를 연상케한다며 소문이 자자하지 않은가.
"재주 있는 자가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화를 입게 되리니."
아민이 듣는둥 마는둥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그 말대로 살아왔다. 스스로가 재주 있는 자라 믿으며. 그리고 그 끝에 이른 곳이 여기였다.
"마지막으로 성 밖의 들판이 보고 싶군."
그가 일궈놓은 닝구타를 둘러보고 싶었지만, 아민은 끝내 그러지 못했다.
그의 손이 이내 떨구어졌다.
당황한 박철균이 바깥을 보고 무어라 소리쳤다.
"총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족장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후금의 서열2위까지 올랐으나, 홍타이지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말년에 이르러 닝구타에서 세력을 일으켰던 남자의 죽음은 여느 노인과 다를바 없었다.
"내세에는 평안하시기를."
족장들의 뒤를 따라 들어선 소소쿠는 씁쓸한 표정으로 만주족 전통의 고두례(叩頭禮)를 올렸다.
그가 한때 섬겼던 상관에 대한 예의였다.
모두가 형식적으로 슬픔을 표하는 가운데, 박철균은 천천히 아민이 남긴 말을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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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고탑을 얻었으니 그곳에 부윤을 부임케 하고 각 여진족을 조율하게 하라?"
임금은 이자원의 보고를 들으며 말했다.
"야인들을 묶어 맹주를 세우는 것도 아니고, 아예 우리 땅으로 편입시키자는 말이 아닌가. 대명의 조령 없이 이런 일을 결정하여도 되겠는가?"
"본래 국초(國初) 일컫기로는 여진의 벽토까지 대명의 것 운운 하였으나, 기실 요동도사(遼東都司) 동쪽으로는 변장(邊墻)이 수축되고 명의 바늘 하나 꽂히지 않았나이다. 성종대왕 조에도 야춘(耶春)에 성을 쌓아 취하고자 하였사오니, 안될 것이 무엇이 있겠나이까. 게다가 천조는 요심마저 잃은지 오래이니 신경쓰지 못할 것이옵니다."
"으음."
임금도 땅이 넓어진다는데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북벌에 도움이 되는 것임에야.
"경하창을 도와 청을 몰아내라 명한 것이 헛된 일은 아니었구나."
따지고보면 맨 처음 임금의 강권에 의해 이자원이 움직였고, 그게 구르고 굴러 통째로 조선이 삼키는 그림이 되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임금이 처음 생각했던 과정과는 영 달랐지만.
"모두 성상의 영단 덕분이옵니다."
이자원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런 말도 할줄 아는가."
따지고 보면 아부나 다름없었지만, 이자원이란 사람이 사람이다 보니 아부처럼 들리지 않는 효과가 있었다.
임금은 기분좋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봉림도 많은 것을 배운 모양이다. 어영청을 대대적으로 손을 보겠다더구나."
봉림대군은 강경하게 어영청만의 노선을 걷고 있었고, 이완도 마찬가지였지만 전투에서 쓴맛을 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으리라.
그렇게 훈련도감과 어영청, 정초군이 정비가 되고 나면······.
"드디어 북벌이 시작되겠지."
"그러하옵니다."
북벌을 입에 담는 임금의 눈에는 생기가 감돌았다가 이내 희미해졌다.
"내가 그것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전하."
이자원은 빠르게 임금의 안색을 살폈다.
즉위 후 계속 헤쓱해지고 있던 용안이었지만 원정을 다녀온 사이 그것이 더 심해진듯했다.
"선대왕께서 비명에 가신 이래 나는 한번도 복수를 잊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몇년을 더 버틸지 모르겠다."
학질을 고침으로 인하여 위기를 넘겨, 3년은 더 살았지만 그 이상은 부족했던가.
"훈련대장."
"말씀하소서."
이자원이 대답했다.
"세자를 보좌해줄 수 있겠는가."
"어찌 새삼 그런 말씀을 하시나이까."
이자원은 엎드려 말했다.
그러나 임금은 엄살을 부리는 것도 아니요, 이자원을 시험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나와 그대는 실로 기묘한 군신 관계였다."
임금은 복수를 위해 이자원이 필요했고, 이자원도 목적을 위해 임금이 필요했다.
두 사람은 제법 합이 잘 맞는 동맹이었던 셈이다.
북벌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그러니 임금도 이자원의 충심이 온전히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를 총애했다. 다른 신하들처럼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충심을 그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수가 없는 인간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대가 결과적으로는 나를 위해 재주를 써준 것처럼, 세자를 위해서도 써줄 수는 없겠는가. 그대에게도 처조카가 되는 아이 아닌가."
선대왕인 인조 때 숱한 역모가 있었고, 강력한 권위를 확립한 자신의 대에서도 권대용의 난이 일어났다.
역사를 상고해보면 그보다 많은 유군(幼君, 어린 임금)들이 자리를 빼앗겼으니 어찌될지 모른다.
그래서 임금은 불안한 것이다.
조선 제일의 명장을 불러다놓고 부탁할 수밖에 없을만큼.
"신은 오로지 종사를 위해 쇄신할 뿐이옵나이다."
묘한 말이다.
세자가 아니라 종사를 위해서.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로구나."
그러나 임금은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넘겼다.
그의 입장에서는 양자가 구분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일까.
이자원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임금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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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위해 재주를 써준 것처럼 세자를 위해서도 써달라, 라.'
어전을 물러나온 이자원은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대와 나는 같은 목적을 위해 한 배를 탔을 뿐이거늘.'
한번씩 고집을 부릴 때가 있긴 했지만, 그 외에는 자신을 믿고 일관되게 조선의 체질을 바꾼 임금이었다.
그에겐 강단도 있고 결기도 있었다.
만약 당장 북벌이 시작된다면 임금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자원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리라.
그러나 그가 아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세자가 보위에 오른다면, 과연 이자원은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세자가 올해로 여섯살이던가.'
금상의 흠없는 적장자인데다 이번에 세자 책봉도 받았다. 게다가 중전이 건강하니 아마 변고가 생긴다면 세자가 즉위하는 것 외에는 다른 가능성은 전혀 없으리라.
이자원은 그렇기에 중얼거렸다.
"만세무강(萬世無疆)하소서, 주상 전하."
부디 일을 모두 이룰 때까지만이라도.
이자원은 진심으로 바랐다.
< 갈림길 (4)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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