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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22화 (122/213)

< 갈림길 (3) >

얼마 뒤.

닝구타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전날까진 숨결이라도 붙들고 있던 아민이 기어이 죽음에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성중에 파다하게 퍼졌던 것이다.

"이제 여러 사람이 모여 상례(喪禮)를 논해야 하니, 구사 어전께서도 오시라는 저희 할라이다의 전언입니다."

"뭣?"

양람기 구사 어전 바트마는 느닷없이 들려온 소식에 놀라 외쳤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바, 그는 곧 평정을 찾았다.

"알겠다. 급한 일만 끝낸 뒤 갈테니 너희 할라이다께는 그리 전하라."

소소쿠가 보낸 사람을 물리친 구사 어전 바트마는 황급히 휘하의 잘란, 니루 어전들 가운데 믿을만한 자들을 추려 불러모았다.

"드디어 때가 온 것 같다."

이제까진 갑론을박하는 족장들 틈에서도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고 있던 바트마였다.

그러나 더이상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아민이 죽었으니 양람기의 지휘권은 온전히 그에게 있지 않은가.

닝구타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쥐고 있는 그가 움직인다면 순식간에 성을 장악할 수 있었다.

"구사 어전, 마음을 굳히신 것입니까?"

"그렇다."

바트마는 양람기의 여러 부대장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이미 한의 조령(朝令)을 받았으니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너희도 이 먼 닝구타까지 와서 머물러 있는 것이 지겹지 않으냐?"

실상은 강덕제가 아니라 군기대신인 도르곤의 명이었지만 바트마로서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돌아갈 길과 자리만 제공해준다면 그가 곧 따라야할 상대가 아니겠는가.

"물론입니다!"

양람기는 비록 아민의 부대였다 하나, 그것도 무려 10여 년 전.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사지에 몰린 지르갈랑을 떠나 마지못해 아민에게 붙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아민에게 대단한 충성이 있을리가 없었고 심양이 아닌 변방인 닝구타에 있는 것도 지긋지긋하게 여겼다.

"그렇다면 지금 결행하는 것입니까?"

"그래. 이제 총관이 죽었으니 망설일 것이 무어가 있겠느냐?"

아민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연고 없는 닝구타에서도 대장 노릇을 하며 기반을 쌓아올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걸물이라도 살아생전에나 그러할 뿐, 죽고 나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법이다. 그 누구라도.

심지어 태종마저 죽고 나자 나라가 사분오열되지 않았는가.

"어전, 섣불리 움직였다 소소쿠를 놓친다면 큰일이 날 것입니다. 그 같은 자가 제 본거지로 돌아가 난을 일으킨다면 진압하기 쉽지 않을 터이니, 조금 때를 기다렸다 움직이시지요."

소소쿠는 무려 22개 씨족을 거느린 대세력의 족장이다. 수월하게 동만주를 장악하려면 반드시 제거해야 할 자였다.

부하가 간언했지만 바트마는 단호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어수선할 때가 적기 아니겠느냐. 소소쿠와 동만주의 여러 할라이다, 기샨이다들을 사로잡는다면 누가 감히 반항할 수 있겠나? 즉시 들이칠 터이니 너희는 준비하도록!"

바트마는 그리 결단을 내렸다.

===

갑주를 갖춰입은 양람기가 성내를 속속들이 장악하기 시작했다.

물건을 사고 팔며 닝구타를 돌아다니던 여진인들은 그 모습에 놀라 바짝 엎드렸다.

"무슨 일이 나긴 난 모양이로군!"

"총관께서 돌아가셨다더니······ 다시 청나라가 들어서는 것은 아닌가."

그간 청 조정의 병력 동원과 공납 요구에 시달려 온 닝구타인들은 양람기가 마치 성을 점령이라도 하듯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소쿠의 방으로 들이닥친 양람기 군사들은 그곳에 모인 한무리의 족장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이 어쩌고 저째?"

하지만 정작 목표인 소소쿠는 없었다는 말에 바트마는 거세게 투구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무래도 양람기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먼저 몸을 뺀 듯합니다.

남아있는 자들은 도르곤에게 협력하기로 약속한 족장들 뿐이었다.

바트마가 열심히 눈을 굴렸다.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벌써 이렇게 일이 꼬인단 말인가?'

빌어먹을 자식들 같으니.

"어전, 소소쿠를 비롯한 역도들이 방금 성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그래?"

차라리 잘되었다.

이대로 이놈들의 행방이 묘연한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빨리 팔기를 풀어 놈들을 추격해라!"

어설프게 군사를 보내지 말고 확실하게 붙잡아야 한다. 소소쿠가 도망간다면 그보다 골치 아픈 일이 없다.

바트마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노리는 이가 없었다면.

닝구타에서 출성한 병력들과 도망치는 무리들 간에 한바탕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성내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화르륵!

"무슨 일이냐?"

성 한켠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백성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양을 보며 바트마가 물었다.

"성 내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불이 붙은 것 같습니다."

"빨리 진압해라!"

바트마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방화든 실화든 어수선한 판국이니 자연히 일어날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먹힐 새도 없이, 여기저기서 함성이 들려왔다.

"와아아!"

"배신자 바트마를 잡아라!"

어디선가 튀어나온 병력들이 외치며 양람기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바트마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이 튀어나올만큼 놀랐다.

"이, 이놈들이 어디서 올라온 것이냐?"

몇몇 전사들이 칼을 휘두르자 양람기들이 죽어나자빠졌다.

"이놈, 바트마야! 감히 총관을 배신하고 너 혼자 청조에 빌붙으려 했더냐!"

수레에 아민을 태운 소소쿠가 나타나자 바트마는 혼비백산했다.

"이런! 분명 총관은······!"

"나는 죽지 않았다."

아민이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러나 너는 내가 그러기를 바란 모양이로구나."

만주족은 입관 전까지는 주로 화장(火葬)을 했다.

그리하여 아민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패착이었다.

"초, 총관! 어찌 제가 총관을 배반하겠나이까!"

"시끄럽다!"

아민은 수레에 앉은 상태에서 가느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동포들아! 저 바트마는 청조에 너희를 노예로 팔아넘기고자 하고 있다! 그런 것을 보고 가만히 놔둘 수 있겠느냐?"

아민은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고 있는 양람기를 보고 소리쳤다.

"양람기들 중에서도 이곳 닝구타 여인과 맺어져 정착한 이들도 많을 것이다. 너희는 계속 묵던의 꼭두각시가 되어 살 것이냐?"

닝구타를 기반삼아 청을 먹으려던 야심을 품은 아민이 할 말은 아니지만, 그 말에 군심이 흔들리는 것은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이익! 시끄럽다! 숨고 있던 쥐새끼들은 한줌 밖에 되지 않는다! 어서 아민을 사로잡고 한께 큰 포상을 받아라!"

바트마의 의견은 타당했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으니 그를 따라 거병한 양람기의 대다수는 쉽사리 편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성 바깥으로 추격하러 떠난 양람기도 곧 속았음을 깨닫고 돌아올 터이니 밀어붙이면 이길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때 성 바깥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호기(胡騎)를 격파했다!"

"오랑캐들을 잡아라!"

만주어와 확연히 다른, 조선어로 퍼지는 함성. 거기에 바트마는 당황했다.

"조선군을 언제 끌어들였단 말이냐?"

그만한 대군이 움직인다면 알아채지 못할리가 없을 터.

하지만 성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조선군은 명백한 실체였다.

"반나절도 되지 않아 위세가 끝이 났군 그래."

소소쿠는 바트마를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

"신속(臣屬)이라."

소소쿠가 중얼거렸다.

조선은 아예 동만주를 집어삼키겠다는 야망을 감추지 않았다.

"조선도 우리를 탐낸다 이거지."

"허나 할라이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폭넓은 자치를 보장해주고, 형식적인 군신 관게만 맺는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소소쿠 또한 내심으론 그리 생각했다.

'좋다.'

어차피 호시에서 열리는 물자에 의존해야 하는 이상 조선과의 결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도르곤에게 맞서려면 조선의 그늘 또한 필요했다.

"둔아에게 전하라. 받아들이겠다고."

그러나 마음 한켠이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그가 부족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지만 상관이 쓰러진 틈을 타 이리 멋대로 닝구타를 팔아먹어도 되는 것일까.

그런 마음을 품고 아민의 방을 찾았던 소소쿠는 아민이 희미하게나마 눈을 뜬 것을 발견했다.

"초, 총관, 정신이 드십니까?"

"그래."

아민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또렷했다.

"정말 잘 되었습니다. 당장 이 사실을 알려 불온한 무리들을······."

소소쿠의 말을 아민이 가로막았다.

"잠시 정신을 차린 것 뿐. 나는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 수년간 일구어 놓은 기업(基業)도 끝장이로구나."

"······."

"내가 죽으면 묵던의 조정이 손을 뻗겠지. 이미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던가?"

"총관의 말씀이 맞습니다."

소소쿠는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같은 만주족이라 하나 이 사하랸 우라(흑룡강)의 족속과 저 요심의 족속은 다릅니다. 묵던에서 이래라 저래라하는 것을 더는 지켜볼 수는 없습니다."

"혼자서는 청의 공세를 막아내기 힘이 들 터인데······?"

"조선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들도 제 잇속을 차리기 위함이라지만 우리를 지원할 수밖에 없겠지요."

소소쿠의 말에 아민은 허탈하게 웃었다.

"결국은 내가 동만주의 부족들을 규합하고, 닝구타를 흥성케 하고, 봄보고르를 토벌하던 것들이 다 조선을 위한 것이었군."

아민은 쓰게 말했다.

"어찌 보면······ 이자원, 그자는 애초부터 이리될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민이 동분서주하는 동안 조선은 동만주의 경제에 깊숙이 침투해 장악했다.

그리고 열심히 개척한 과실을 제 손아귀에 넣으려 하지 않는가.

아직 누구보다 건강하던 시절의 자신을 보며 이런 계획을 꾸몄다면, 이 얼마나 깊은 심계(心計)일런지.

'이 또한 그자의 계획 중 하나일 뿐이겠지.'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개인의 영달? 가문의 복수?

그 옛날 제갈량 같은 충심을 품고 있기 때문은 아니겠지.

평생 충성이란 두 글자와는 거리가 멀도록 살아온 아민은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좋아, 이렇게 하도록 하자."

아민은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증오해마지 않는 홍타이지의 자손들에게 닝구타를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순순히 이자원의 손에 모든 것을 쥐여주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과연 그자는 무엇을 바라고 있을지."

아민이 중얼거렸다.

===

「병법은 적을 속여 세우고 이익에 따라 움직이며, 병력을 나누기도 하고 합치기도 함으로써 변화를 꾀한다. 군대가 드러내어 움직이면 반드시 저들이 경계할 것이다.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지 말라.」

함경도에서 북상한 조선군은 예전 닝구타 정벌 때처럼 대놓고 움직이지 않았다.

바트마와 친조정파 족장들이 괜히 경계심을 품는다면 일이 까다로워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 북병들을 조선인 상인으로 위장시켜 움직임이 어떠한가?'

'훈춘과 남강에 정착한 조선인들이 많기에 위장해도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오이다.'

농사짓는 이들은 대부분 북방에 보내진 키리시탄들이 많았지만, 조선인들도 농사를 많이 지었고 때로는 닝구타를 오가며 장사를 하기도 했다.

대개 수로를 이용하지만 때에 따라 이리저리 수레를 끌고 대규모로 상행위를 하러 움직이는 자들도 많았으니 적절한 선택이었다.

'성은 검문이 까다로운데다 양람기가 관장하고 있다 하니 잠입하기엔 힘이 들 것이외다. 다만 인근 농토가 넓고 마을이 많으니 그곳에 머물고 있다 합류하시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소소쿠에게 전달받은대로 멋모르고 튀어나온 양람기를 때려잡은 조선군이었다.

박철균은 편곤에 뚝뚝 흐르는 피를 슥슥 문질러 닦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처, 철균아! 살려다오!'

"허."

마치 편곤에 묻어버린 피처럼, 끈적끈적하게 형제의 비명이 귓가에 달라붙어 온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러하겠지.

"지독한 짓을 하시었소, 대장 영감."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상관이 가끔 무언가를 생각하며 우수(憂愁)에 잠기는 것 또한 마찬가지 이유가 아니겠는가.

박철균은 닝구타에 입성했다.

그곳에는 죽어가는 아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 갈림길 (3)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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