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림길 (2) >
훈련도감이 한창 진강으로 북상하고 있던 시각, 닝구타.
아민이 이곳을 거점으로 삼은 이래, 조선과의 호시에서 들어오는 물자로 인해 성은 날로 번성하고 있었다.
성벽도 기존의 토성(土城)에 가까운 방벽을 치우고 석성으로 제법 크게 돋았을 뿐만 아니라 인근에 정착하여 보리와 콩, 감자와 각종 잡곡을 재배하는 인구가 확연히 늘어났다.
그러나 그렇게 번화하는 성과 정반대로, 그 주인의 수명은 점점 줄어가고 있었다.
"할라이다!"
"총관께선 어떠십니까?"
아민의 방에서 나온 소소쿠를 향해 여러 부족들의 할라이다와 기샨이다, 즉 족장들이 물었다.
그들의 질문에 소소쿠는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허어."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올초 병으로 쓰러진 아민은 좀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숱한 전장을 뛰어다니며 승전을 거두었고, 모든 것을 잃은 뒤에도 끝내 말년에 동만주의 맹주로 거듭난 아민이었지만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족장들이었지만 속으로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과연 이것이 동해여진 제부족(諸部族)에게는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혹, 총관께서 이대로 올해를 넘기지 못하신다면······?"
기어이 튀어나온 한 족장의 속내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말투는 조심스러웠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이대로 총관이 죽는다면 예전처럼 청조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야 할 터인데.'
조정에서 부과한 공납도 적당히 체면치레할 정도로나 납부를 하고, 조선과의 교역을 통해 부족한 물자를 수급하는 것은 모두 아민의 그늘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아민이 죽는다면 구심점이 사라진 동해여진은 저 두가지 이점을 모두 잃게 된다.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간섭이나 해대는 청 조정보다는, 아민 아래 똘똘 뭉쳐 이대로 자치를 누리며 사는 것이 훨씬 편했다.
마음이 급해진 누군가가 다급히 말했다.
"조정에 주청하여 묵던에 있는 총관의 아들이나 손자로 하여금 사위(嗣位)케 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나 소소쿠는 내심 혀를 찼다.
아무 능력도 없는 그들이 총관 자리에 앉아봤자 아민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아민조차 자식이나 손자들을 구태여 데려오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거늘, 저 멍청한 놈이 되도 않는 말을 꺼냈다.
"아니면 거이커르 공께서 총관의 뒤를 이으심은 어떠하십니까?"
그때 다른 족장이 나서서 소소쿠를 천거했다.
"공께서는 청 황실의 사위이며 이 동만주에서 가장 유력한 후르카 부(部) 거이커르 성(姓)의 할라이다가 아니십니까. 또한 총관의 측근으로 활동하신지도 오래되었고, 인망도 있으니 우리 중 가장 적합한 분이십니다."
"감사한 말이나 나는 생각이 없소."
그제서야 소소쿠는 입을 열었다.
그는 아민처럼 효웅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봄보고르 같은 자가 상경을 점거하고 1년 넘게 기세를 올렸지만, 제대로 싸움을 하게 되자 허무하리만큼 무너졌다. 내가 닝구타에서 일어난다 하더라도 똑같은 꼴이 되지 않겠는가?'
아민은 수많은 싸움을 거쳐온 숙장이니 청 조정에 맞설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도르곤 집권 후 수 없이 감찰(監察)을 파견한다는 명목으로 간섭하려 들어도 모조리 내쫓았겠지만.
하지만 소소쿠는 자신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이런 난세에 나 같은 자가 여러분을 이끌게 된다면 분명 큰 경을 치게 될 것이오. 받아들일 수 없소."
소소쿠마저 거절하자 족장들의 고민은 깊어졌다.
그때.
"비록 묵던이 멀다 하나 우리 조정이요, 이미 조정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소? 어찌 감히 총관을 멋대로 내세운다 만다 하며 우리의 충심을 시험하는 것이오?"
"맞소이다. 총관께서 돌아가시면 마땅히 조정의 명에 따를 뿐이지, 지금 왈가왈부하는 무리들은 무엇이오!"
'이자들이.'
소소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주장을 펼치며 나선 이들은 자신과 같은 후르카 부의 족장들이다.
힘의 논리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동해여진이 충성 따위를 운운하는 것은 어이가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런 명분을 내세우는데는 다 꿍꿍이가 있는 것이리라.
"조정은 반드시 조선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이곳 동만주에서 싸움을 벌이려 들거요. 그 후과는 우리가 모두 감당해야 할 터인데, 어찌 수천리 떨어진 묵던을 위해 우리가 죽어야 한단 말이오?"
"조선놈들이 던져주는 물자 몇개를 받아먹는다고 그들에게 아양이라도 떨 셈이란 말인가!"
순식간에 모든 기샨이다와 할라이다들이 양패로 갈려 서로를 꾸짖었다.
오직 말이 없는 이는 소소쿠 뿐이었다.
치열한 언쟁을 넘어서 주먹다툼으로까지 번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서야 그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총관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지도 모르니 우선은 기다려봅시다."
소소쿠가 그렇게 정리하자 분쟁은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서로를 향한 불만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족장들이었다.
'총관이 회복하지 못할 것 같으니 승냥이처럼 이빨을 드러내는구나.'
소소쿠는 자리를 나서는 족장들을 보고 조용히 생각을 간추렸다.
'도르곤과 작당한 자들이 있다 이거지······.'
아마 그로부터 부족의 세력을 늘려주겠다느니, 관직을 주겠다느니 하는 약속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첫 타도 대상은, 바로 동해여진 중 가장 유력한 부족장인 자신이 될 터였다.
아민과 손잡고 동해여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그였으니까.
'게다가 움직이는 것은 저들 뿐만이 아니다.'
양람기의 구사 어전인 바트마의 눈치도 이상했다.
팔기의 구사 어전은 원래 두 명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양람기의 경우 바트마와 버이서(覇者)인 퍙우가 맡고 있었다.
퍙우는 아민과 지르갈랑의 동생으로, 지르갈랑을 따라갔지만 이미 그가 글렀음을 깨달은 바트마는 아민에게 붙었다.
그 뒤로는 반쪽짜리 양람기를 지휘하며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그러나 총관이 앓아 누우니 다른 생각을 한다 이거지."
한번 배신한 자가 다시 배신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분명 바트마는 아민이 타계하고 나면 동만주를 통째로 들고 도르곤에게 빌붙을 속셈이리라.
"할라이다, 그리되면 큰일이 아닙니까?"
부하의 물음에 소소쿠는 입술을 짓씹었다.
양람기가 닝구타를 장악하고, 자신을 쫓아내려는 여러 족장들이 압박해온다면 그대로 무너질 것이다.
마치 몇년 전 호기롭게 반란을 일으켰던 기야하찬처럼.
소소쿠의 세력은 기야하찬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지만 결과는 같으리라.
"허면······."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
아민이 이러다 덜컥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다 끝장이다.
"둔아를 불러들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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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기야하찬과 형 기라라지가 반란을 일으켰다 목숨을 잃은 뒤, 둔아는 얼마 남지 않은 부족들을 데리고 고향인 야춘으로 돌아왔다.
본래 이대로라면 다른 부족들에게 흡수되거나 칼을 맞고 사라질 운명이었겠지만, 둔아는 필사적으로 눈치를 굴려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바로 같은 후르카 부임을 내세워 소소쿠의 속민(屬民)을 자처한 것이다.
야춘과 소소쿠의 근거지인 삼성(三姓)과는 제법 거리가 있지만 소소쿠의 세력은 본래도 목단강부터 송화강 북안의 우잘라까지 미칠만큼 컸던데다, 아민의 밑에서 더욱 위세가 강고해졌으니 둔아 정도의 뒤를 봐주기엔 충분했다.
그러다 야춘에서 열린 개시(開市)에 발을 걸치고 제법 기반을 잡아, 이제는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한 그였다.
그래보았자 제 아버지 기야하찬 시절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지만.
어쨌든 닝구타와 야춘을 왕복하며 교역에 매진하던 그를 소소쿠가 불러들여 내린 밀명은 간단했다.
바로 조선에 이 사실을 전하라는 것.
"오랜만이로군."
다시 이 얼굴을 볼줄 몰랐던 이자원이 말했다.
경흥을 통해 밀서를 전달하려던 둔아는 멀리서 훈련도감이 북상해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리로 곧장 온 터였다.
그리고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도르곤은 패해 심양으로 돌아가고, 조선은 동팔참을 회복해 철군 준비를 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저희 총관께서 중병을 얻으시매, 여러 족장들은 중지를 모아 난관을 타개할 생각은 않고 서로 권신에 줄을 대어 제 부족의 세력을 늘릴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저희 총관께서는 조선과 수 년에 걸쳐 우의를 다져 오셨고, 휘하의 제부족 또한 그러합니다. 부디 이웃의 정과 도리를 잊지 않고 해주십시오."
'역시.'
동만주의 정세는 이자원이 의도한 바대로 움직였다.
조선에 한번 경제가 종속되고 나자 동해여진은 그 굴레를 스스로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었다.
하물며 굴레 자체가 청의 것보다 훨씬 온건한 것임에야.
"흠."
이자원은 명확히 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이웃이라 한들 어찌 남의 나라 일에 함부로 간섭을 하겠느냐? 그렇지 않은가?"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렇다면 기야하찬을 지원하겠답시고 군대를 보낸 것은 무언가.
둔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지만 그는 애써 말을 삼킨 채, 단지 이리 대답했다.
"부디 이놈들을 살려주십시오."
"그러니까."
이자원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조선의 땅이라면 모르되, 남의 나라에 간섭을 하는 형식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 하오시면······."
"너희가 조선에 정식으로 칭신을 할 수 있겠는가?"
둔아가 숨을 헙 삼켰다.
비록 과거 여진 부족들이 조선의 관직을 받든 적은 있지만, 공식적인 군신 관계는 아니었다.
엄연히 명나라가 건재하여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명이 손쓸 수 있는 방법 따윈 없다.'
알아도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요심도 빼앗긴 마당에 동해여진이 조선에 신속하든 말든 어찌 간섭할 수 있겠는가.
"하오나 청조가 이를 꾸짖고자 군대를 보낸다면 어찌합니까?"
"오면서 보지 못했는가? 그들은 이미 진강에서 패했다."
이자원이 말했다.
"설사 군세를 회복하여 동쪽으로 군대를 몰아간다 하더라도 조선이 너희를 지켜줄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아민이 죽으면 청은 동만주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려 들 것이고, 그때가 되면 굴복하든 맞서 싸우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조선의 도움이라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로지 신속만 하면 되겠나이까?"
"아, 영고탑(寧古塔) 정도는 우리 군대가 상주하며 직접 다스려야겠군."
겉으로는 혹시 모를 청군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라 설명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닝구타만큼은 조선의 직할령으로 두어야 동해여진을 통제하기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닝구타와 훈춘, 야춘, 그리고 남강까지.
이곳들만 쥐고 있다면 동만주에서 조선에 반항할 수 있는 자들은 감히 나오지 않으리라.
"가서 네 주인에게 전하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해줄 말이 없다고."
"······알겠습니다."
둔아는 이자원이란 남자를 안다.
그는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다.
"다만 사세가 급하니 군사를 저와 함께 보내주시옵소서."
그렇기에 둔아는 원수나 다름없는 그에게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동만주가 조선의 손에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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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원은 박철균을 둔아와 함께 경흥으로 보냈다.
병조참판 겸 훈련대장, 임금의 부절까지 받든 이의 명이었으니 함경도에서도 군사를 내라는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이 참판께서 이리 크게 되실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함경도 병마절제사 민영(閔?)은 어쩐지 씁쓸한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따지고 보면 그는 박철균과도 함께 싸운 전우로, 쌍령 전투에선 경상 우병사로 참전했던 이였다.
본래라면 쌍령에서 죽었을 운명이 바뀌어 이자원 덕에 살아남은 셈이지만, 그것을 모르는 그로서는 그때는 파총에 불과했던 이자원이 자신보다 윗자리에 앉은 것을 보고 입맛이 썼다.
특별히 이자원을 시기하거나 낮게 보아서가 아니라, 까마득한 후배가 출세한 사이 자신은 경상도에서 오지인 함경도로 옮겨왔을 뿐 별다른 출세를 하지 못했던 사실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호인들의 분위기가 어지러웠는데, 이런 연유에서 기인한 것이었군. 이참에 큰 공을 세워야겠네."
"조심하십시오, 병마사 영감."
흥분한 민영의 말투에 박철균이 말했다.
"가도의 오 부총병 같은 명장도 함부로 공을 탐하다가 큰코를 다쳤으니, 소탐대실의 우를 범해서는 안되오이다."
그러면서 그는 품 속에서 서찰 한 장을 꺼내 말했다.
"대장 영감께서는 저들의 형세를 살펴 이대로만 하라고 말씀하셨사오이다."
< 갈림길 (2)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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