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20화 (120/213)

< 갈림길 (1) >

도르곤은 회전에서 패하자 심양으로 물러가기 시작했다.

청군이 동팔참을 수복하는데 사실상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철수했으니, 조선군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온정평에서 그대로 북상해 봉황성을 취할 수 있었다.

봉황성을 수복하는데 성공한 조선군은 한동안 그곳에서 머물러있었다.

"부총병은 진강의 방어를 다시 굳히는데 집중하도록."

"예, 총병 대인."

오삼계는 이자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르곤의 목은 얻을 수 없었지만 다른 청군의 수급은 많이 취한 오삼계다.

거기다 본래 거점으로 삼고 있던 봉황성도 되찾았으니 잠시 만족감을 누리던 오삼계였으나, 곧 밀려들기 시작한 업무에 당황했다.

전쟁에서 입은 피해와 백성들의 구휼, 농지 정리와 복구 등까지 해야할 일이 산더미였던 것이다.

오삼계의 곤란은 곤란이고, 청군을 격퇴하고 동팔참을 수복하는 임무에 성공한 조선군은 서서히 철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도원수 유림과 부원수 임경업이 북병을 이끌고 마지막까지 남기로 하고, 우선 봉림대군과 이완이 이끄는 어영청군이 앞서 압록강을 넘었다.

양백기와의 전투로 소모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뒤따르기 전, 이자원은 북방까지 올라온 김에 몇가지 사안들을 점검했다.

"금주의 심기원은 무얼 하고 있다고 하던가?"

"단지 버티고 있을 뿐, 무엇도 하지 않고 있사오이다."

조대수가 빠진 자리에 들어온 심기원은 영원의 오양과 연계하여 단지 성만 굳게 지키고 있다는 말에 이자원은 쓰게 웃었다.

그다운 판단이다.

애초에 그것을 노리고 심기원을 보낸 것이었지만 말이다.

차라리 헛다리를 짚고 싸우러 나갔다가 감당할 수 없는 참사를 일으키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았다.

"이것은 호인(胡人)들에게서 들어온 소식이온데, 영고탑주(寧古塔主)가 앓아 누웠다 하오이다."

아민의 직함은 닝구타총관이었지만, 반독립적인 세력이다 보니 조선에서는 종종 영고탑주라 불렀다.

그의 병세가 심하다는 말에 이자원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원래 역사에서도 이때쯤이었겠지.'

이미 역사가 뒤틀렸으니 확신할 순 없지만, 수명이 다해가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동만주 세력들을 묶고 있던 아민이 죽는다면 그 중심에는 공백이 생길 것이고, 조선도 대비해야 하리라.

그렇게 상황을 둘러보고 있던 이자원에게 뜻밖의 사람이 찾아왔다..

"장군."

"가도에 있는 것이 아니었나?"

적비는 평안도까지는 훈련도감을 따라왔으나, 이후 가도로 들어갔다고 들었다. 필경 명나라와 무슨 연락을 주고 받기 위함이리라.

"명에서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다 하던가?"

이자원은 그리 짐작하여 적비에게 물었다.

적비는 별다른 부연없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부좌총독(少傅左總督) 조대수 장군께서는 대동을 공격하고 계십니다. 달단의 군세가 강하나 총독 휘하의 군대도 강병이거니와, 달단은 대동에만 신경쓸 틈은 없을 것이오니 조만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잘 되었구나."

이자원은 딱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

적비는 이자원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지라 대동을 되찾더라도 우선 그쪽부터 진압에 나서야 할 것이오이다."

이자원의 표정에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하다못해 과장되게 걱정하는 표정조차도.

"조 총독의 병력이 반란에 힘을 쓰는 동안 부총병이 금주를 계속 지키겠지요?"

"아마 그렇겠지."

기약없는 기다림이다.

그러나 이자원은 덤덤했다.

마치 이미 이럴줄 알았던 것처럼.

"조선은 천조의 충실한 제후이니 어찌 성심을 다해 돕지 않겠는가."

적비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심기원이 금주에 계속 묶여있다면 조선으로서도 좋을 것은 없다.'

조선의 지원으로 재건한 가도군이었으니, 당연히 조선도 자신들의 방위에 쓰고 싶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자원은 오히려 이를 알고도 심기원을 금주에 보냈다.

군량과 물자야 기존 금주군에게 그리했던 것처럼 명나라가 대지만, 조선은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이 사람은 조선의 다른 신하들처럼 천조에 충성을 다하는 자가 아니다.'

조선이 근본은 오랑캐이나 오랫동안 중화의 덕을 흠숭하여 따른 까닭에 스스로 예의의 나라라 자부하고, 명을 아버지처럼 섬겼다.

그러나 이자원에게선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 자가 몇년이 걸려 반란이 진압될지 모르는데도 심기원을 금주에 보냈다는 것은······.

'설마.'

이대로 대명의 성세가 끝날지 모른다는데 걸지 않고서야.

적비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자원의 눈동자는 미동 하나 없었다.

그러나 이자원이 만약 정말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자신은 어찌해야 하는가.

'따지자면 우리 일가의 은인이다.'

이자원이 알았든 몰랐든 간에, 간접적으로 은혜를 입은 것은 사실이 아닌가.

그렇기에 낙양성이 추궁할 때도 그의 약점을 숨겼던 적비였다.

'아니,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적비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정말 이자원이 명나라의 멸망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면, 그것을 대비해 심기원을 금주에 보낸 것이라면 그는 어찌해야하는가.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흔들리는 적비의 귓가에 오래 전 들었던 목소리가 스쳐지나갔다.

'나는 오로지 봉공(奉公) 두 자를 마음에 써서 품고 다닌다.'

그렇기에 나라가 그의 집안을 어찌 대접하든, 그 또한 이 먼 조선땅까지 와있는 것이 아닌가.

오로지 봉공, 두 자를 얻고자.

적비의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금 업무로 되돌아간 이자원을 보며 적비는 마음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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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조선에는 배동(陪童)이라 하는 제도가 있다.

원자와 함께 교육을 받고 놀이를 하는 친구인데, 주로 종친이나 대신의 자제를 선발하였다.

그러하니 사적으로는 원자의 이종사촌이자, 임금이 신임하는 중신의 아들인 이안세가 원자의 배동이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늘도 원자와 함께 경전을 펼쳐 놓고 구절들을 외우고 있는 그였다.

"오늘은 효경(孝經)의 간쟁장(諫諍章)을 배워보겠습니다."

효경과 소학은 초학(初學)하는 이가 배울 경전이라 하여 이맘때쯤부터 가르친다.

교수관을 맡은 송시열과 송준길은 네덜란드에 유학은 다녀왔으되 그 이전에 이름 높은 학자이기도 하였으니 가르침도 엄하였다.

"증자왈 약부자애공경 인친양명인데 삼문칙명의 감문하니······."

죽 경전을 읊은 송시열은 원자에게 물음을 던졌다.

"원자 마마, 자식이 아버지의 명을 따르기만 하면 효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원자는 별다른 고민없이 말했다.

아직 여섯살 밖에 되지 않은 그로서는 당연히 그래야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으니.

"이 도령도 그리 생각하는가?"

그러나 원자의 사촌동생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송시열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원자는 모르는 것이 있어도 자존심 때문인지 쉬이 인정하지 않는 반면에, 안세는 스스럼없이 그것을 털어놓았다.

둘 다 어린 아이들이라 하나 받는 중압감 자체가 다르기에 당연한 일일수도 있겠지만.

"아버지의 말이라 해도 잘못이 있다면 반드시 간하여야 합니다."

송준길이 말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옛날에 천자가 쟁신(爭臣, 간쟁하는 신하) 일곱을 두면 무도하여도 천하를 잃지 않았고, 제후는 쟁신 다섯을 두면 나라를 잃지 않으며 대부는 셋만 두어도 그 집안을 잃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옳지 않은 일을 하면 자식으로서는 아버지를 간쟁하지 않을 수 없고, 신하는 임금에게 간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아버지의 명만 따른다고 어찌 효라 하겠습니까?"

송준길의 말에 원자는 아리송한 표정이었지만 안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원자가 물었다.

"스승님, 간쟁을 해도 듣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아버지에게 세번 이야기해도 듣지 않으면 울면서 따라야 하고, 임금에게 세번 간해도 듣지 않으면 물러나야 합니다."

스승들은 모범적인 답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아이들의 호기심은 끝이 없다. 안세가 계속해서 묻는 것이다.

"임금이 그래도 계속 신하를 미워해서 하면요? 그래서 죽이려고 하면요?"

송시열은 잠시 고심했다.

그러나 역시나 무도한 군주를 몰아내고 나라의 독립을 찾은 네덜란드에서 살았던 경험 때문일까.

그는 무심코 이리 대답하고 말았다.

"그런 자는 폭군이 아닙니까. 맹자가 이르기를, 인의를 해치는 자는 잔적이라 임금이 아니라 필부라 하였습니다. 고려의 왕이 어리석어 폐단을 답습하고 우리 태조를 해하려 하니, 분연히 일어나 오백년 왕업을 폐하신 것도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송준길의 말에 두 아이는 알아들을듯 말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 잡설이 길었습니다. 계속 강론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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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에게 듣기로 병조참판의 아이가 참으로 영특하다더구나."

중전은 아들과 함께 입궐한 유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매지간이니 이리 만나는 것이 얼마나 반가운가.

"원자는 나이가 두 살이나 많은데도 아직 장난기만 많고 글을 배울 생각을 하지 않으니."

중전 강씨가 한숨을 쉬었다.

"원자께선 아직 연소하시니 괜찮지 않겠나이까."

"남자실교(男子失敎)면 장필완우(長必頑愚)하고 여자실교(女子失敎)면 장필추소(長必?疎)라 하지 않은가."

남자가 가르침을 놓치면 장성하여 반드시 완고하고 어리석게 되며, 여자가 가르침을 놓치면 장성하여 반드시 거칠고 매사에 서투르게 된다는 뜻이다.

"명심보감이 아닙니까. 아버님께서 늘상 강조하시던 말씀이었지요."

우의정 강석기는 아들이 다섯에 딸이 셋이나 되었으나 손수 가르치며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두 사람은 모두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니 나눌 추억 또한 많았다.

"게다가 조만간 세자가 될 몸이니 한시라도 가르침을 늦출 수가 없다네."

"원자 보령이 고작 6세인데 벌써 말이옵니까?"

전례를 살펴보면 상당히 이른 나이다.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 묻는 유주를 보며 중전이 근심스런 한숨을 쉬었다.

아들이 세자 책봉을 받는다는데도 그리 즐거워보이지 않은 것은, 세자 책봉을 서두르는 이유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혈육임을 믿고 일러주는 것이니 자네만 알고 있게."

"예, 마마."

중전의 말에 유주는 긴장했다.

"근자에 옥체(玉體)가 미령(靡寧)하심이 더욱 심하네."

학질로 숨이 넘어갈 뻔한 위기는 넘겼지만 임금의 몸은 원래부터 좋지 않았다.

그의 속병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 또한 하루이틀로 고칠 수도 없는 질병이리라.

어의들은 좋다는 탕약을 모두 올렸고, 심지어 키니네를 사용해 임금을 치료한 공으로 신뢰를 산 예수회 신부들까지 투입되었지만 차도는 없었다.

임금이 위독한 것은 아니었으나 점점 수척해지는 몸상태 때문인지 세자 책봉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조정 중신들은 대강 알고 있는 일이나 대놓고 퍼지는 것은 다르니 말일세."

중전이 말했다.

"궁중의 말을 중외에 퍼뜨리는 것은 중죄일세. 알고 있겠지."

"이를 말씀이겠사옵니까."

유주는 중전의 말에 잔뜩 긴장하며 대답했다.

< 갈림길 (1)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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