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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19화 (119/213)

< 맞수 (3) >

당연하지만 도이격이 이끌고 있는 양백기와 녹영은 실상 주공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조선군의 시선을 끌고, 오판을 유도하기 위한 부대였을 뿐.

그러나 그 공격은 생각 외로 효과를 거두었다.

'조공(助攻) 따위에 일익이 무너지다니. 조선군도 실상은 별것 아니었던게 아닌가?'

도르곤은 문득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확실히 지난 호란에 비해 정강해진 감은 들었으나, 이번 전쟁에서 보았듯 번번이 청군을 깨뜨려온 그러한 느낌은 없었다.

'정말 이자원이 잘못 생각한 것인가?'

우익은 도르곤을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얇게 배치한 것이 아니라, 정말 기량이 떨어지는 부대였을까.

설마, 그 이자원이?

"대왕께서도 묵던 조정의 간신배들에 의해 부득이하게 군사를 배치할 수밖에 없었던 적도 있지 않으십니까. 정치적인 이유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역사적으로 무리하게 싸움에 나섰다가 패한 명장은 많다.

허나 도르곤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뿌옇게 달려간 한 무리의 기병대가 우익을 구원하는 것이 보였다.

"역시나."

도르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익은 미끼였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들이 그 먹이에 걸려들었으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을 것이다.

"늦지 않게 도착했구려, 도로이 바루르 군왕(多羅武英郡王)."

"대왕의 명이신데 어찌 시간을 지체하겠나이까."

사적으로는 동생이고, 공적으로도 도르곤이 군기대신의 직을 맡았을 뿐 같은 신하였으나, 아지거는 마치 군주를 대하듯 깍듯했다.

"묵던의 상황은 괜찮소?"

"크게 나쁘지 않나이다."

아지거는 언제나 그렇듯이 간단히 대답했다.

"아, 정홍기의 새 기주께서도 오셨군."

도르곤은 아지거를 따라온 이를 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왕."

쑥스럽게 말하는 그는 뜻밖의 인물이었다.

다이샨의 후처인 나라 하라 씨 소생의 아들, 와그다.

호거가 상삼기를 데리고 떨어져 나가고, 아민과 지르갈랑이 양람기를 데리고 떨어져 나갔다.

남은 4기 가운데 도르곤과 도도가 양백기와 정백기, 다이샨의 아들들이 양홍기와 정홍기를 거느리고 있었다.

도르곤의 양백기가 이미 빠진 마당에 도도마저 정백기를 데리고 나올 수는 없다.

지원군을 받으려면 다른 팔기를 포섭하는 것이 필수였다.

본래 호거에게 힘을 실어주다가 정변 이후 범문정에게 붙었던 와그다였으나,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터였다.

"자, 적들은 싸움에 정신이 팔려 턱 밑에 비수가 날아든 줄도 모르고 있다! 너희의 먹잇감이 눈 앞에 있느니라!"

도르곤의 외침에 정홍기 병력들은 거센 비명을 지르면서 돌격했다.

싸움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

정홍기의 기주인 와그다(瓦克達)는 다이샨의 4남이었으나, 후처인 나라 하라 씨 소생 중에서만 따지자면 차남이었다.

형인 사할리연(薩哈璘)은 안타깝게도 병자년에 먼저 죽었으므로, 그가 맏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요토가 죽고 쇼토가 몰락하며 그가 소기주가 되었건만 정홍기와 양홍기 내에선 그들을 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다.

'이전 소기주님들은 선황 때부터 전공을 세워 스스로 일어나신 분들인데 나라 하라 씨 소생들은 무엇이기에 윗사람을 자처한단 말인가?'

'상황이 이리 돌아가지만 않았더라도 당연히 황백부왕(皇伯父王, 다이샨)의 뒤는 두 소기주들께서 이으셨을 것이다.'

요토와 쇼토는 이미 지나간 인물인데 이리 민심을 샀으니 배알이 꼴렸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도르곤은 그 점을 매우 잘 파고 들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전공을 세워야 하지 않겠소?'

쇼토를 다시 정홍기나 양홍기에 복귀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자, 와그다로서도 사양할 이유는 없었다.

"아다리, 네 말을 듣길 잘한 것 같다."

"물론이지요, 숙부님."

사할리연의 장자, 자신의 조카인 아다리를 부르자 그가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는 이복숙부인 쇼토와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고, 그를 따라 도르곤을 지지하기도 했다.

도르곤과 나라 하라 씨가 갈라서며 어쩔 수 없이 그 반대편에 서기도 했지만, 이번에 도르곤의 제안을 받아들이라 청한 것도 바로 그였다.

"네가 가서 저 조선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놓을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아다리가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조선군은 자신들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듯, 목책도 세우지 않고 몹시 허술한 꼴이었다.

"모조리 들이쳐라!"

"예!"

아다리는 말을 타고 선봉에 섰다.

와그다도 정홍기를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목표는 멍청하게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조선군 좌익이었다.

===

온정평의 좌우는 모두 산등성이로 막혀 있다.

이곳을 통해 병력을 우회시킬 것이란 계책 정도는 다들 낼 수 있는 것이다.

당장 쌍령에서도 그랬지 않은가.

그러나 도르곤이 소극적으로 나온다면 그가 어떻게 움직일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자원은 역으로 그를 속이기로 했다.

눈에 척 보이는 미끼를 던진 뒤, 이것을 역이용하려는 적을 끌어들인다.

적들은 별다른 방어시설이 세워져 있지 않음을 보고 방심해서 달려오고 있지만, 이것이 그들의 실책이 되리라.

"정홍기라."

다이샨의 집안과 악연이 깊군.

군기(軍旗)를 본 이자원은 중얼거렸다.

그 아버지인 다이샨은 이자원에 의해 사죄문을 쓰고 정치적 은퇴를 한데다, 큰아들 요토는 이자원에게 패해 조선으로 압송되어 죽었고 둘째인 쇼토 또한 이자원에게 패했다가 정쟁에 휘말려 유배되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자원은 칼을 뽑아들었다.

"적들이 몰려온다! 살수대는 장창 방진을 갖추어라!"

"예!"

살수대는 장창을 내세웠다.

이 광경을 누군가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면, 마치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우는 장면을 연상했으리라.

그리고 고슴도치의 가시가 그러하듯, 장창 방진은 적의 침입을 막는다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포수대!"

살수대의 양 옆으로 붙은 포수대가 사격을 가했다.

- 타타탕!

기병대는 연거푸 쏘아대는 총탄에 의해 쓰러졌다.

그러나 사격은 멈추지 않았다.

카운터 마치(counter march).

횡렬에 섰던 포수들은 뒤로 돌아가 재장전을 완료하고, 그 뒤에 서있던 포수는 앞으로 나서 사격을 개시한다.

초연이 만주의 하늘을 가득 메우고, 연기와 불꽃이 일 때마다 팔기는 쓰러져갔다.

"크윽!"

"쿨럭!"

산에서 미친듯이 내달려오던 팔기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아무리 화망이 형성된다 하더라도 그들의 움직임을 완전히 멈출 수는 없었다.

그들은 대열을 향해 뛰어들었다.

"막아라!"

높이 쳐든 5m 이상의 장창이 강하게 기병의 복부를 찔러댔다.

삼수병이 펼치는 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밀집도와 저지력이다.

비록 조선군이 목책을 치운 것을 보고 뛰어들었다 하나, 그런 방어시설 하나 세워져있지 않음을 믿고 달려든 대가는 참혹했다.

"무슨······!"

선봉에 섰던 아다리가 경악할 무렵, 이자원은 냉혹하게 말했다.

"오삼계에게 가서 전하여라! 당장 적들의 뒤를 들이치라고!"

===

박철균의 기병대는 어영청이 무너지기 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양백기가 깊숙이 들어오기 전에 들판을 달려와 칠 수가 있겠는가.

"좌익에 청군이 나타났사오이다. 아무래도 심양에서 보낸 원군인 것 같사온데······."

"허면 저들도 이쪽이 주 전장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닌가?"

봉림대군은 살았다는 기쁨보다, 청군의 조공조차 감당하지 못해 어영청이 무너졌다는 사실에 얼굴을 감싸쥐었다.

"양백기는 청의 권신인 구왕의 직속으로, 정예함이 다른 팔기보다 월등하오이다. 그러니 너무 심려하지는 마십시오."

이완이 애써 위로했지만 봉림대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우리 삼수병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과 달리, 훈국이 싸우는 모양을 보시오."

박철균의 구원으로 정신을 차린 어영청은 좌익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분명 자신들처럼 옆구리에서 청군이 치고 들어왔음에도 체계적으로 움직이며 쉴새없이 적들을 쓰러트리는 기계같은 자들.

"삼수병은 끝난 것 같소."

척계광의 기효신서, 연병실기와 한교의 연병지남.

여기에 근거하여 짜왔던 전략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의미했다.

봉림대군의 씁쓸한 말에 이완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또한 그러지 못했다.

===

"무엇이!"

도르곤은 지금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조선군은 목책도 세우지 못하고, 자신들이 미끼에 걸려들었다 방심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가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로 좌익을 들이쳤건만, 훈련도감은 무너지지 않았다.

"허허실실의 계, 그렇군."

도르곤이 읊조렸다.

우익이 허술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허술한 것처럼 보였던 훈련도감군의 진영이었다.

우익이 이자원의 미끼일 것이라는, 심리적인 함정에 걸려든 도르곤은 조선군의 가장 강력한 부대를 상대로 싸움을 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조선군이 저정도로 철석같단 말인가."

천하제일인 만주의 기병을 상대로, 야지(野地)에서 깨뜨리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것이 전부 이자원의 노림수였다면, 여기에서 끝나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대왕, 대왕!"

부하가 급히 도르곤을 불렀다.

"졌군."

도르곤은 힘없이 말했다.

아마 중앙에 두었던 병력이 쉴새없이 그들의 뒤를 치기 위해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다.

"全部殺す(전부 죽여라)!"

가도군에 소속되어 있던 일본인들은 칼을 쥐고 청군을 쉼없이 베어넘겼다,

뒤로는 오삼계가 기병을 이끌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반드시 구왕을 잡아야 한다! 알겠느냐?"

오삼계는 욕심이 절절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자원에게 한 간청은 씨알도 먹히지 않고, 이대로라면 진강성을 죽어랄 지킨 보람도 없을 판이다.

실책을 뛰어넘는 대공을 세우기 위해선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오삼계는 그리 굳게 믿었다.

"이 명나라 떨거지들이 감히 기병으로 우리를 대적하려 하느냐!"

"뜨거운 맛을 보여주어라!"

팔기들은 허를 찌르고 들어온 오삼계의 공격에도 끝까지 맞섰다.

그러나 한번 기세가 꺾인데다 옆과 뒤로 적군을 맞게 된 그들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쇄도한 병력들이 팔기군을 휩쓸었다.

지원온 정홍기가 순식간에 패퇴하는 모습을 보며 도르곤은 이를 악물었다.

"패전 소식이 묵던에 전해지기까지는 얼마나 걸리겠는가?"

도르곤은 부하에게 말했다.

"예서 멀지 않으니 하루면 족히 소식이 들어갈 것입니다."

도르곤은 어디를 보는지 모를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서둘러야겠군."

이미 그는 패전 다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여우같은 범문정은 이 패전을 빌미로 다시 대권을 쥐려 들 것이다.

결코 그렇게 놓아둘 수는 없었다.

권력을 잡고 있다면 언제든 설욕할 기회는 온다.

그러나 권력에서 밀려나는 그 순간, 이미 패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자들처럼 영원히 치욕스레 기억되고 말리라.

권병을 탐하다가 몰락한, 무능한 역신으로 말이다.

도르곤은 결코 그 꼴을 볼 수 없었다.

< 맞수 (3)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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