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맞수 (2) >
조선군의 시선을 붙잡아놓는데만 집중하던 진강성 서쪽의 청군은 일제히 조선군이 공격을 가해오자 오히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패퇴했다.
그 틈을 제법 기운을 차린 훈련도감과 어영청 마병이 뚫고 나가니, 과연 진강성으로의 포위는 한순간에 풀리고 말았다.
진강성을 구원하는데 성공하며 수세에 몰린 쪽은 오히려 청군이었다.
이미 성을 두고 싸우는 것이 글렀음을 깨달은 도르곤은 망설이지 않고 군대를 뒤로 물렸다.
"청군이 온정평(溫井坪)으로 물러났사오이다."
진강성에서 압록강의 지류되는 사하(沙河)를 따라 올라가면, 양쪽에 산등성이가 펼쳐친 들판의 초입에 들어선다.
이 들판은 누런 갈대 사이에서 온천이 솟는다 하여 온정평이라 불리니 훗날 조선 사신들의 연행록(燕行錄)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지명이다.
청군이 이곳으로 물러난 이유는 누가 봐도 명백했다.
"한바탕 회전(會戰)을 유도하는 모양이 아니오이까."
부원수 임경업이 근심스레 말했다.
몇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청군은 여전히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훈련도감과 어영청, 북방군에 진강성에 갇혀 있던 가도군까지 불러왔지만 평야에서 펼쳐지는 회전에서 힘대힘으로 맞붙으면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허나 응해주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도원수 유림은 그러나 단호했다.
"진강성은 지켰으되 압록강에 면한 조그마한 성일 뿐이요, 아직 적들의 손에 동팔참 대개가 들어가 있지 않소. 우리 또한 봉황성에 이르는 130리 땅을 수복하지 않고서는 돌아갈 수 없소."
지난 3년간 진강은 조선의 역량을 기울여-그리고 키리시탄들의 피와 땀에 힘입어-훌륭한 전초기지로 조성되었다.
쓸모없는 땅을 지키고자 공연히 군대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청군을 추격하며 온전평에 들어선 조선군은 다시 목책을 세우고 분주히 싸움 준비에 나섰다.
"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포진(布陣)하시지요."
몇 차례 툭툭 건드리는 청군을 물리치고 돌아온 이자원이 제안했다.
"훈국 병력 절반과 가도군이 중앙을, 좌익을 어영청과 북병이, 우익을 나머지 훈련도감 병력이 맡는 것이오이다."
이자원의 의견에 유림이 의문스럽게 물었다.
"훈련도감의 병력이 3천, 어영청 병력이 2천, 북병이 4천인데 그리되면 우익이 너무 불리하지 않겠소?"
도성에 일부를 남겨놓고 온 까닭에 현 병력은 그정도다.
유림이 묻자 이자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노림수이오이다."
모두 합쳐 1만 5천에 달하는 조선군, 가도군과는 달리 청군은 팔기와 녹영을 모두 합해 5천 수준.
이런 상황에서 군대를 운용하기 위해선 이쪽의 허점을 파고 드는 수밖에 없다.
그 도르곤이라 할지라도 다른 방법은 없을 것이다.
"과연, 허허실실(虛虛實實)의 계책인가."
유림은 이자원이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1천 명 조금 넘는 훈련도감만으로 적들의 공세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중군."
"예, 대장 영감."
이자원이 말하자 훈련중군 김충선이 대답했다.
"가능하시겠소?"
"물론이오이다."
김충선은 그간 얼마나 훈련도감이 맹훈련을 해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 자신만만한 말투에 좌중에는 놀라움이 감돌았다. 물론 아군이 반격에 나설 때까지 버티는 것 뿐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1500명으로 청군의 공세를 감당하겠다니.
"그리만 된다면 이번 전쟁의 수훈(首勳)은 그대의 몫이 될 것이오."
이자원의 말이 떨어지자 가만히 지켜보던 봉림대군이 나섰다.
"잠깐, 우리 어영청에 맡겨주시지요."
"어영청이······?"
훈련도감이 나설 때는 그저 반신반의 수준에 머무르던 유림과 임경업이 놀라 말했다.
그러나 이자원은 별로 당황한 기색없이 봉림대군을 바라보며 말했다.
"반드시 지켜야 하오이다, 대군 대감."
"군령장(軍令狀)이라도 쓰겠소."
봉림대군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인 주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장까지 나아왔으니 대공(大功)을 세워야 할 터였다.
그러나 이제까지 뒷짐지고 앉아 있었을 뿐, 그는 한 일이 없었다.
이번 기회에 어영청도 훈련도감에 못지 않은 군영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대군께서 저리 말씀하시니 한번 맡겨 보심이 어떠한지요."
유림은 고심했다.
그는 봉림대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다만 대군께서는 인조대왕의 적자로 감히 산계(散階)를 매길 수가 없는 무품(無品)의 왕자군이 아니십니까. 모쪼록 본영(本營)에 머무르시고, 어영대장만 보내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어영청 군사들과 고락을 함께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혼자 안전한 곳에 숨어있겠소?"
훈련도감의 전적에 기가 죽은 것은 죽은 것이고, 무에 조예가 깊은 군주로 이름을 남긴 그답게 호기(豪氣)를 뿜어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자원은 조용히 박철균을 불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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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세를 정탐한 결과 조선군의 우익이 허술하옵니다."
수크사하와 도이격 등 도르곤의 부하 장수들은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이번 회전에서 이길 수 있다면 그 모든 실책은 뒤집을 수 있다 생각하며.
"허면 이리로 온 병력을 집중하면 되겠군. 그렇지 않은가?"
도르곤의 말투는 평온했지만 막사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신들의 판단에 이번 싸움을 맡기겠다는 뜻일까.
도이격의 등에 땀이 축축하게 배였다.
"······그러하옵니다."
하지만 이제 와 말을 바꿀 수도 없는 일.
도이격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일 그대가 양백기와 녹영을 앞세워 들이치도록. 그대의 말처럼 허술한 우익을 물리치고 조선군을 붕괴시키란 뜻이다."
"그, 그리 하겠나이다."
군략 회의가 끝나자 제장들은 이내 모두 막사에서 물러갔다.
단 한 명, 수크사하만 빼놓고.
"무슨 일이냐?"
도르곤은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말했다.
"정말 이대로 구사 어전이 조선군을 격파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천만에."
도르곤은 어둠과 적막이 내려앉은 막사를 바라보았다.
그 너머로는 청군들이 분주히 저녁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고, 멀리 갈대가 펼쳐진 벌판 반대편에 포진한 조선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진중(陣中), 조선군의 지휘관 막사에서 있을 이자원도 자신처럼 건너편을 노려보고 있을까.
"이것은 계략이다."
도르곤은 나지막이 말했다.
제 목덜미를 내어주는 체하며, 뒤로 숨긴 손에는 비수를 들고 있을 자가 이자원이다.
명백히 허술해보이는 우익은 미끼에 불과하다.
"하오면 어찌 구사 어전에게······."
"우리가 속아주는 척을 해야 조선군이 방심하지 않겠는가."
도르곤이 말했다.
도이격과 양백기는 조선군의 거미줄에 걸려드는 것처럼 보이게 할 조공(助攻)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어디로 치고 들어가야 하는가.'
중앙을 일점돌파(一点突破)한다면 좋겠으나, 조선군이 그리 놔두지 않을 것이다.
분명 든든히 목책을 세워놓고 청군을 맞으리라.
"허면 좌익이다."
도르곤이 선언했다.
우익에 조선군의 눈길을 잡아놓고, 저들이 움직일 손 친다면 단숨에 숨통을 끊어놓는다.
"이미 온정평으로 물러나기 전 묵던에 사람을 보내놓았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응원군이 지척에 이르렀을 것이다.
도르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자, 이자원. 어찌할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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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자마자 청군 진영에서 울려퍼진 격렬한 화포 소리에 조선군은 몹시 긴장했다.
그러나 초연은 한두줄기 피어오를 뿐, 포탄은 몇발 날아오지도 않았다.
"그나마 전부 갈대숲에 처박혔사오이다."
"오랑캐들이 화기(火器)에 능숙하지 못하니 그럴만하오."
봉림대군이 말했다.
원래 역사의 남한산성 공방전 때 청군의 홍이포 맛을 단단히 봤던 조선 조정이 들었다면 기가 막힐 이야기였지만, 이자원으로 인해 조기에 수성전이 끝난데다 당시 강화도에 있었던 봉림대군은 그 사실을 몰랐다.
"아무래도 청군의 화약이 다 떨어진 것 같사오이다."
어영대장 이완은 굳이 대군의 착각을 들추지 않고 말했다.
그의 상관은 처음으로 참여한 전투가 긴장되는 듯 손에 땀을 잔뜩 쥐고 있었다.
"그렇다면 희소식이 아니오? 저들의 공세를 물리치는 것은 쉬울 것이 분명하오."
이 시대, 화포는 어디까지나 공성과 수성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기동성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몇년 전 죽은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조차 경량화된 야전 포병대의 운용을 위해 노력했으나 큰 실효를 거두진 못했다.
그러나 얼마 전 진강성 인근에서 진채를 두고 공방전을 펼칠 때는 성을 공략하던 화포를 대거 이쪽으로 전용한 탓인지 청군은 제법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나섰다.
이완도 수없이 날아드는 포탄에 가슴이 섬뜩한 적도 있지 않은가.
이젠 다 동난 모양이었지만.
"호기(胡騎)가 달려오고 있사오이다!"
"시작인가!"
이완이 벌떡 일어서서 들판을 바라보니 팔기가 갈대를 이리저리 짓밟으며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흥, 이따위 물건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냐!"
거마창과 질려를 깔아놓았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팔기군은 마구 소리치며 장애물들을 뛰어넘었다.
이완은 굳은 표정으로 지휘했다.
이미 지난 호란에서도 저런 장애물들이 결정적인 저지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가 믿는 것은 그간 죽을만큼 훈련을 받아온 살수대의 운용이었다.
"쏘아라!"
- 타타탕!
청군이 사거리 안에 들어오자 이완의 명령과 함께 미리 장전해놓고 있던 포수들이 총탄을 놓았다.
"사수들은 무얼 하는가!"
포수들이 장전에 나선 사이 사수들이 화살을 쏘고, 곧장 살수들이 목책에 붙어 방어에 나섰다.
목책에 도달한 청군은 살수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완은 자신이 있었다.
"함부로 죽을 자리로 들어오는구나!"
어영청 병사들은 마병들과 함께 진채 지키는 훈련을 수없이 해보았다.
적어도 훈련도감에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팔기는 도저히 안되겠는지 다시 물러났다.
그 뒤로 몇번씩 재돌격해와 목책을 두들길 때였다.
- 휘익!
목책으로 방비되지 않는 우측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조선놈들을 죽여라!"
녹영병들이 어영청군의 우측에 있는 산을 타고 넘어와 치고 들어온 것이다.
"뭣이!"
이완이 눈을 크게 떴다.
험산준령(險山峻嶺)은 아니지만 기병이 움직이기엔 불편하여 딱히 방비를 충실히 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도이격은 그곳을 통해 녹영병을 내보낸 것이다.
이완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니 소수였지만, 정면에서 팔기를 맞고 있는 어영청군이 어지러워지기엔 충분했다.
"뚫렸구나!"
방심의 대가는 참혹했다. 살수대의 손발이 어지러워지며 청군이 기어이 목책에 돌입했고, 든든한 방벽이 무너지며 선두에 서있던 어영청군은 도륙당했다.
"원앙진을 펼쳐라!"
이완이 명령했다.
살수대는 이완의 명을 듣자 곧장 진을 펼쳤다.
지난 3년간 이완이 매진한 덕이라고나 할까, 목책이 무너졌음에도 그들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이미 오랑캐들은 우리군에게 걸려든 것이나 다름없다! 지원군이 오기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느니라!"
이완이 소리쳤지만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기효신서나 연병지남에 의거해 병력을 운용하는 어영청은 원앙진을 또한 대기병용 진으로 사용하고 있다.
효과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훈련도감이 펼치는 장창 방진에 비해 실전에 있어 대기병 저지력은 매우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도이격은 그 점을 매우 잘 파고 들었다.
"대군 대감."
이완이 침통하게 말했다.
"왜 그러시오?"
이완은 봉림대군의 손을 부여잡았다.
"지금 응원군이 오고 있을 것이오이다. 말을 타고 본영으로 가 합류하소서."
자신은 마지막까지 버틸 작정이었지만, 봉림대군은 이 혼전 속에서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이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찌 살아서 주상 전하의 얼굴을 볼 수 있으랴.
아니, 죽어서도 선대왕의 낯을 보지 못할 판이었다.
"오랑캐들은 경거망동하지 말라!"
그때 어영청군의 뒤에서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맞수 (2)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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