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맞수 (1) >
착각이 아니었다.
눈 앞의 이자원은 상상이 아니라 실체였다.
"크윽!"
이자원에게 달려들던 청군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정확히 환도로 목을 쳐버린 이자원은 시로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쳐 청군들을 도륙했다.
진중에 돌입한 조선군도 마찬가지였다.
"쇼군······!"
시로가 흔들리는 눈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외쳤다.
도대체 자신들의 위기를 어떻게 알고서 찾아왔단 말인가.
혹여 저 성경 속 성인(聖人)들이 그러했듯 신의 계시라도 받은 것인가.
하필이면 시로가 목격한 이자원은 휘영청한 달빛을 등지고 있던 터라, 그 성스러운 모습에 시로의 의심은 확신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물론 이자원은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고, 하늘의 계시에 의해 이들을 구원하러 온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신이나 성인과는 훨씬 떨어져있는 종류의 인간으로부터 받은 첩보 덕분이었다.
"조선군이 어떻게 여기에 왔느냐!"
"우리군이 적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
청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그 의구심을 미처 해결하지 못한 채 목을 내놓아야 했다.
반면 가도군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살았다!"
"조선의 지원군이 왔다!"
시로와 키리시탄들은 카타나를 휘두르며 길을 열었고, 가도군들은 서로 뒤엉켜 허겁지겁 진강성을 향해 퇴각했다.
"바보 같은! 놓치지 마라! 추격해라!"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수크사하가 외쳤지만 적절한 시점에 치고 들어온 조선군이 추격을 모두 끊어놓고 있었으니 제대로 명령이 먹힐 턱이 없었다.
"저자가 적장인가 보군. 누가 목을 가져오겠는가?"
이자원의 눈길이 닿자 마병별장 황익이 나서서 외쳤다.
"소관은 이곳에 남아 마병들을 통솔하겠나이다!"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인물이니 이자원도 그더러 나서라 할 생각은 없었다.
제발 저린 황익을 대신해 누군가가 나섰다.
"소인에게 맡겨 주십시오."
나선 이는 기골이 장대하여 장사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자였다.
바로 지난 권대용의 난 때 공을 세웠던 안익신(安益信)이었다.
그의 용력(勇力)이 쓸만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휘하에 넣고 싶어하는 군관들이 많더니, 마병으로 소속을 옮긴 모양이었다.
이자원은 기다렸다는 듯 나선 안익신을 눈여겨보았다.
천민 출신이라 하나 기운이 셀 뿐만 아니라 야심이 있는 자다. 그러니 원래 역사에서 권대용과 결탁해 난을 일으켰겠지만.
"좋다. 네가 가도록 하라."
이자원의 허락이 떨어지고, 안익신은 곧장 수크사하가 있는 쪽으로 말을 달렸다.
"이 더러운 오랑캐들아! 우리가 순순히 당해줄줄 알았더냐!"
"지원군이 왔다! 우리군을 구하라!"
한편 상황이 반전되자 진강성 쪽에서도 병력이 뛰쳐나와 도망해들어오는 제 동료들을 엄호했다.
그 모습을 본 수크사하는 이를 빠득 갈았다.
"호장(胡將)은 내 칼을 받으라!"
그때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한무리의 조선군을 발견한 수크사하는 숨을 삼켰다.
선두에 선 이가 외치는 말은 당연히 조선어였기에 그가 알아듣지 못했으나,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조선놈 따위가 나를 노리려 하는가?"
수크사하도 대청의 장수.
조선인 가운데 무예가 뛰어난 자가 있다 하나 감히 만주의 전사에게 맞설 바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시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개인의 무력으로는 결코 남에게 지지 않을 만한 인간이었으나 이처럼 군세가 한번 꺾인 상황에서 그가 적들에게 직접 맞서는 것은 무모한 처사였던 것이다.
부하들은 수크사하의 말고삐를 잡아 그를 말렸다.
"장군, 어서 몸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선은 이 자리에서 물러나 상황을 수습하시지요."
수크사하는 멍청한 자가 아니다.
피솟는 화를 진정시킨 그는 이를 갈며 물러났다.
말머리를 돌리는 모습을 본 어영청 마병 하나가 활을 집어들었다.
- 휘익!
그가 쏜 화살은 수크사하의 투구를 맞추었다.
"쯧, 역시 활은 쓸모가 없구만!"
안익신은 그 광경을 보고 혀를 크게 찼다.
그러나 의외로 투구끈이 묶인 모양이 허술했던지, 수크사하의 투구가 벗겨져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눈에 띄었다.
수크사하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노려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말을 달렸다.
"제길, 꿩 대신 닭이로구나. 저 투구라도 노획한다!"
안익신이 투덜거렸다.
막상 맞붙었을 때 이길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지만 안익신은 다 잡은 고기를 놓쳤다는 생각에 입맛을 다셨다.
곧 수크사하의 투구를 집어든 안익신은 거세게 외쳤다.
"적장의 목을 베었다! 적장의 목을 베었다!"
기운이 셀 뿐만 아니라, 원래 역사에서 그 일면이 드러났듯 음험하고 잔꾀를 부리는 구석이 있는 안익신이다. 그 짧은 시간에 헛소문을 퍼뜨릴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어로 외치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자는 청군 내에서 몇 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청군 사이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대장이 죽었다!"
"조선군이 우리 대장의 목을 베었다, 다 끝장이다!"
조선어로 들려온 소리를 능숙한 만주어로 되풀이하여 외치고 다니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청군 내의 조선인 부대, 솔호 니루였다.
같은 편이 그렇게 소리치자 청군의 사기는 수직낙하했다.
안익신이 얻은 것은 빈 투구에 불과했지만 창대에 매달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니 정말 수크사하가 죽은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 조금의 틈을 놓치지 않고 돌입한 이자원의 부대는 순식간에 청군들을 헤집어놓았다.
도르곤의 책략은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나며 실패하고 말았다.
===
이자원은 도르곤이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음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단순히 조선군을 압박한다고 하기엔 녹영병을 앞세워 거세게 몰아치는 청군이었다. 도르곤이 아무런 전망도 없으면서 제 군대의 생목숨을 밀어넣을 자는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조선군의 시선을 잡아놓고 있는 사이 어디론가를 통해 이득을 보려 들 것이고, 곧 목표는 진강성이 될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이자원이 날고 긴다하여도 최후의 보루인 진강성이 무너지고 군민(軍民)이 도륙당한다면 진강을 포기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허나 언제, 어떻게 진강성을 추동(推動)하려 들지가 문제로군.'
진강성은 조선군과 떨어져 고립된 상황이었으니 연통이 간간히 이루어지고 있으되 바로 보고를 받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도르곤이 잔꾀를 부린다 해도 차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그의 고민을 해결한 것은 녹영이 재차 공격을 감행해왔을 때 사로잡힌 조선인 출신의 청병(淸兵)이었다.
'저희 장군께서 이것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의 품속에서 나온 편지 한장을 받아본 이자원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구왕이 오늘밤 진강병을 꾀어내려함」
'누가 보낸 것이냐?'
'녹영 부장(副將)이신 한윤 장군께서 보내셨습니다.'
한윤이라는 말에 제장들이 의구심 가득한 눈초리로 말했다.
'한윤은 진작부터 오랑캐에 복배(伏拜)한 간흉입니다. 이것이 적들의 꾀일줄은 어떻게 알겠사오이까?'
'대장 영감께서 적들을 계책으로 속이신 것처럼, 저들도 대장 영감을 유인하려는 속셈이 분명하오이다.'
그러나 이자원은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계책이라면 좀 더 믿을만하게 적었겠지.'
한윤은 팔기에서 쫓겨나 녹영으로 좌천된지 오래다. 그곳에서 갖은 고생도 하고 있다 들었다.
이것만큼 적을 속이기 좋은 배경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도르곤이라면 한윤의 구구절절한 사정을 모조리 적었을 것이다.'
그것이 적으로 하여금 자신을 믿게 만드는 사항계(詐降計)의 기본.
한윤과 한택이 지금 청에서 겪고 있는 간난신고(艱難辛苦)를 설명이라도 했을 터다.
하지만 한윤이 보낸 편지의 내용은 간명했다. 오로지 도르곤이 오삼계를 속였으니, 이들을 구하고 싶다면 군사를 내라는 것 뿐이었다.
마치 믿을거면 믿고, 말라면 말라는 것처럼.
과연 이자원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들었다.
"한윤, 이 자가 무슨 생각일 것 같은가."
한윤에게 있어 조선은 아버지의 원수고, 반간계를 펼친 이자원은 자신의 원수다.
헌데 정말 진짜 정보를 넘겨 주다니.
"조선에 다시 귀순하겠다는 뜻이 아니겠사오이까."
황익이 희망을 담아 말했지만 이자원은 고개를 저었다.
과연 그럴까.
'단지 악에 받혀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것인지······.'
"투항했던 한윤의 부하를 불러오라."
이자원이 말했다.
===
오삼계는 이자원이 진강성에 입성하자마자 달려나와 무릎을 꿇었다.
그는 눈물을 짜내며 이자원 앞에 부복했다.
"총병 대인, 속하의 불찰로 적의 간계에 걸려들었으니 드릴 말씀이 없나이다!"
피를 토하듯 절절한 사죄였지만 이자원에게는 별 감흥이 없었다.
오삼계가 엎드린 상태에서 되도록 티나지 않게 이자원을 힐끔거리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심기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과연 역사에 이름이 남은 한간(漢奸)이라고나 할까.
"진강성을 이때까지 지킨 공을 보아 넘어가겠다."
이자원은 짤막하게 그리 대답했다.
"총병, 속하가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그러나 오삼계는 여전히 머리를 바닥에 쿵쿵 부딪치며 연거푸 사죄했다.
이자원은 안색을 살피지 않고도 그의 심기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기껏 목숨을 걸고 진강을 지켰더니 공과가 상쇄되는 꼴은 보지 못하겠다 이거군.'
오삼계는 공명심(功名心)과 보신주의(保身主義), 양쪽 모두가 강한 인간이다.
자신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에는 공명심이 앞서고, 할 수 없는 일에는 망설임없이 복지부동(伏地不動)을 택한다.
쉽게 말해 감탄고토가 능숙하다는 뜻이었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러 판단을 잘못 내리면 그간의 공든 탑을 한번에 망치는 종류의 인간.
마치 강희제에게 맞서 삼번의 난을 일으켰을 떄처럼.
지금 도르곤의 계책에 걸려든 것도 그 오판이 초래한 결과였다.
이런 자의 상관으로 있자면 적절히 풀고 조여 양자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했다.
겉으로는 사죄지만 실상은 시위나 다름없는 연극에 어울려줄 만큼 이자원은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다.
"······."
이자원이 말이 없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당장이라도 죽을듯이 머리를 쿵쿵 찧던 오삼계는 이자원이 그 침묵에 당황했다.
서서히 빈도가 줄어들더니 끝내는 이자원을 슬며시 올려다보는 오삼계다.
"이제 포위마저 풀리었으니 적에게 남은 것은 결전 뿐이다."
기강을 다잡은 이자원은 오삼계에게 말했다.
오삼계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거기서 공을 세워라."
이자원을 바라보는 오삼계의 눈이 흔들렸다.
무슨 말을 하든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속하에게 무엇이든 명해주소서. 반드시 설욕을 하겠나이다."
오삼계가 힘없이 말했다.
===
"이런······ 무능한!"
도르곤이 신발을 벗어 던졌다.
믿었던 수크사하마저 패한 것이 아닌가.
도이격이나 수크사하가 패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도르곤의 머리에서 나온 계책을 따랐기 때문이었지만, 자신이 직접 나섰다면 양상은 달랐을 것이라 믿었다.
"도대체 조선군이 어찌 알고 쳐들어왔단 말이냐?"
굳이 그렇게 물어보는 도르곤이었지만 스스로도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일단 그놈들부터 처리한 뒤 마지막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도르곤은 차가운 눈빛을 던지며 말했다.
"앞으로 한 싸움에 동팔참의 명운이 달렸다. 제장들은 정신차리고 싸움에 임해라!"
도르곤이 뇌까리고 있던 그 시점, 김충선이 이끄는 훈련도감과 어영청군은 압록강을 넘었다.
< 맞수 (1) > 끝
ⓒ 핏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