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각살우 (8) >
"내가 너희를 부른 이유를 알겠느냐?"
남자의 물음에 한윤과 한택은 납작 엎드렸다.
"소인들은 천한 고려(高麗)의 족속으로, 선황의 지극한 은혜를 받아 과분한 관직을 얻었을 뿐이니 대왕 같은 분께서 어찌 저희를 찾으셨는지 미욱한 머리로 알지 못하겠나이다."
홍타이지가 살아있었을 때는 잘란 어전으로서 청 제국 전체에서도 높은 지위를 누렸던 한윤이다.
그러나 이미 그런 호시절은 모두 지나가고, 도르곤 집권 이후 영예고 권세고 모두 떨어져 천직(賤職)이라 불릴만한 곳으로 나앉은 판이었으니 과분한 관직 운운은 그저 빈말에 불과했다.
이를테면 내가 그런 네놈 때문에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 식의 비꼼이었다.
한윤의 말에 박혀있는 은근한 가시를 눈치채지 못할리 없는 도르곤이었으나, 그는 한갓 조선인 군관에게 화를 내며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보이는 대신 핵심을 찔렀다.
"너희가 한께서 친정하시는 새 천하가 열리고 나서 불만을 품고 있음을 내 알고 있다."
직설적으로 그리 말하는 도르곤에게 한택은 숨을 헙 삼켰다.
과연 말 한마디로 사람 목숨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이 자가 무슨 짓을 하려 하길래 이리 나오는 것인가.
"한께서 보위에 오르신지가 몇년인데 이제 와 불만을 품겠나이까. 오직 그 옆에서 사갈(蛇蝎)처럼 득시글거리는 무리가 눈꼴이 실 뿐입니다."
한윤은 그리 조롱했다.
강덕제 쇼서의 옆에 있는 자들이라면 단연 군기대신을 겸하고 있는 도르곤을 겨냥해 한 말이 아니겠는가.
당연히 끈떨어진 녹영의 항장 따위가 대청의 친왕(親王)에게 이리 달려드는 것은 죽을 죄였지만, 한윤은 죽을 때 죽더라도 도르곤에게 굽히지는 않겠다는 태도였다.
옆에 있던 한택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감히!"
듣다못한 수크사하가 칼을 들이댔다.
도르곤의 부하로서 그는 이런 조롱을 참아 넘길 수가 없었다.
"잠깐."
그때 도르곤이 손을 들어 수크사하를 제지했다.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다. 비록 말직에 있는 고려 봉자 따위가 대청의 친왕과 중신들을 모욕한 죄가 실로 해량(海諒)하기 어려운 것이라 해도, 말이다."
자신을 간신, 역적으로 몰아붙인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도르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거기에 이어 너희들이 내 명령을 따라 일 하나를 잘 해내어준다면 본래 있던 정홍기로 복권(復權)을 시켜주마. 이만하면 꺾이었던 너희들의 마음이 다시 옳은 곳으로 향하겠느냐?"
도르곤은 한윤이나 한택이 무슨 호거에 대해 대단한 의리를 지닌 자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한윤이 도르곤에게 이리 불손하게 나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벌인 숙청 과정에서 떨려나갔기 때문.
도르곤의 말은 옛 일을 잊어버리고 재차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과연 한택은 그 말을 듣자 얼굴에 생기가 감돌았다.
녹영에서 말이 군교이지, 실상 잡부 취급이나 받고 있는데서 벗어나 어찌 되었든 다시 팔기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대왕, 소인들은 죄인이나 다름없사온데 이리 기회를 주시니 백번 죽어도 바라기 어려운 일입니다!"
숫제 바닥에 얼굴까지 처박고 외치는 한택을 내려다보며 도르곤은 한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생각도 아우와 같으냐?"
"······예친왕께서는 쇼토를 장차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퍽 누그러진 말투였다.
그 말에 도르곤은 픽 웃었다.
"그 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인가."
아직 쇼토에게 앙금이 남아있거나, 혹은 정홍기로 돌아갔을 때 쇼토가 돌아와 그들을 핍박하는 것이 걱정되는 것이리라.
어느쪽이든 도르곤의 대답은 간명했다.
"그자는 더이상 내게 쓸모가 없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느니라."
호거와 한창 힘겨루기를 할 때에는 그가 이끌고 있던 정홍기와 양홍기가 큰 힘이 되었다.
그렇기에 무리수를 둬가면서 쇼토를 옹호했지만 그는 이미 힘을 잃었다.
그 두 기가 다이샨의 후처 나라하라 씨 소생 아들들에게 들어간 이상 되찾아오기도 힘들었다.
오직 의리만으로 다시 정홍기와 양홍기를 빼앗아 쇼토에게 쥐여주기엔, 도르곤은 너무나 냉정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너희는 내게 아직 쓸모가 있다. 기회는 한번 뿐이다. 할테냐, 말테냐."
정확히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리까지 말하는데 한윤이 더 버틸 재간이 있겠는가.
아우인 한택도 한윤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받들겠나이다."
결국 한윤은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 말했다.
도르곤은 곧 그들을 이용할 계책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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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소제(小弟)가 무어라 했사오이까. 버티다보면 또 한번 솟구쳐 오를 날이 올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무려 저 예친왕의 동앗줄을 잡을 기회입니다. 두번 다시 오지 않을 튼튼한 동앗줄입니다."
한택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드디어 이 생활을 청산하고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사실에 그는 몹시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윤은 그런 사촌동생을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처음 태종(홍타이지)의 곁에 있었을 때는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태종이 붕어하시고 나자 어찌되었느냐? 쇼토 따위의 책임 떠넘기기에 우리 형제의 신세가 이 꼴이 되지 않았느냐?"
쇼토에게 배신당하고, 도르곤에게 핍박받는 과정에서 그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바로 그들처럼 애신각라의 피를 물려받지도 않았고, 이방인에 불과한 자들은 얼마든지 쓸려나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알고 있는 이상 그는 도저히 이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도르곤이 일이 끝나고 나면 과연 우리를 중히 쓸 이유가 있을까.'
한윤이 생각했다.
'조선에 있든, 청나라에 있든 결국은 권병을 쥔 자들의 속셈을 채우기 위해 놀아날 뿐이다. 거기에 끼지 못하면 처참하게 숙청당할 뿐······.'
한윤은 눈을 번득이며 한택에게 말했다.
"우리 솔호 니루 출신 녹영병 가운데 믿을만한 자들로 몇을 추려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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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이제까지 그리하였듯이 저희 교인들에게 강복(降福)하시고 은총으로 지켜주소서."
아마쿠사 시로는 묵주를 손에 쥔 채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그의 뒤로 선, 백여 명 가까운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카타나(刀)를 차고 꿇어 앉아 묵묵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1차로 조선에 도착한 키리시탄들은 대부분 동북(東北)으로 보내졌다.
조선과 닝구타 간의 개시가 활발히 일어나고, 또한 정착한 곳이 평야 지대였기에 지독한 추위를 제외하고는 어려움없이 개간에 성공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진강을 차지한 후, 동팔참 일대를 조선의 방패로 삼기 위해 이자원은 그 뒤부터 건너오는 키리시탄들을 진강으로 보냈다.
조선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는 소식에 수없이 건너왔던 키리시탄들이다. 지난 3년간 건너온 인원이 무려 1만 명. 십자가를 쥔 이라면 누구나 조각배에라도 의지해 조선에 건너오려고 했던 까닭이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는 판이었으니 좋든 싫든 그들은 조정의 시책에 군소리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규슈에 살던 이들 키리시탄에게는 동팔참의 추위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얼어죽었다.
감자와 고구마의 보급, 요동에 맞는 농법과 조선 조정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인해 그보다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고, 본격적으로 개간이 이루어지자 힘겹게나마 정착할 수 있었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심심하면 북방에서 쳐들어오는 여진족들이었다.
청이라는 나라가 바로 위에 버티고 있는 그들로서는 시도 때도 없이 칼을 쥐고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곳 진강의 다이묘-오삼계를 말함이다-는 쇼군의 측근으로 제법 군사적 수완이 있는 이였지만,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저 이교 오랑캐 무리는 우리가 정착한 조선의 적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적이기도 하오. 우리는 저들의 털끝만큼도 먼저 건드린 적이 없거늘 수시로 마을에 쳐들어와 약탈을 벌이고 우리의 여인을 범하며 성상을 모욕하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아마쿠사 시로는 일본도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오늘 다이묘의 명에 따라 오랑캐들을 토벌하고 우리 땅을 되찾을 것이오!"
"Deus Vult(신께서 원하신다)!"
"Deus Vult!"
가톨릭 신도들이라 하나 모두가 라틴어에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한 마디, 데우스 불트만은 그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었다.
바로 이 조선이 십자군 국가이므로, 그들 또한 십자군이 아니겠는가.
터무니없는 오해였지만 북방에서 저희들끼리 모여살던 일본인들의 착각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자원 또한 굳이 그것을 풀어줄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 끼익
육중한 진강성의 성문이 드디어 열리고, 일본인들은 칼을 쥐고 천천히 대열을 이뤄 달리기 시작했다.
성루에 올라 그 모양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오삼계가 말했다.
"왜인(倭人)들이 칼을 잘 쓰는 것이 마치 여진이 말을 잘 타는 것에 못지 않다. 너희들이 북서쪽에서 내응한다면 적은 반드시 무너져내릴 것이다."
"옛날 이괄의 휘하에도 항왜들이 있었지요. 소관도 알고 있사오이다."
오삼계의 옆에 서있는 자는 변발은 했으되 유창한 조선어를 내뱉었다.
지난 몇년간 조선어를 익혀온 오삼계는 통역 없이도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서쪽 포위망이 얇아졌기에 그쪽으로 치고 나가려 했더니, 오히려 함정이었다라. 너희의 내투가 아니었다면 큰일이 날 뻔했다."
오삼계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전날 한윤과 한택이란 자가 연명하여 사람을 보내기를, 이미 조선군이 도달하여 청군을 크게 깨뜨렸고 그 뒤 이어진 싸움조차 지지부진하므로 투항하기를 원한다 하였다.
마침 포위망의 취약한 부분을 뚫어보려던 오삼계는 함정이라는 그들의 말을 듣고 대경했다.
정말 오삼계가 병력 일부를 보내 건드려보니 실로 순식간에 청군이 덮쳐들었던지라, 오삼계는 한윤의 말을 신뢰하게 되었다.
"자, 한번 두고 보도록 하자. 일이 어찌될지."
===
"이 불신자들아! 주님의 칼을 받아라!"
시로의 일본도가 미친듯이 녹영병의 등을 갈랐다.
일본인들과 함께 그 뒤를 따르는 가도군들이 뚫고 들어갔다.
이전의 야습으로 다른 곳의 제법 경계는 삼엄한 듯 했지만 목적지만큼은 과연 사전에 들은대로 적진에 혼란이라도 일어난 것인지 제대로 된 대응이 없었다.
"코노야로(이 자식)!"
한참 적을 베어넘기던 시로는 문득 인상을 찌푸렸다.
얼굴에 튄 피 때문은 아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불안감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 두두두두
팔기의 말발굽 소리였다.
"오랑캐들! 설마!"
시로가 경악했다.
설마 이것이 범 아가리에 들어간 꼴이었단 말인가.
"전부 죽여라!"
말을 탄 팔기들이 창칼을 휘두르자 가도군들은 우수수 죽어나갔다.
"끄악!"
"이 왜굴(倭窟)의 떨거지들아!"
팔기들은 미친듯이 적을 짓밟았다.
순식간에 휩쓸린 시로는 군사들이 차례차례 쓰러져가는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후, 후퇴해야!"
하지만 시로는 더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이대로 끝인가!'
시로는 낭패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장인을 희생하면서까지 조선의 도움을 얻어 다시금 복음을 전하려 했건만, 저 북방 오랑캐들과 싸우다 죽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었단 말인가.
신기하게도 마지막 순간에는 아내도, 자신을 지지해주었던 장인도 아닌 도성에서 잠깐 만난 쇼군-이자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달빛을 등져 마치 예수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후광(後光)이라도 떠오른 모양새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시로는 눈을 크게 떴다.
< 교각살우 (8)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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