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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15화 (115/213)

< 교각살우 (7) >

"죽여주십시오, 기주(旗主)! 조선놈들에게 두번이나 패했으니 실로 면목이 없습니다!"

부복한 사내가 변발한 머리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바닥에 이마를 찧어댔다.

이쯤하면 무슨 말이라도 할 법하건만, 도르곤은 그저 싸늘하게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대왕, 이자원이 이리 일찍 도달했을줄 누가 알겠습니까. 구사 어전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수크사하가 도르곤의 소매를 붙잡았다.

"묵던에서는 승냥이 같은 자들이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다. 정 적에게 걸려 들었다 싶었거든 군대를 거두고 물러날 일이지 어찌 성급히 맞섰느냐?"

도르곤은 서늘하게 분노를 내뿜었다.

홍타이지 시절에는 은근한 감시 아래 살았고, 호거가 집권하자 그에게 밀려 대권을 잡지 못했다.

범문정이 권력을 탈취한 그 짧은 순간에조차 그는 견제를 당해야만 했다.

발 한번이라도 삐끗하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판인데, 부하라는 자가 패해 돌아왔으니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도르곤은 호거처럼 악을 쓰거나 길길이 날뛰지는 않았다.

그래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뼛속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이격의 구사 어전 직을 박탈한다. 수크사하, 그대가 대신하도록."

도르곤이 말했다.

그 말에 옆에 서있던 수크사하조차 당황했다.

"대왕!"

"기주!"

오랫동안 양백기의 구사 어전을 맡아왔던 도이격이다.

그러나 도르곤의 말 한마디에 이 지위가 날아가게 생긴 것이다.

"명을 받들지 않고 무엇하는가? 도이격은 졸오(卒伍)로 돌아가라! 일개 전사로서 싸움에 임하도록."

'태조로부터 이어진 대업(大業)이 뿌리채 흔들리고 있는 이때, 한의 유업을 이을 사람은 나 뿐이다.'

호거는 청을 위기로 몰아넣다 못해 몽골까지 뜯어간 멍청이요, 강덕제는 한인인 범문정의 손에서 놀아다는 어린애일 뿐이다.

도르곤은 자신의 실패는 곧 청의 멸망으로 이어질 것이라 굳게 믿었다.

"더이상의 실패는 없다."

그렇기에 그는, 냉정하게 전세를 파악했다.

"양백기는 조선군 기병들에게만 당했다 들었다."

도르곤이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조선군이 우리와 싸우면서 단지 기병만 이끌고 왔을리는 없을 터. 후발대가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쳐야 한다.

아직 후발대가 도착하지 않았고 수백 리 먼 길을 달려와 지쳐있는 지금 적을 꺾어 놓아야 한다.

'하지만······.'

가능할까?

쌍령에서 보았듯, 조선군도 진채를 단단히 세우고 버티면 청군을 상대로 얼마든지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게다가 상대는 그 이자원이 아닌가.

팔기들을 몰아 진채로 돌격한다 해도 적들의 총화(銃火) 속에 타격을 입는 결말 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도르곤은 주먹을 떨었다.

'언제 이렇게 적을 꺼리게 된 것인가.'

열일곱에 처음 전장에 나간 이래로 천하에 적수가 없다 여겼건만.

"지순왕(智順王)."

도르곤이 말했다.

"예, 대왕!"

녹영병을 이끌고 있는 상가희가 잔뜩 긴장하여 대답했다.

본래는 공유덕과 함께 우전 초하를 이끌고 있었지만 공유덕이 건강을 핑계로 물러나며 홀로 우전 초하를 맡게 된 그였다.

이후 우전 초하가 녹영으로 확대 재편되면서 제독(提督)을 맡았다.

"녹영을 이끌고 조선군 본영을 들이치도록."

녹영병 대부분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요동에서 끌어모은 한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윤과 한택 형제처럼 팔기에서 방출된 일부 조선인, 한인들도 있었고 무엇보다 이전부터 존재하던 우전 초하 부대는 화포를 다루는데 능숙했다.

"우전 초하는 한조(漢朝)의 정병 출신들이 아닌가. 조선군과 총탄을 주고 받아도 능히 이길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대왕!"

실제로 자신이 있고 말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감히 저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도르곤 앞에서 어찌 안되겠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휘하의 사람 둘만 이리로 불러오도록."

도르곤이 말했다.

===

- 쉬이익

- 펑!

진강성 공략 때는 홍이포를 아끼라고 명령한 도르곤이었지만 조선군의 진채를 공격할 때는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북병이 들고 있는 일부 화포 외에는 제대로 대응할 수단이 없던 조선군은 묵묵히 포격을 견디며 적들이 돌입하기를 기다렸다.

녹영병들은 진군 중에 총탄과 화살에 쓰러지면서도 꾸역꾸역 진채 위에 올라섰다.

장창을 든 평안도군들이 마구 찔러대자 녹영병들이 비명을 질렀다.

"죽어라 더러운 조선 놈들아!"

"너희는 오랑캐에 빌붙은 돼지들이구나! 부끄럽지도 않은가!"

진채에서 서북군 기병대가 녹영병들의 대열을 돌파해 칼을 휘둘렀다.

이미 한바탕 총화(銃火)를 주고 받은 뒤 전력이 깎여있던 녹영병은 임경업이 이끄는 기병들의 돌격에 순식간에 짓밟혔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청군 팔기들이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다시 진채 안으로 들어가라! 다시!"

임경업은 서둘러 돌아갈 것을 명했다.

이자원이 이끄는 훈국과 어영청군은 기병 대 기병으로 양백기를 꺾었지만, 아직까지 북병은 그정도 기량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청군도 진채를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아,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져 들었다.

"적들의 포위를 뚫기가 쉽지 않사오이다."

부원수 임경업이 머쓱한 표정으로 유림에게 말했다.

도이격이 이끄는 양백기를 격파한 후 압록강 이북에 교두보를 마련하는데 성공했으니, 이제 진강성을 반포위하고 있는 청군을 뚫는 것이 순리였다.

청군은 진강성 북쪽의 산지와 서쪽의 평지에 진을 치고 공략 중이었는데, 조선군이 치고 들어가야할 방향은 후자 쪽이었다.

그러나 청군이 이쪽으로 공세를 퍼부으며 오히려 방어에 치중하게 된 조선군이었으니, 임경업의 답답함도 일리가 있었다.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적들을 뚫고 진강성을 구원하는 것이 어떻겠사오이까?"

임경업이 도원수 유림에게 간했다.

하지만 유림은 대답하는 대신 이자원을 보고 말했다.

"훈련대장의 생각은 어떠시오?"

따지자면 도원수는 유림이니 지휘권을 통일하자면 그의 명령을 듣는 것이 사리에 부합할 터였다.

그러나 엄밀히 유림의 관할은 서북군 뿐. 그가 총대장을 맡고 있다곤 하나 전력의 핵심인 이자원의 의중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도원수께서 주장이시니 소관들은 모두 도원수 대감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이자원 또한 의례적으로 그리 대답했다.

"다만 아직 후발대가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피해를 무릅쓰고 움직일 필요는 없어 보이오이다."

오삼계를 구원한다는 목적은 조선군이 압록강을 넘으며 이미 성공했다.

청군은 진강 공략보다는 조선군의 움직임에 신경을 쓰고 있었으니 말이다.

'도르곤, 정말 이런 공격으로 나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막무가내로 화력을 주고 받는 전투.

당연히 이런 식이라면 조선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지금이야 북병 뿐이지만 훈련중군 김충선이 한참 이끌고 북상 중인 훈련도감군과 어영청군이 합세한다면 상황은 달라지리라.

"전황은 아군에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하지는 않사오이다. 괜히 위험한 수는 쓰지 않는 것이 좋겠사오이다."

이완이 이자원의 말에 찬성하고 나섰다.

조선군이 전력으로 나선다면 청군 또한 결전(決戰)을 벌이기 위해 이쪽에 대대적으로 전력을 증강할 터인데, 그리되면 승패를 알 수 없다.

게다가 다른 문제도 있었다.

"전마(戰馬)의 소모가 심하오이다. 폐장(肺臟)이 망가져 죽은 말이 한두마리가 아니니······."

이완이 이어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까지 달려오는 동안 훈국과 어영청의 마병들은 말들을 바꾸었지만, 워낙 강행군이었던데다 그만한 전마를 수급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 자연 말들에게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

아민과의 뒷거래로 전마의 수급이 쉬워졌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만한 소모는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우리 병사들도 많이 지쳤사오이다. 여독을 풀려면 며칠간은 꼼짝없이 발이 묶여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지옥훈련을 받았더라도 피와 살로 된 인간이 아닌가.

먼 길을 움직인데다 전투까지 크게 치루었던 훈국과 어영청은 지금 싸움에도 동원하지 못한다.

"그럴만한 가치는 있었소."

북병 전체를 미끼로 삼아 기병전을 펼치지 않았다면 청군은 압록강을 틀어막는데 주력했을 것이고, 진강성은 벌써 함락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자원은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간 청군과 정면으로, 그것도 기병전으로 맞붙는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기습의 이점과 더불어 약간의 꼼수를 부리긴 했지만 이정도의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실로 고무적인 일이었다.

이번 싸움을 치른 장졸들 틈에 해볼만하다는 자신감이 붙은 것은 큰 성과였다.

'하나 더.'

평소 임금의 앞에서라면 확고하게 의견을 내어 놓았을 봉림대군은 입을 다물고 이자원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렇다면 작금은 형세를 굳히고 진강성과 통하며, 몰려드는 적들을 격퇴하는 것으로 하도록 하겠소."

유림은 그렇게 정리했다.

임경업의 주장처럼 무리하게 싸움에 나설 필요는 없게 되었지만, 이자원은 무언가 찜찜한 구석을 놓을 수 없었다.

===

"적들이 물러가는구나!"

실로 고비였다.

오삼계는 팔이 덧날 위험까지 무릅쓰며 직접 독전한 끝에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텼다.

그것이 불과 하루 전.

조선군이 강을 넘고 나서도 성 북쪽 산등성이를 차지한 채 공격을 감행하던 청군은 결국 병력을 돌렸다.

"부총병께선 실로 명장이십니다."

"저 구왕(九王)의 병력을 상대로 이만큼 선전하실 수 있는 분이 부총병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부하들은 단순히 아부가 아닌, 진심으로 오삼계에게 칭찬을 건넸지만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누가 있기는, 저 이자원이 있지.'

그것도 고작 '선전' 따위가 아닌, 일개 하급 군관 시절부터 도르곤을 위기에 몰아넣었던 자가 아닌가.

모양새를 보자면 이자원 덕에 겨우 살아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상관인 총병으로서 부하를 구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고, 그간 진강성을 지킨 공도 모두 셈하여 북경에 상신하여 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오삼계의 기분은 펴지지 않았다.

'처음엔 살아난 것도 다행이라 생각했고, 그 뒤엔 공을 세워 다행이라 여겼지만······.'

결국 사람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인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승기를 차츰 잡아가는 듯 보이자 아예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승리를 얻고 싶다는 마음이 솟아오른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속물(俗物)이로구나!'

이런 자신이니 이자원이 단 넉 자로 진강성을 지키게 했겠지만.

오삼계는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적들이 조선군 진채로 몰려갔으니 잘하면 기회를 엿볼 수 있지 않겠는가?"

"허나 성 내에 그만한 전력이 있을지······."

청의 포위망이 얇아졌다 하나 성을 열고 나가 청군과 야전에서 맞붙는 것은 그들로서 꺼려지는 바였다.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군사들의 역량 자체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왜인(倭人)들이 있지 않은가? 싸움이라면 팔기에 지지 않는 자들이다."

지난 3년간 진강 일대에는 조선에 건너온 키리시탄들이 대거 정착했다.

오삼계는 종종 그들을 데리고 싸움을 해보며 톡톡히 써먹어 보았고, 이번 수성전 때도 공을 세운 자들이 많았다.

"칼 잘쓰는 이들을 추려 보아라. 구왕의 신경이 총병에게 쏠렸으니, 반드시 놈들의 빈틈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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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각살우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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