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각살우 (6) >
팔기가 불의의 일격을 당해 기선이 제압당한 틈을 타 조선군 기병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과연 청군의 팔기는 정예.
지휘관들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너희가 그러고도 만주의 용사냐! 기껏해야 조선놈들일 뿐이다!"
니루 어전 하나가 당황한 팔기들을 다그치며 말했다.
성곽 위에서 화포를 쏘아대는 적과 싸우는 것도 아니고, 기병과 기병 간의 대결이라면 청군이 질 수가 없는 싸움.
그리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니루 어전의 독려가 채 먹혀 들어가기도 전에 조선군의 선두가 청군을 덮쳤다.
- 피슉!
다음 순간, 황급히 대도(大刀)를 들고 맞서려던 니루 어전의 머리가 날아갔다.
안장에 앉은채로 목이 날아간 시체에서 핏물이 빗발쳐 땅바닥을 적셨다.
"쓸어버려라!"
실로 잔혹한 광경이었지만 이자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외쳤다.
이미 한차례 꺾였던 청군의 전의(戰意)는 단칼에 상관의 목을 날려버리는 이자원의 앞에서자 눈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대장 영감을 따라 돌격해라!"
마병별장 황익이 외쳤다.
조선군은 수백리 길을 주파하느라 지쳐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려진 밥상까지 먹지 못할 정도로 허약한 이들은 아니었다.
훈국 기병들을 이어 어영청 기병들까지 따르자 양백기는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다.
"이크!"
기세 좋게 이자원의 뒤를 따라 돌입했지만 그 무위까지 흉내낼 수는 없었던 황익이다.
간신히 청군의 창끝을 피해낸 황익은 당황해서 그만 날이 아닌 칼등으로 적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말았다.
어찌나 세게 후려쳤는지 투구를 쓴 청군이 눈을 까뒤집으며 낙마했고, 이어서 혼전(混戰)을 벌이고 있는 조선군과 청군의 말발굽에 짓밟혀 다진 고기가 되었다.
"이런, 칼이 부러졌구나!"
황익은 금이 가버린 자신의 환도를 보고 큰소리로 혀를 찼다.
이것을 핑계삼아 슬며시 전장을 벗어나려던 그였지만 그를 향해 이자원이 말을 몰아왔다.
"대장 영감, 잠시만 뒤로 가서 칼을······."
"그럴 시간이 없다. 이것을 쓰도록."
이자원이 건네준 것은 방금 전 청군을 죽이고 빼앗은 안모도(雁毛刀)였다.
"소, 소관은 이런 칼을 써본 적이 없사온데······."
"쓰다 보면 적응하겠지."
황익은 울며 겨자먹기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런 그의 눈에 이자원이 쥔 환도가 눈에 띄었다.
"과연 명검이오이다. 적의 목을 쳤는데도 피 한방울 묻지 않다니."
간신히 청군 하나를 쓰러트린 마병별장 황익이 말했다.
동양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명검의 조건이 몇가지 있었으니, 차돌을 쳐서 잘라도 흠집이 없어야 한다느니, 혹은 어두운 곳에서 꺼내도 은은한 빛을 내어야 한다느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그 중에는 사람을 베어도 피가 묻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는데, 이자원의 검은 피가 검신을 타고 흘러내리기만 할 뿐, 말라붙어 있지 않았다.
"과연 천지검이오이다."
황익의 찬사에 이자원은 그를 슬쩍 바라보았다.
'신책구천문 묘산궁지리'를 줄여 박철균이 천지검이라고 부른 것이 어느새 황익에게까지 퍼진 모양이다.
그러나 원래의 그 검명(劍名)도 그리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자원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이름이야 어쨌든 명성 높은 석다산의 장인들이 만든 검답게 이자원이 청군을 도륙하는데 일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제길, 저런 괴물이 있나!'
환도를 휘두르며 팔기 사이를 헤쳐가는 이자원을 보며 도이격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오보이 쯤은 되어야 저자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오보이는 호거를 따라 몽골에 처박혔으니 도이격으로서는 언감생심 그를 바랄 수도 없었다.
"물러서지 마라, 겨우 솔호 놈들에게 당할 셈이냐!"
장수들이 소리쳤지만 그들조차 제대로 손을 쓸 수는 없었다.
"멍청이들아, 활을 쏴! 적과 정정당당히 무위를 겨룰 셈이냐!"
도이격의 말은 타당했다.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 무슨 수를 써서든 적을 잡는 것이 우선이었으니.
그러나 이미 조선군이 청군과 맞부딪혀 육탄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그런 조언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어설프게 아군을 피해 활을 조준하던 청군이 이자원의 칼에 등허리가 갈라져 죽었다.
"이 오랑캐 놈들아! 감히 우리 군대를 도모하려 했느냐!"
"전부 목을 하나씩 내어놓고 가거라!"
그때 한창 조선군과 싸움을 벌이던 도이격의 후방에서 다시 한무리의 군사들이 튀어나왔다.
도이격이 추격하던 유림의 북방군이 보낸 병력이었다.
기습에 정신이 팔려 그들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앞뒤로 적을 맞게 된 청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구사 어전! 명을 내려주십시오! 이대로라면 끝장입니다!"
부하들의 요청이 빗발쳤다.
"후퇴다, 전부 물러나라!"
도이격은 참혹한 심정으로 그렇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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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이 정녕 인간의 무위란 말이오?"
후방에서 청군과 조선군의 전투를 지켜보던 봉림대군이 말했다.
이자원이 지휘를 이완에게 맡기고 자신이 직접 선두에 섰을 때는 무슨 자신감인가 싶었지만, 이제야 이해가 될 정도였다.
"소관도 말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오이다."
이완은 이자원과 함께 충청도의 반란을 토벌하는데 종군했지만, 그때는 이자원이 직접 칼을 들고 싸우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싸움에 잔뼈가 굵은 이완도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봉림대군은 그 화려한 칼춤 앞에 그간 이자원과 수도 없이 대립했던 일까지 잊어버린 듯했다.
"저런 자가 내 밑에 하나라도 있다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린 봉림대군이 이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흠, 어영대장이 그보다 못하다는 것이 아니오. 다만 무위만으로 따졌을 때는."
"괜찮사오이다."
이완은 얼굴이 빨개진채 변명하는 봉림대군을 바라보았다.
'허나 밑에 두고 싶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도제조로서 자신을 영입한 것처럼, 단순히 상관으로서 유능한 부하를 얻고 싶다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화살에 맞아 죽은 청군은 적구려."
어느 틈에 전투는 끝났다.
상황이 종료되자 전장으로 내려가 시체들을 살펴보던 봉림대군이 문득 이상을 발견하고 말했다.
"청군이 갑옷을 든든히 껴입은지라 그런 것 같습니다."
훈국 병사들은 권총을, 어영청 병사들은 활을 쏘았으나 양자의 피해 차이는 확연했다.
청군 대열에 혼란을 일으키려는 목적이었으니 실제 피해를 입힌 숫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차이가 심하지 않은가.
철두정갑을 입은 청군은 화살에 당한 피해는 미미했던 반면 훈국 기병들이 쏜 권총에는 줄줄이 맞아 쓰러졌다.
훈국 기병들이 남만에서 수입한 비싼 수석식 권총을 쓸 때에는 무슨 돈낭비냐며 불평했지만, 결과가 이리 나오니 할말이 없었다.
"이제 북병과 합류하여 진강성을 구원해야 할 것입니다."
이완이 생각에 잠긴 봉림대군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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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택은 땀을 뻘뻘 흘리며 몸소 수레를 끌었다.
그 뒤에서 만주족 장수가 말을 타고 뛰어다니며 그들을 재촉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빨리빨리 움직여라, 이 한족 놈들아!"
정홍기에서 퇴출당해 녹영으로 소속을 옮긴 지금도 여전히 그는 청의 장수였다.
그러나 까마득히 낮은 호군교 따위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대거리를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와 사촌형은 한윤은 사실상 역적 취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쇼토!'
쇼토가 패전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 위해 거짓 주장을 벌였음을 밝힌 후, 그들은 호거의 보호 아래 있었다.
쇼토가 날아가버린 건으로 이를 갈고 있는 도르곤파의 눈에 띄어봤자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호거는 그들에게 별다른 신경을 쓰진 않았지만 그래도 정홍기 내에 계속 남아있게는 해주었으니까.
하지만 호거가 몽골 정벌을 위해 떠난 사이 도르곤이 묵던을 장악하자 그들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심지어 범문정마저 실각하고 도르곤이 군기대신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는가.
그러자 한윤과 한택은 더이상 팔기에 발을 붙이고 있을 수 없었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녹영으로 소속을 옮겼다.
그들이 이끌고 있던 조선인 부대, 솔호 니루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도 쿠툴러(노예병)들이나 할 법한 일을 시키다니.'
한택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때 뒤에서 짐을 옮기던 한윤이 입을 열었다.
"택(澤)아."
"예, 형님."
한택은 자신을 조선어로 부르는 종형에게 내심 놀랐다.
그는 만주어를 익힌 후로는 웬만해선 결코 조선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스스로가 조선인이란 사실을 지우려 드는 것처럼.
"나를 따라 청에 온 것을 후회하느냐?"
"······조선에 남아있었으면 죽기 밖에 더했겠습니까. 형님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게다가 한번 일이 꼬여 거꾸러지기 전까지는 승승장구해서 청나라 서열 50위까지 오른 한윤이 아닌가.
"태종께서 후계조차 남기지 못하고 붕어하셨기에 우리의 신세가 불행해졌을 뿐이니 형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한택은 그런 말로 한윤을 위로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이 어떻게 흘러갔어도 우리는 이런 운명에 처했을 것 같구나. 이방인으로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로······."
사실 원래 역사에서는 청의 중신인 잉굴다이, 즉 용골대와 사돈까지 맺고 그 자손은 대대로 작록(爵祿)을 누리게 되었을 한윤이었다.
한택도 자식들이 번성하여 모두 관직에 오르니 둘 모두 역사의 승자라 할만했다.
그런 한윤 형제의 운명이 나락에 처박힌 것은 순전히 이자원이라는 변수의 존재 때문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한윤은 언제고 이리 되었을 것이라 한탄했다.
'아버님은 한평생 조선에 충성을 바치셨지만 끝내 반역자의 오명을 쓰고 돌아가셨다. 나 또한 그 틈에 끼어 죽음을 맞아야 했단 말인가? 그래야만 오늘과 같은 꼴을 보지 않았을 것인가?'
한윤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오른팔을 어루어만지며 생각했다.
쇼토에게 잡혔을 때 이자원과 내통한 사실을 인정하라며 사정없이 고신(拷訊)을 당한 까닭에 얻은 후유증이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구나."
공성을 벌이면서도 화약을 아끼겠다고 녹영병들의 생목숨까지 희생시키는 청나라다.
자신도 불과 몇년 전까진 그 대청의 수뇌부에 있었건만, 비정함에 치를 떨렸다.
"계속 청에 남아있다면 언제고 그런 식으로 성벽 밑에 머리를 묻고 죽겠지."
"조선의 중앙군이 왔다지?"
진강성을 구원하러 온 조선군 기병은 북병과 합류해 인근에 주둔했다.
그들은 후속 부대를 기다리는 듯 당장 행동에 나서지 않고 청군의 견제에만 주력했다.
도이격이 패하고 조선군이 제대로 기각지세를 형성한 상황에서 청군이 공성에만 집중할 수는 없기에,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위에서 철군을 하겠다는 말은 없던가?"
"예친왕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가 없지요. 진강을 얻지 못하고 물러난다면 반드시 등 뒤에서 칼이 튀어나올 터이니까요."
한윤도 한택과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조만간 진강성을 구하러 온 조선군과 청군 간에 대판 싸움이 벌어질 터였다.
공교롭게도 양쪽의 주장(主將)은 모두 그들과 악연이 깊었다.
"이자원, 도르곤······. 두 놈 다 우리 형제에게는 철천지 원수나 마찬가지다."
못된 꾀를 내어 자신들을 곤란에 빠뜨린 이자원이나, 쇼토를 날려버린데 대한 보복으로 자신들을 숙청한 도르곤이나 할수만 있다면 뼈를 씹어먹고 싶다.
"어디 한번 궁리를 해보자."
한윤은 씹어뱉듯이 말했다.
< 교각살우 (6)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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