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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13화 (113/213)

< 교각살우 (5) >

- 사아아아아

시원한 바람이 대로(大路)를 줄지어 내딛고 있는 기병들을 스쳐지나갔다.

땀방울을 뚝뚝 흘리며 말에 매달려가다시피 하던 봉림대군(鳳林大君) 이호(李淏)는, 그 한줄기 바람에 해갈(解渴)하는 어린아이처럼 크게 숨을 들이켰다.

"후아!"

"말은 달릴만 하시오이까, 대군 대감."

옆에서 같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던 어영대장 이완(李浣)의 물음에 봉림대군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괘, 괜찮소, 어영대장! 목적지까지는 얼마나 남은 것이오?"

"아직 수십리는 족히 멀었습니다. 송구하오나 힘에 부치신다면 본영(本營)과 합류하시지요."

봉림대군은 기진맥진한 상황에서도 이완의 그 제안에는 고개를 맹렬히 저었다.

말이 좋아 본영과 합류이지 사실상 대열에서 낙오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정도로 꺾인다면 어찌 장부라 하겠소. 나는 괜찮으니 신경쓰지 말고 갑시다."

봉림대군은 간신히 그리 대답했다.

그는 풍채가 당당하고 나름 무재(武材)도 있다 자부하고 있었으나, 이런 강행군은 실로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대군의 몸으로 이 행군길에 오르게 된 것은 며칠 전 이자원이 던진 말 때문이었다.

'진강을 잃으면 요동으로 나아갈 발판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러나 이미 적도가 이른지 적지 않은 시일이 소모되었으니 시급히 구원하지 않으면 곧장 함몰될 것이오이다.'

'허면 어찌하자는 말이오?'

'기병으로 하여금 선발대를 편성해 청군을 들이칠 것이오이다.'

'기병만으로? 그것이 가능은 한 것이오?'

봉림대군이 비록 전장에 직접 나서본 경험은 없다지만, 그래도 기병 전력에 있어 청이 훨씬 우위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러나 화포와 보병마저 놔두고 기병만으로 움직이겠다니.

'개인의 역량만으로 청을 누를 수는 없겠지요.'

이자원은 선선히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꺾지는 않았다.

이번 원정의 주장(主將)은 어디까지나 그였으므로 끝까지 밀어붙이자 봉림대군도 뭐라 할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이자원은 유림에게 사람을 보내 무언가를 전했다.

"훈련도감의 마병들은 어째 우리 어영청보다 낙오자가 적은 것 같소."

대군이 어영청 병력들보다 앞서 달리는 훈련도감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뜻 보기에도 지쳐 떨어져나가는 이들이 어영청에 비해 훨씬 적었다.

"훈련도감 장병들은 매일 체계적으로 체력을 단련한다 하는데, 마병들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지요."

믿거나 말거나 잠도 자지 않고 산을 타는 훈련까지 있다고 하니, 실로 지독할 정도의 집착이었다.

현대에선 무용론이나 학대 논란 탓에 그런 훈련들은 슬슬 사라져가고 추세였지만 이 시대에는 기계화는커녕 병사의 체력 하나하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탓이다.

이처럼 강력한 훈련강도 때문에 수없이 많은 원성을 샀지만 효과는 분명히 보이고 있었다.

이런 강행군에도 1할조차 낙오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어영대장이 보기에는 어떠하오?"

"장졸 하나하나로만 따진다면 어영청보다 훨씬 정예이긴 하오이다."

이완도 말먹이를 손수 줄 정도로 솔선수범하는 지휘관이다.

평소에는 자애로운 그였지만 공사(公私)를 철저히 구분하고 엄격한 면모 또한 갖추고 있는지라 어영청의 장졸들은 그를 잘 따랐고, 봉림대군 또한 그렇기에 그를 신뢰했다.

"같은 양의 훈련을 시키더라도 훈국측의 단련법이 나은 것 같으니 어영청에도 이전부터 훈국 교관들을 불러다 도입을 하고 있었사오이다."

이완의 말에 봉림대군이 일전의 논쟁이 기억나 물었다.

"허면 군제는 어떠하오? 그 또한 훈련대장의 말을 따라야 하겠소?"

하지만 이완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까지 소관은 우리 군제에 대한 확신이 있사오이다."

남만인들이 화기를 잘 다루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언제 그들이 저 흉험한 오랑캐의 팔기와 맞서 싸워보았겠는가?

산에서는 산에서 싸우는 법이 따로 있고, 바다에서는 바다에서 싸우는 법이 따로 있는만큼 청군과 싸우는 법은 싸워본 이들이 더 잘아는 법이다.

척계광이 왜구와 맞서 싸우는 방법으로서 기효신서를 지었고, 다시 북방 오랑캐들과 싸우는 방법으로 연병실기를 지었다. 다시 한교(韓嶠)가 조선의 실정에 맞게 개수하여 연병지남이란 병서를 지었으니, 어영청에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군제를 운용하고 있었다.

"훈련대장 본인도 우리 병법을 바탕으로 오랑캐에게 승리를 거두어 놓고, 남만인들의 병법을 취하는 것은 성급한 처사이오이다."

이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이번 싸움에서 판가름이 나겠지요. 어느쪽이 옳았는지는."

===

녹영병이 진강성의 성벽을 타고 올랐다.

가도군은 화포와 같은 최신(最新) 무기부터 더러는 돌멩이에 끓는 물까지 동원하여 성을 사수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죽어라, 오랑캐야!"

같은 한인(漢人)이니 민족적 구분으로는 의미가 없는 발언이지만, 지금 양 군은 모두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불이 붙어 화르륵 타오르는 운제를 허겁지겁 타고 올라 성첩 위에 뛰어내린 청군은 어설프게 창칼을 갖다댄 가도군을 쳐죽였다.

"빠, 빨리 막아라!"

"비켜!"

예상치 못한 무예에 주춤거리는 동료들을 밀치고 가도군 하나가 그에게 총구를 들이댔다.

- 탕!

미리 장전해놓았던 총에서 초연과 함께 튀어나온 총알이 청군을 절명시켰다.

이른바 노밀총(魯密銃)이라는 물건으로, 명나라에 전래된 터키식 화승총이다.

조선군이 쓰는 조총보다는 구경이 크고 무게가 조금 더 나가는데 사거리는 조총보다 길다는 장점이 있었다.

가도군은 노밀총을 집단으로 운용하지는 않았지만 보조적인 수단으로 제법 쏠쏠하게 활용하고 있었는데, 이 사수가 쥔 노밀총도 그 중 하나였다.

"버틸 때까지 버틴다! 죽어도 물러서지 마라!"

오삼계는 다친 몸에도 불구하고 성루에 서서 병사들을 독려했다.

명군은 그의 외침에 감명을 받았지만 오삼계의 심정은 복잡했다.

'베틀의 실이 끊기면 아무 쓸모도 없다고? 바보같은 소리!'

오삼계는 그런 말에 속았던 자신을 저주했다.

노련한 그의 눈으로 보기에도 돌아가는 판세는 명확했다.

마음 속으로 정해놓았던 닷새 중 벌써 나흘이 지나가고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슬슬 퇴각할 준비를 해야했지만 갈수록 격렬해지는 적의 공세 탓에 과연 무사히 진강성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도르곤 또한 오삼계와 마찬가지로 판세를 짐작하고 있었다.

"화약을 아끼도록. 적은 얼마 남지 않았다."

도르곤이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 아군의 피해가 클 것입니다."

"요동에 넘쳐나는 것이 한인들이니 얼마든지 충원할 수 있다."

아직 중원을 정복하지 못한데다 몽골을 통한 약탈 루트마저 끊기며 작금의 청은 모든 물자가 부족했다.

화약은 그 중 하나였다.

아무리 녹영이 한족 부대라 해도 인명의 피해가 발생하는 것이 도르곤으로서도 달가울리는 없었지만, 그보다는 화약의 보전을 우선시해야 했다.

"진강 따위를 얻는데 화약을 죄다 탕진할 수는 없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중원을 정복해야 한다.

호거를 족치고 조선을 누른 뒤가 될테니 그것이 과연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미래가 없다.

그렇기에 승기를 잡자 도르곤은 비정한 명령을 내렸다.

그때 바깥에서 척후의 보고를 들은 수크사하가 급히 막사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대왕, 철퇴했던 조선군이 후방의 북병과 합세했습니다. 곧 압록강을 건널 기세라고 하옵니다."

임경업이 안주에서 북상한 유림과 합류한 것이다.

수크사하의 보고에 도르곤은 눈을 치떴다.

"기어이 죽을 자리로 들어오는군."

"소장을 보내주신다면 기필코 강을 틀어막아 지키겠습니다."

진강을 구원하는 것이 조선군의 목적이니만큼, 다시 도하를 시도할 것임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 길목에 복병을 두었다가 들이치는 전략은 한번 써먹었으니 적들도 두번은 속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저 적을 막기만 하는 것은 도르곤의 성정에 맞지 않았다.

"아니, 도이격(圖爾格). 그대가 가도록."

"예?"

도이격이 도르곤을 쳐다보며 물었다.

양백기의 둘 뿐인 구사 어전임에도 불구하고, 이자원에게 패한 일로 도르곤의 신임이 이전보다 못했던 그였다.

그렇기에 도르곤을 따라다니며 참모 노릇을 하는데 그쳤던 도이격이었는데 난데없이 임무가 떨어진 것이다.

"조선군에게 길을 열어주고, 그들이 진강성을 향해 내달릴 때 뒤를 들이치도록."

도강에 성공하고 복병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면 자연히 조선군은 목표인 진강성의 구원에 온 신경을 집중할 것이다.

그때 의표를 찔러 순식간에 격멸시키라는 명령이었다.

"이참에 조선의 북방군까지 모조리 쓸어버린다. 녹영은 계속 성을 공략하고 양백기는 도이격을 따르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도이격은 도르곤에게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로 오랜만에 이런 중임(中任)을 맡았으니 실패란 있을 수 없다.

반드시 적을 쓰러트리고 광명을 찾으리라.

===

"대왕의 말씀이 맞았구나!"

도이격이 소리를 내질렀다.

임경업의 패전 때문인지 압록강을 건널 때는 상당히 신중히 움직이던 조선군이었으나, 정작 강을 건넌 후에는 멍청하게도 등을 훤히 내보인 채 강줄기를 따라 진강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도이격은 쾌재를 불렀다.

조선의 북방군은 정강했지만 대개가 보병이었으니, 이런 기습에는 속수무책일 것이 뻔했다.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양떼와 같구나! 어리석은 짓의 대가는 죽음이다! 당장 놈들을 들이쳐······."

도이격이 그리 외칠 때였다.

- 두두두두두

"······?"

도이격은 어디선가 미세하게 느껴지는 진동에 말을 삼켰다.

그간 숱한 전장을 넘겨오며 길러졌던 감각이 예리하게 그의 등허리를 타고 올랐다.

그는 진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뿌옇게 일어나는 먼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졌고, 그 사이로 수없이 많은 깃발이 휘날렸다.

"이런 개같은······!"

도이격이 욕설을 뱉었다.

유목민답게 시력이 좋은 그에게는 수없이 펼쳐진 훈(訓)자 깃발이 보였다.

"훈련도감, 이자원이로구나!"

도이격이 부르짖었다.

갑사창에서의 매복으로 패배한 뒤로 도이격은 그의 이름을 잊지 않고 있었다.

'북병은 미끼였다!'

도이격은 낭패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조선의 중앙군이 지원을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리 빨리 도달할줄은 몰랐다.

조선의 지원을 차단해야 하는 청군 입장에서는 안주의 유림이 임경업과 합류해 단독으로 진격해오는 것을 보고 각개격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과감하게 군사를 내어 움직인 것이었지만 그것 또한 조선군의 손바닥 안이었단 말인가.

아마 조선의 중앙군은 북병과는 별개로 압록강 상류에서 도강하여 강줄기를 타고 내려왔을 것이다.

그러니 도이격의 후방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조선이 그정도로 시점을 정확히 맞출 수 있다고?"

도이격은 믿기지 않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이를 빠드득 갈며 외쳤다.

"적들이 온다! 모두 전투 태세를 갖추어라!"

청군은 과연 강군이었다.

혼란에 빠져있던 전사들은 도이격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였다.

"적들에겐 활이 없다! 직접 창칼로 맞붙는다면 우리가 백번 싸워도 백번을 모두 이기느니라!"

도이격은 선두의 훈련도감 기병들이 활을 쳐들지 않은 것을 보고 말했다.

그러나 조선 기병들은 그냥 활을 들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 타타탕!

가까이 접근한 훈련도감 기병들에게서 난데없이 초연이 뿜어졌다.

그들의 손에는 어느 틈에 권총이 들려져 있었다.

- 휘리릭! 슈우웅!

반면 뒤따라 돌입한 어영청 병력들은 여전히 대부분 활을 사용했다.

뜬금없이 총탄을 뒤집어써 당황한 도이격의 별동대는 이어진 어영청 병력들의 궁시에 맞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전원 백병전 준비!"

뒤에서 들려온 외침에 조선군은 일제히 권총을 허리춤에 집어넣거나 활을 치우고, 편곤과 창칼을 빼들었다.

"돌격하라!"

명령을 내린 이는 앞장서서 환도를 빼들고 선두로 나섰다.

도이격이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이, 자원!"

도이격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 교각살우 (5)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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