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각살우 (4) >
예친왕 도르곤이 진강을 함몰시켰다는 말을 들은 신하들의 눈길이 모두 이자원을 향했지만 그는 담담했다.
임금은 신하들에게 하문했다.
"오삼계는 요서에 있을 때는 전봉참장으로 용맹을 떨쳤고, 가도에서는 부총병으로 큰 싸움마다 이겼으니 실로 명장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그가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패퇴했으니 구왕(九王)의 지모와 용맹이 그만큼이나 뛰어난 것인가?"
임금이 묻자 좌의정 신경진이 나서서 답했다.
"가벼이 볼 수 없는 상대이옵니다. 황태극이 살아있을 때부터 종군하여 몽골을 크게 휩쓸었다 하지 않사옵니까."
"오랑캐들에게는 참으로 명장이 많구나."
임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찌하여 하늘은 한낱 오랑캐들 따위에게 저리 뛰어난 재주를 내렸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누를 수 있는 사람 또한 조선에 존재했다.
"훈련대장."
임금이 말했다.
"그대는 구왕과 싸워 이겨보았지 않은가."
이자원은 도르곤의 군대와 두 번 싸워보았다.
처음엔 갑사창에서, 두번째는 청천강에서.
엄밀히 말하면 정면대결이라기엔 손색이 있었지만, 두번 다 이자원이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번에도 구왕을 쓰러트릴 수 있겠는가?"
"구왕은 손쉬운 상대가 아니옵니다."
이자원이 말했다.
원래 역사에서 한번 중원을 정복했던 인물이다.
그가 전권을 휘두르는 청군이라면 이자원이라 해도 각오를 해야했다.
"그대가 그정도로 말할 정도면 실로 쉽지 않은 모양이구나."
"훈련대장은 어째서 싸우기도 전에 적을 꺼려하시오!"
임금이 이자원의 반응에 긴장하던 그때 봉림대군이 나서서 외쳤다.
"전하, 어영청을 보내어 부총병을 돕게 하소서! 지난 수년간 어영의 군문에 든 이들은 땀흘리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기필코 오랑캐를 물리치고 북방의 안녕을 찾을 것이옵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어영청인만큼 자부심이 잔뜩 묻어나는 발언이었다.
임금은 동생의 호기로운 말에 마음이 기울었다.
북병들도 있으니 어영청이 합세하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마음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임금이 물었다.
"제신(諸臣)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어영청을 보내야 하겠는가?"
"그리하소서, 전하."
이자원이 말했다.
"신 또한 출진하겠나이다. 훈국군과 함께 어영청이 움직인다면 능히 적을 꺾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동안 총융청과 수어청에서 군사를 내어 도성의 방비를 삼게 하소서."
훈련도감에 이어 어영청까지.
둘 모두가 출진해야한다는 말에 임금이 놀랐다.
그러나 이자원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또한 대군께서 군사에 관심이 많으시니, 직접 장수가 되어 종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 자가 무슨 꿍꿍이인가?'
봉림대군은 이자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꾸 참견할 요량이라면 전장에라도 나가본 뒤에 떠들라는 것인가.
대군은 괜히 호승심이 불타올랐다.
"그것은······."
임금이 뭐라하기도 전에 봉림대군이 나서서 말했다.
"흥, 바라던 바요. 전하, 모쪼록 훈련대장의 청을 들어주소서."
임금이 회복한 이후 이자원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여전히 군무에 관련해서는 사사건건 대립하는 봉림이었으니 이자원의 이런 발언은 꺼림칙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봉림대군은 오히려 물러서지 않고 그리 대답했다.
"전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게다가 대군은 어영대장도 아니요, 그저 도제조일 뿐이 아닌가."
임금은 직접 남한산성에서 수성전을 치루어 본 경험이 있었고, 청군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까지 목격했었다.
그렇기에 동생을 그 위험한 곳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봉림대군은 호기롭게 말했다.
"신기묘산(神機妙算)의 명장인 훈련대장이 동행하고, 또한 어영대장도 그에 못지 않은 호걸이니 만에 하나라는 것이 과연 있겠사옵니까? 게다가 군부의 원수인 오랑캐를 치는 일인데 자식으로서 어찌 빠질 수 있겠나이까?"
"그래도 자식이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늘."
임금이 말한 자식이란 올해 태어난 봉림대군의 장남을 말함이다.
원래 역사에서라면 현종(顯宗)이 되었을 아이다.
"장수가 나라의 부름을 받으면 집안을 돌아보지 않는 법이옵니다."
이자원은 봉림대군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임금은 누군가 말려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영대장 이완을 향해 물었다.
"어영대장의 생각은 어떠한가?"
"대군께서 장재(將材)가 있으심은 신 등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옵니다. 전하의 우려도 신 등이 같이 하고 있는 바이나, 부모의 원수를 자식이 갚으러 나서는 것은 함부로 말릴 바가 못되므로 드릴 말씀이 없나이다. 죽여주시옵소서."
이완마저 이리 말하자 임금은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말했다.
"그래, 뜻대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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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엉
진강성에서는 공자와 방자 간에 격렬한 포격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홍이포(紅夷砲)의 좁은 발사구로 튀어나온 12파운드짜리 포탄이 폭압(爆壓)을 타고 땅바닥에 메다꽂혔다.
"끄아아악!"
"살려줘!"
멍청하게 서있다 1리 밖에서 날아온 포탄을 맞고 깔려버린 청군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다시금 청군 진영에서 발사된 포탄이 진강성의 성벽을 두들기고, 악을 쓰며 운제(雲梯)를 미는 군사들이 뒤를 따랐다.
그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만주어가 아니라 한어(漢語)였다.
최근 청이 신설한 부대, 녹영(綠營)병들이었다.
본래는 순치제 시절 입관 후에야 창설되는 한족 부대였지만, 이곳에선 호란과 내전을 거치며 팔기의 수가 깎여나가자 궁여지책으로 만들어진 셈이었다.
녹영은 홍타이지 시절 우전 초하라 불리던 한족 부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범문정은 이들을 원래 한군팔기로 하여 팔기 내에 편입시키려 했다.
그러나 새로이 집권한 도르곤이 이를 막고 별도의 부대로 만들었으니, 당연히 한인 출신인 범문정을 견제하려는 책략이었다.
"사수는 무얼하는가? 모조리 쏘아라!"
성첩에 직접 올라가 지휘 중인 오삼계가 외쳤다.
도르곤의 예상치 못한 기동에 휘말려 쓰디쓴 패배를 맛본 그였지만 수성전은 흠잡을데가 없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도르곤이 말했다.
"수크사하."
"예, 대왕."
"맞출 수 있겠느냐?"
진강성 주변은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어 화살과 포탄이 날아다니는 사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수크사하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예, 대왕. 맡겨만 주십시오."
도르곤이 고개를 슬쩍 끄덕이자 수크사하는 곧장 휘하의 팔기들을 거느리고 성벽 아래까지 쇄도해 들어갔다.
"웬놈들이 접근해온다!"
화기를 동원한 녹영병들이 아니라 공성 무기 하나 없이 말을 타고 쳐들어온 팔기들을 보고 가도군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황급히 대포를 장전하고 그리로 화살을 돌렸지만 이미 수크사하는 지근거리까지 와있었다.
- 휘리릭!
수크사하가 쏘아붙인 화살은 성벽 위를 타고 올라가듯 지나쳐 오삼계의 어깨를 맞추었다.
"윽!"
오삼계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부총병!"
"부총병! 괜찮으십니까!"
황급히 달려오는 부하들을 밀치며 오삼계가 외쳤다.
"괘, 괜찮다! 저놈들이 도망치기 전에 모두 총포를 놓아 쓸어버려라! 사수들은 어디 있는가! 활을 쏘아라!"
지독한 아픔이 덮쳤지만 그는 몸을 돌아보기보다는 저격을 위해 뛰쳐들어온 수크사하 일행부터 잡으라 명했다.
"실패인가."
수크사하는 혀를 차며 미련없이 돌아섰다.
- 투두둥!
오삼계의 명령을 받고 총탄과 화살이 그를 향해 날아왔지만 수크사하와 팔기들은 용케 이리저리 피해 도망쳤다.
"제법이다. 죽이기엔 아까운 장수구나."
도르곤은 돌아온 수크사하의 보고를 듣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런 자가 버티고 있으니 성을 떨어트리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아무리 명장이라 해도 성밖에서 돕는 자가 없다면 어찌 버티겠느냐? 이미 조선의 북병은 내 손에 격퇴되었거늘."
도르곤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오삼계가 녹영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무렵 부원수 임경업의 군대는 이미 양백기에게 패해 다시 압록강 너머로 철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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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삼계의 구원 요청을 받은 임경업은 서둘러 움직일 준비를 마쳤지만, 곧장 전장에 합류할 생각은 없었다.
2천 명 정도에 불과한 그의 병력으로는 족히 5천은 되어보이는 청군과 싸우기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우선 강을 건너 교두보를 확보하고, 진강성과 통하면서 도원수 대감께서 합류하기를 기다린다."
임경업은 그렇게 판단했다.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상당히 무난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르곤은 이미 그들이 그렇게 움직일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조선놈들아, 어딜 끼어드느냐!"
"너희가 진강을 구원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줄 알았느냐?"
때는 겨울이 아니라 여름.
조선군이 배를 모아 움직일만한 길목은 한정되어 있다.
의주 구룡포 인근에서 배를 띄운 임경업은 압록강 중류의 위화도를 거쳐 도강했는데, 이미 청군은 그곳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을 관측한 양백기가 곧바로 움직여 조선군을 짓밟자 임경업은 속수무책으로 패퇴했다.
"우리군의 움직임을 손바닥 읽듯이 보고 있구나."
임경업은 침통하게 군대를 수습해 다시금 구룡포로 퇴각했다.
그곳에서 그는 안주의 유림이 보낸 파발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서한을 보낸 장본인은 유림이 아니라 이자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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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오삼계는 어깨에 맞은 화살을 치료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청이 작정하고 달려들자 가도군만으로는 수성하기가 참으로 난망했다.
게다가 상대방은 그 도르곤이 아닌가.
분명히 봉황성을 떠나 진강성으로 옮긴다는 판단은 옳았지만, 도르곤의 기동력은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타격을 입고 진강성에 들어온 가도군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오삼계의 머리가 아파왔다.
"여진 1만이 모이면 천하가 이를 감당할 수가 없다(女眞一 万 則 天下不堪當)고 하더니, 실로 그 말이 맞군."
오삼계는 부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선의 북병은 언제쯤 도착한다던가?"
"그것이······."
부하는 흉보(凶報)를 전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입을 저주했다.
"강을 건너자마자 패했다고?"
오삼계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일하게 믿고 있던 것이 조선의 지원 뿐이었는데 그들이 패해 물러나다니.
"우리는 여기서 싸우다 다 죽으란 말인가?"
"다행히 패한 이는 조선국 부원수 뿐이옵고 도원수가 한참 북상 중이라 합니다."
"하지만 도원수의 병력이 도착한다 해도 과연 저들을 몰아낼 수 있을지······."
부하들이 우려를 늘어놓자 오삼계는 눈을 감았다.
결국 때가 온 것인가.
"3년을 진강에서 버텼다면 할만큼 했다. 이정도면 조선도, 우리 조정도 나를 책망하지는 못할 것이야."
오삼계는 운좋게 청군이 빈틈을 노려 진강을 점령했을 뿐,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줄 알았다.
'적당히 체면치레는 했으니 되었지 않은가?'
싸우지 않은 것도 아니고, 조선의 응원군마저 패했으니 이쯤해서 물러나는 것이 합리적인 그의 성격에 맞았다.
그러나 이자원의 명령서가 임경업의 진영으로부터 압록강을 넘어 날아들어왔을 때, 그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 명령서에는 딱 네 글자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맹모단기(孟母斷機)라."
맹자가 공부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그 어머니가 베틀의 실을 끊어 훈계하기를, 도중에 일을 그만두면 오히려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하였다.
이자원은 지금의 형세를 그에 빗댄 것이다.
'빌어먹을, 총병은 내 마음이라도 읽은 것인가?'
오삼계의 얼굴에 쓴웃음이 맺혔다.
여차하면 핑계를 대고 물러나리라 예상하지 않고서야 이런 편지를 보낼리가 없었다.
"조선 도성에서 출진하면 이곳까지 얼마나 걸리겠는가?"
"최소한 보름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보름이라."
오삼계는 말했다.
이 편지가 진강까지 닿을 동안 조선군도 움직였겠지만 그래봤자 열흘은 더 넘게 남았을 것이다.
그때까지 버틸 여력은 없었다.
유림의 북병이 합류한다고 해도.
"우리는 닷새 뒤 후퇴한다."
오삼계가 말했다.
그에게 끝까지 싸울 것을 강요하려면, 그때까지는 이자원도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했다.
< 교각살우 (4)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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