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11화 (111/213)

< 교각살우 (3) >

'조선이 가난하여 금주까지 물자를 대는 것은 불가능하오니 그 점만 책임져주신다면 조선군을 파병하겠소이다.'

낙양성은 이자원의 말을 되뇌었다.

"금주를 내어달라니, 허 참."

금주는 요서의 목줄로, 청과 맞닿은 명의 최전선이다.

이곳이 청의 손에 들어가면 산해관까지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니 조선의 손에 사실상 요서의 안위를 맡겨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따지기엔 상황이 좋지 않다.'

숭정제처럼 그도 동이(東夷)들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 먼 대동까지 군대를 보내달라 하는 것도 실질적으로 어려운 것이 사실.

"이번 한번만 넘기면 되지 않겠는가."

낙양성은 중얼거렸다.

그의 생각은 이미 이자원에게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물었다.

"동이들이 여진과 내통하여 금주를 열어준다면 어찌합니까?"

멍청한 소리를 지껄이는 부하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낙양성이 대답했다.

"충문왕 종(倧, 인조)이 야인들의 손에 죽었는데 어찌 저들과 합세하겠는가? 조선이 오랑캐라고는 하나 왕화(王化)를 입어 유학의 도리를 배웠거늘."

낙양성은 그렇게 말했다.

이미 조선과 청은 철천지 원수가 되었으니 결단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낙양성은 적비를 불러 끝까지 경계의 끈을 놓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말로 나눈 의리만큼 허망한 것이 없다. 너는 반드시 조선쪽의 약점을 손에 넣어라."

"예, 대인."

적비가 대답했다.

낙양성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제 나름의 속내를 감춘 채.

===

황제의 심복인 낙양성이 이자원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달단의 태사 호격은 여진의 족속으로 그 아비와 같이 천조에 반역하였으나, 짐이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여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나 오랑캐의 성품은 개나 양과 같아서, 의리와 은혜를 거리낌없이 저버리니 곧 대동과 선화를 쳐서 승냥이처럼 들어앉았음이라······.

너희가 멸망한 것을 일으켜주고 끊어진 것을 이어준 은혜를 생각한다면 이치상으로 마음을 같이하여 군사를 일으켜 역적을 토벌해야할 것이나, 조선에서 물경 수천리가 되는 까닭에 그러지는 못하였다.

다만 금주로 가서 여진이 중원을 노리는 것을 막겠다 하는 뜻만은 갸륵하다. 이에 조칙을 내리노니, 조선왕은 명을 받들라.]

이와 같은 칙명이 내려오자 조정은 어디서 군사를 차출해야 할지 입씨름을 벌였다.

주로 거론되는 대상은 이미 여러 차례 원정 경험을 쌓은 훈련도감이었다.

"오군영은 아니되옵니다."

그러나 훈국 군사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자원이 나서자 그런 여론은 곧바로 잦아들었다.

그 다음은 서북군이었다.

"부원수 임경업을 대장으로 하여 북방군을 수천 가량 파병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이까?"

하지만 이 또한 아니될 말.

사정을 모르는 신하들이야 대동만 되찾으면 명군이 돌아올테니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지만, 이자원이 보기엔 족히 수년은 발이 묶여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남은 군영은 한 군데.

"나, 날더러 금주로 이동하란 말인가?"

심기원은 입을 떡 벌리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박철균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상의 칙명에 따라 파병을 해야하니, 속히 채비를 하십시오."

바로 가도군.

그것도 심기원이 이끌고 있는 가도 본군이었다.

"금주는 본래 오 부총병이 있던 곳 아닌가? 순리대로 하자면 그가 가고 내가 남을 일이지, 어째서 조정에서는 나를 보내려 하는가?"

"오 부총병은 진강을 지켜야하고, 또한 다른 이들도 제각기 할일이 있으니 부총병께서 가셔야한다는 것이 대장 영감의 말씀이었사오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총병께서 진강으로 가 청군과 싸우시겠소이까?"

박철균의 말에 심기원은 넋이 나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잖아도 3년 전 양동작전을 펼친답시고 요동 해안가를 들쑤시라는 명을 받아 갖은 고생을 다했던 그다.

기껏 전쟁에서 벗어나 마음의 안식을 찾았건만, 이자원은 끝까지 자신을 부려먹으려 드는 것이 아닌가.

'이자원, 그놈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금주 같은 요충지로 나를 보내려 하는게야?'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심기원은 스스로도 군재를 높게 사지는 않았다.

애초에 문신이었고 말이다.

그러나 이자원은 명을 내려놓으면 가만히 웅크려 지키기만 할뿐, 나서서 일을 망치지는 않을 인간이었기에 그를 보내는 것이었다.

지금으로선 그정도면 충분했으니까.

"어서 대장 영감의 말씀을 받드시지요."

심기원이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이제 와서 이자원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얼마 뒤 심기원은 배에 가도군을 가득 싣고 금주로 향했다.

===

쇼서의 친정 선언과 범문정의 농간으로 도르곤은 섭정왕의 지위를 잃었다.

범문정의 실책으로 진강 - 동팔참을 잃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팔기를 쥔 유력 종친들 중하나로 굴러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도르곤은 전후 이어진 권력투쟁 끝에 그 책임을 범문정에게 돌리며 재기에 성공했다.

"새로이 만들어진 군기대신(軍機大臣)이라는 관직은 군기처(軍機處)의 우두머리로서 군사·정무를 모두 관장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어찌 일개 한인(漢人)이요, 잘못된 명령으로 진강을 잃어버린 범문정에게 그런 중책을 맡길 수 있겠나이까?"

"섭정을 파하고 친정을 하시겠다는 뜻은 받들겠으나 반드시 범문정은 군사에서 손을 떼야 할 것이옵니다."

예친왕 도도가 앞장서서 말하자 도르곤파의 종친과 신하들이 모두 찬동하고 나선 것이다.

범문정에겐 애초에 튼튼한 기반이 존재하지 않았고, 다만 심양을 되찾은 기세를 타서 친정을 밀어붙였을 뿐이다.

순식간에 수세에 몰린 범문정은 끝내 군기대신의 자리를 내려놓았고, 도르곤이 그 직을 차지했다.

"섭정왕이 아니라 군기대신이라니, 격은 거사 이전보다 오히려 더 떨어졌군요."

도도가 형에 대한 대우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그러나 도르곤은 그런 의전에 연연하는 이가 아니었다.

"격 따위에는 관심없다. 나로서는 방해꾼들이 사라진 것이 더욱 반가우니 말이다."

호거와 범문정.

둘 모두 도르곤의 발목을 잡았지만 이젠 자신이 대권을 쥐게 되었다.

드디어.

"폐행(嬖幸, 간신)들을 모두 눌렀으니 이번에야말로 대청을 수습할 차례다. 어디로 나아가야하겠는가?"

도르곤은 지도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도도가 그간 들어온 정보를 그에게 건넸다.

"금주의 조대수가 병력을 이끌고 중원 안쪽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호거가 대동을 점령한 것 때문인가."

도르곤은 호거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청 본국과 달리 마시를 열어 물자를 보급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가 갖고 있는 최대의 강점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제 스스로 걷어차다니, 정신이 있는 것인가.

"대왕, 이 기회에 금주를 들이쳐야 합니다!"

"아니, 되었다."

숭정제가 암군이라지만 아무 대책없이 병력을 뺄 인간은 아니다.

과연 조선군 선단이 금주로 향했다는 이야기가 들렸으니, 지금은 시기상조였다.

"지금 금주를 들이친다면 명은 화들짝 놀라 다시 군대를 이리로 보내겠지. 명군은 호거놈과 마지막까지 상잔하도록 놔두어야 한다."

도르곤이 말했다.

"그럼 몽골로······?"

"그게 가장 좋겠지만,"

도르곤은 눈살을 찌푸렸다.

"문제가 있다."

그는 호거가 어떻게 내쫓겼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몽골까지 떠난다면 범문정, 그 늙은 여우가 분명 가만히 있지 않겠지.'

범문정은 강덕제의 비호를 받으며 아직까지 대학사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장 그를 제거할 수는 없으니 몽골도 제외.

명으로도, 몽골로도 갈 수 없다.

그렇다고 기왕 쥔 대권을 가지고 손놓고만 있는다면 권력을 되찾은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나아갈 곳은 단 한 곳.

"이참에 진강을 수복하겠다."

그동안은 호거와 싸우느라고 손을 놓고 있었지만 진강은 조선이 청으로 나아오는 발판이다.

오삼계가 점령한 봉황성에서 연산관까지는 별다른 장애물도 없고, 연산관이 뚫리면 요양이 위험하다.

"대왕, 그러나 이때까지 몇번 공격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도르곤이 말을 이었다.

"내가 직접 나서겠다."

진강 일대에서 벌어진 싸움의 경과는 그 또한 익히 알고 있었다.

호거와 싸우느라 전력을 다하지 못한 까닭도 있었지만, 적장의 지휘는 실로 훌륭했다.

"내 적수로는 오직 이자원만 있는줄 알았거늘."

오삼계.

그자의 실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러고보니 이 자도 대왕과 나이가 같다고 들었습니다. 도대체 임자년(壬子年, 1612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선왕과 이자원, 오삼계에 도르곤까지 모두 임자년생이었으니 도도가 이런 농담을 던질만도 했다.

그러나 도르곤의 표정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도도는 형의 서늘한 분위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예친왕."

"예, 대왕."

도도는 괜히 긴장하여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그대는 아지거 형님과 함께 묵던을 지켜라. 범문정 같은 자가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호로호이나 양샨처럼 바보짓을 하면 안된다."

"아뢸 말씀이겠습니까."

"나는 양백기와 정백기를 이끌고 진강을 들이쳐 야루(????, 압록강)까지 가도 놈들을 몰아내겠다. 수크사하, 그대도 종군토록 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수크사하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

오삼계는 봉황성에 머무르며 수 차례나 청의 공격을 격퇴해냈다.

그 승리에 취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척후로부터 들어온 보고는 그런 승리감조차 싹 지워버리게 만들었다.

"구왕(九王, 도르곤)의 깃발이라고?"

오삼계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도르곤은 아홉번째로 왕작을 받아 구왕이라 불리웠는데, 오삼계도 최전선에 있다보니 청의 정치지형에는 식견이 있었다.

조정의 핵심인 도르곤이 직접 나섰다면 지금 봉황성의 전력으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그래서 오삼계는 말했다.

"성을 비우고 물러난다."

"예? 부총병 대인,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원위에서부터 오삼계를 따라왔던 부하가 외쳤다.

오삼계는 두번 이야기하지 않았다.

"싸워보지도 않고 퇴각하다니요?"

"어, 어디로 말입니까?"

"진강성."

진강성은 압록강 연안에 붙어있는 곳이다. 조선땅으로부터 강 하나만 건너면 진강성이었으니, 지원을 받기는 수월할 터였다.

그러나 싸워보지도 않고 사실상 동팔참 일대를 전부 내어주라는 말에 부하들은 크게 반발했다.

"여기에서 싸우다 죽는 것은 개죽음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오삼계는 단호했다.

'그동안은 청의 눈길에서 한발짝 물러나있었기에 무사했던 것이지 작정하고 밀고 들어온다면 버틸 재간이 없다.'

봉황성이 진강의 중심지역이라고는 하나 목숨까지 버려가며 지킬 가치는 없었다.

오삼계는 한치의 망설임없이 퇴각했다.

"오랑캐에게 짓밟히고 싶지 않으면 우리 군사를 따라 진강성으로 들어가라!"

"최소한의 가재와 식량만 챙겨서 움직여라! 곧 다시 돌아올 것이니라!"

"조선의 도원수와 부원수에게 사람을 보내 원군을 보내달라 일러라!"

겨우 정착한 백성들은 꾸역꾸역 짐을 챙겨 피난길에 올랐고, 파발은 압록강을 넘어 의주와 안주로 향했다.

그러나 오삼계의 예상보다 빨리 도르곤은 목적지에 도달했다.

"가도 놈들이 도망간다!"

"등 뒤가 허술하구나! 전부 쓸어버려라!"

"빌어먹을, 구왕이라는 자는 발에 날개라도 단 것인가!"

비어있던 봉황성을 떨어트리고 이어서 오삼계의 뒤를 추격한 청군은 교전을 벌여 크게 승리를 거뒀다.

오삼계는 간신히 진강성으로 들어가 굳게 지키기만 하며 원군을 재촉했다.

다시 요청을 받은 도원수 유림은 도성으로 파발을 띄우니, 8일만에 이를 알게 된 조정은 경악했다.

또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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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수가 치계하기를, 청나라 구왕이 직접 봉황성을 떨어트리고 진강성을 공략 중인데, 그 기세가 자못 흉험하여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기각의 형세를 펼치고는 있으나 당해내기가 어렵다 하옵니다."

도르곤이 진강으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조정으로 전해졌다.

게다가 그 전황마저 불리하다는 이야기까지 들리자 좌중의 시선은 이자원에게 쏠렸다.

'이번에도 훈련대장이 나서겠지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소? 청군과 그토록 싸워서 이겨본 이가 그 말고는 전무하지 않소.'

그들의 예상처럼 이자원은 한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 교각살우 (3)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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