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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10화 (110/213)

< 교각살우 (2) >

대동(大同)은 장성 부근의 물자가 들고 나는 중심이다.

중원과 이적(夷狄)의 땅을 가르는 중요한 분기이도 하였으니, 이곳을 반드시 되찾아야 후환이 없다는 낙양성의 말은 타당했다.

그러나 조선으로서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대동은 북경으로부터 백 수십리가 떨어져있고, 한양에서 우리군이 출진하여 닿으려면 그 수고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하온데 그 먼 곳까지 나아간 우리군이 어찌 대동을 함락시키겠사옵니까?"

신경진이 말했다.

"그리 급했다면 제 나라 군대를 모아 되찾을 일이지, 금의위도지휘사가 이 먼 조선땅까지 와서 군대를 청하는 것을 보면 나라가 무너질 지경은 아닌듯 하옵니다."

다시 우의정 강석기가 이리 말하니, 임금의 고민도 깊어졌다.

임금은 반론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실로 대동은 대국의 목줄과 같아, 이곳에 달단이 호랑이처럼 웅크리고 중원을 노린다면 반드시 화근이 될 것이다. 게다가 지금 몽골 태사를 맡고 있는 호격 같은 자도 본래는 청나라 종자로서, 반드시 쓸어없애야할 적이 아닌가?"

"전하."

이자원이 힘주어 말했다.

"호격은 멀리 있는 적이고 청나라 구왕(九王, 도르곤) 등은 가까이 있는 적이옵니다. 우선 가까이 있는 근심부터 쳐없앨 생각을 하여야지, 원지에 나가 수고로움을 감내하며 싸우는 것은 상책이 아니옵니다."

"으음."

임금은 고개를 천천히 돌려 이번에는 영의정 최명길을 향해 물었다.

"영상은 어찌 생각하는가?"

최명길은 지난 호란에서 항복을 주장했던 까닭으로 숱한 고초를 치렀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지금까지도 그를 오랑캐의 간자라며 매도하는 자들이 있으니, 오히려 여기서는 무리해서라도 명의 요청을 들어주자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명길은 일신(一身)의 정치적 유불리보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앞서는 인물이었다.

"신의 생각도 세 사람과 같사옵니다. 모쪼록 칙사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마소서."

임금의 이성은 신하들의 말을 완전히 납득했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지 않은 법이다.

"하지만 황명인데 그리하여도 되겠는가?"

"전장에 나선 장수는 임금의 명이라 해도 듣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조선 산천을 다스리는 전하시겠습니까. 사정을 설명한다면 칙사도 어쩔 수 없을 것이옵니다."

금상은 권위를 명에 의존하던 인조와는 달랐다.

그의 권위는 전쟁에서 이겼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이자원은 임금을 강하게 설득했다.

"알겠다. 오늘 논의는 여기서 파하겠다."

임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나 이자원이 삼정승의 뒤를 이어 일어서려 할 때, 임금이 그를 붙잡았다.

"어인 일로 남으라 하셨나이까."

이자원은 임금이 미련이 남아있음을 눈치챘다.

"전하, 정리(情理)에 연연하지 마시옵소서. 재조지은(再造之恩), 재조지은하지만 이미 우리 조선은 황태극을 쏘아죽이는 것으로 모든 은혜를 갚았사옵니다."

"하지만 대국이 무너진다면?"

명은 손쓰기 어려울 정도로 기울어가고 있었고, 또한 이자원이 있던 미래에선 머지 않은 시일 내에 끝내 나라가 망해 사라진다.

이자원은 이미 명의 멸망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금의 입장에서는 그가 태어나기 전, 아니 조선이 세워지기 전부터 섬기던 명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쉬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오랑캐에게 무너지는 대국을 어찌 대국이라 하겠사옵니까."

이자원이 말하자 임금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무슨 말인가?"

몹시 불경한 말이었지만, 이자원은 한치의 동요가 없었다.

임금은 그 모습을 보며 은근한 불안감을 느꼈다.

"천조는 나라가 크고 사람이 많으니 어찌 대동을 제 힘으로 되찾지 못하겠습니까. 그런 뜻에서 한 말이옵니다."

"······그러한가."

임금은 겨우 납득했다.

이자원은 임금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신이 칙사를 만나 상조(相助)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겠나이다."

"그대가?"

명에 가서 책봉을 원활히 받는데 공을 세웠고, 또한 쿠케박케르와의 교섭도 훌륭히 완수한 이자원이다.

게다가 이는 군사에 관한 일이니 이자원이 맡아보지 못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대가 또한 천조의 벼슬을 살고 있으니 안될 이유는 없겠지. 그리 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대인."

모화관의 모처.

경비서는 이들의 눈을 피해, 인영(人影) 하나가 담을 뛰어넘어 들어왔다.

숨어든 이는 후원을 거닐고 있던 칙사 낙양성에게 다가섰다.

"오랜만이군."

놀란 기색도 없이, 기다렸다는 듯 말하는 낙양성이다.

적비 또한 고저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로 그러합니다."

"네가 올린 글들은 모두 보았다. 조선군의 정예함이 괄목할 수준이라지?"

낙양성은 적비를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적비는 다섯 보 정도 간격을 두고 그를 따랐다.

낙양성은 그간 적비의 보고를 받아보며 제법 상세하게 조선의 변화를 파악하고 있었다.

"가도 총병은 과연 인물이다. 황상께서 정확히 보시었어."

숭정제가 이자원을 등용하려 했던 일을 말함이다.

과연 싸움에 나설 때마다 이기고, 또한 남만인, 왜인들을 통해 군대를 강병으로 키웠다니 제대로 된 군대가 없는 명으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조선이 순순히 지원을 보내겠나이까?"

"보내지 않는다면?"

낙양성이 적비를 돌아보며 물었다.

"산동의 염초를 살 수 있도록 허락하고, 또한 해금령에서 가도를 제외하여 교역을 튼 것은 모두 오늘 같은 날을 위함이다. 조선이 이 은혜를 안다면 군대를 내지 않고는 배기겠는가?"

"하오나 가도 총병은 날선 칼같은 인물입니다. 그가 이 나라의 군사를 대개 관장하고 있으니, 그런 도리에는 얽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적비의 말에 낙양성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러면 가도의 교역을 모조리 끊을 수밖에. 조선의 충심이 그정도에 불과한데 어찌 계속해서 은혜를 베풀겠는가? 이번 출병이 조선의 마음을 들춰보는 기회가 될 것이야."

우선은 명군만으로 호거를 물리치고 대동을 수복할 수 있느냐는 현실적인 문제가 제일 컸다.

그러나 낙양성은 과연 이 동이(東夷)들이 스스로 떠드는 것처럼 부모를 섬기듯 천조에 충성할 것인가를 알아보는 계기도 될 것이라 믿었다.

"칙사 대인, 지금은 옛날의 그 조선이 아닙니다. 천조가 교역을 끊고, 칙서 한장을 내려 나라를 흔들기에는 임금에게 토달 자 하나 없으니 되려 손해가 될 것입니다."

적비의 말에 낙양성이 눈을 치떴다.

"감히 네가 나에게 충고를 하느냐?"

낙양성은 대대로 금의위에서 봉직한 가문의 후예이고, 적비는 일개 간자에 불과하다.

주제넘게 끼어든다 싶자 낙양성은 거침없이 호통을 쳤다.

"네가 금의위에 몸을 담았다 하나 너희 일가의 죄가 완전히 사해진 것은 아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큰 경을 치게 될 것이야!"

"송구하오이다, 대인."

적비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의 마음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낙양성은 그런 적비에게 물었다.

"네가 알고 있는 가도 총병의 약점 같은 것은 없느냐?"

"······워낙에 철저한 사람인지라 잘 알지 못합니다."

적비의 눈이 잠시 흔들렸지만 고개를 떨구고 있었던 까닭에 낙양성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아는 것이 있다면 지체없이 보고토록 하라. 황상께서 이를 원하신다."

숭정제는 조선에 대해서도, 이자원에 대해서도 결코 마음을 놓지 않았다.

생사여탈이 고스란히 자신의 손에 쥐여져 있지 않으면 10할 신뢰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뿌리깊은 의심병이었던 셈이다.

"동이들 틈에 섞여 지내고 있다고 마음을 놓지는 말아라. 너는 대명의 은혜를 입은 자이니. 알겠느냐?"

"소관이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나이까."

적비는 조용히 그렇게 말했다.

===

낙양성을 향한 접대는 제법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지난날, 미야모토 무사시와 함께 왔던 왜사(倭使)에게는 가뭄을 핑계로 조촐하게 대접했던 것과 정반대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이 계속해서 답을 주지 않자 낙양성은 서서히 불쾌한 심정을 드러냈다.

"황상께서 조선의 선대왕에게 충문(忠文)이란 시호를 내리신 것은, 즉위한 뒤 천조에 공순하고 끝내 충심을 간직하여 오랑캐에게 죽음으로 맞선 일을 칭송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조선은 천조가 위기에 빠졌음에도 돌아보지 않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낙양성은 줄곧 조선의 신하들과 있을 때는 저자세를 유지해왔다.

그런 그가 참지 못하고 슬슬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하자 이자원은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곧장 모화관에 연통을 넣어 낙양성에게 만날 것을 청하였다.

"칙사 대인."

이자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굳이 대동을 되찾아야 하겠사오이까?"

이자원의 말에 낙양성이 황당하다는듯이 되물었다.

"허면? 대동을 잃은 이상 저들이 북경까지 단숨에 달려올 수도 있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는거요?"

"호격은 마시가 없으면 말라죽는 자입니다. 대동을 점령한 것은 짧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차라리 계속 대치를 유지하며 잘 달랜다면 말을 알아들을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이자원에겐 남의 나라일일 뿐이다.

호거 옆에 머리쓸줄 아는 자가 붙어있어 이를 받아들인다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이다.

"어차피 대국과 몽골이 계속 싸워보았자 이득을 보는 것은 저 여진의 무리입니다. 싸움을 피하고 계속 호격의 등을 떠밀어 청을 치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이이제이 아니겠습니까?"

"이 총병을 믿고 달단과 마시를 열었소. 하지만 오히려 화로 돌아왔으니 어찌 이 말을 믿겠소?"

그러나 낙양성은 이자원의 말에 걸려들지 않았다.

그간 마시를 통해 호거의 눈을 청으로 돌림으로써 명이 한 수 번 것은 사실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호거는 화북을 약탈하기 위해 전력을 쏟아부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자원의 말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낙양성은 항변했다.

"하오면 조선의 파병을 원하시는게로군요."

"그렇소. 천조의 사정이 매우 급하오."

낙양성은 이자원에게 말했다.

이정도까지 어려운 실정을 드러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가도를 가지고 협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자원이 둔 수는 그를 뛰어넘었다.

"대동은 너무 멉니다. 차라리 금주에 우리 군을 보낼 터이니 그쪽의 병력을 빼서 호격을 토벌하는 것이 어떻겠사오이까?"

"······!"

낙양성은 이자원의 제안에 할말을 잊었다.

조대수의 병력을 보내 대동을 되찾고, 그동안 조선이 금주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명나라 거점을 관리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홍승주의 병력은 반란을 막느라 못빼고, 조대수의 병력은 청을 막느라 빼지 못한다면 우리가 대신 청을 막아주면 된다.'

아랫돌 빼서 윗돌이라도 괴어야할 명의 입장에선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천하사방이 대명의 영토이거늘 어찌 한조각이라도 남의 손에 맡겨놓겠소?"

"가도 또한 천조의 군진이 있던 곳이지만 지금은 조선이 관리하고 있지요. 대동을 되찾기만 하면 천병이 다시 돌아와 금주를 지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되면 조선은 곧장 금주에서 철군하겠다.

이것이 이자원의 말이었다.

"어흠,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구려."

낙양성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로서도 판단이 서질 않았던 결과였다.

"아직 돌아가실 때까지 시간은 많지 않습니까. 모쪼록 황제께 잘 아뢰주시어 천조의 위엄을 다시 세워주십시오."

이자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낙양성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한번 빠진 조대수의 군대는, 아마 다시는 금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 교각살우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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