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상 (3) >
- 뿌우
대라(大螺) 소리가 울려 퍼지자 본격적으로 훈련이 시작되었다.
장창을 높이 쳐든 살수초(哨)들이 느릿느릿하게 전진하고, 포수들이 그 뒤를 따랐다.
"방포 준비!"
그렇게 표적 역할을 하는 허수아비들이 사거리까지 들어왔을 즈음, 어딘가 어색한 억양으로 군관이 명령을 내렸다.
살수초들의 뒤쪽에 버티고 있던 포수초들은 그 명령에 둘로 나뉘어 살수초의 옆에 붙어 선형적인 대형을 취했다.
"방포하라!"
명령을 들은 전열의 병사들이 화망을 형성하여 일제히 총탄을 퍼부었다.
- 투다다당!
자욱한 초연이 대열을 감쌌지만 훈련도감 병사들은 익숙한 듯이 정해진 동선을 밟아 물러났다.
첫 발포가 끝나자마자 뒤쪽에 있던 횡열이 전진하여 장전되어있던 조총을 발사했다.
그 사이 물러났던 열은 다시금 장전을 마치고 횡열의 뒤쪽에 따라붙는다.
이로써 이론상 끊임없이 일제사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반대 행진(countermarch)이다.
물론 거기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수없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지난 3년간 피나는 훈련을 받은 훈국군은 이것을 능숙하게 해내고 있었다.
어느새 허수아비들은 수백발의 총탄에 걸레짝이 되어 나가떨어졌다.
"대단하군! 홀란도에서도 이런 모습을 봤지만 우리군도 뒤떨어지지 아니하지 않은가!"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본 송시열은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남만인들이 군사를 잘 다룬다는 말은 조선을 떠나기 전에도 익히 들어보았지만, 그가 실제로 유럽에 가서 본 군대는 차원이 달랐다.
속오군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의 중앙군도 과연 여기에 도달하려면 얼마 정도의 시간을 들여야할지 막막하던 송시열이었다.
그러나 불과 3년만에 훈련도감은 유사하게나마 흉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암스테르담에서 봤던 사열식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 정강함일세."
"과연, 네덜란드인 교관들을 불러들였다고 하더니."
송시열은 군관 쪽을 바라보았다.
노란 머리칼에 아직 딱 붙지 않은 조선어.
이자원이 쿠케박케르와 VOC를 통해 초빙했다는 군관들이 틀림없었다.
"쉿,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군."
초연이 가시자 이번에는 조선인 군관이 외쳤다.
"전원 착검하라!"
병사들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총검을 조총의 총구에 결합했다.
플러그식 총검(plug bayonet)이다.
총신까지 더하여 다섯 자(약 150cm)나 되는 단창이 순식간에 생겨나자, 군관이 호령했다.
"돌격!"
"으아아아아!"
훈국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너덜너덜해진 표적으로 돌진해 총검을 쑤셔 넣었다.
찔러, 때려, 좌베어, 우베어 등등 그간 배워온 총검술의 모든 묘리를 동원하여 허수아비를 도륙하는 것이다.
그 기세에 구경하던 이들이 찬탄을 터뜨렸다.
"저만하면 오랑캐들은 단숨에 쓰러뜨리겠구먼!"
"오랑캐라 해도 저리 총창을 찔러넣으면 어찌 버티겠는가!"
한편 벌판 한쪽에서 보병들의 시범이 한창일 때, 다른 곳에서는 기병들이 자신들의 무용을 뽀내고 있었다.
- 두두두두
멀리서 은은한 진동이 울려퍼졌다.
아차산 인근에서부터 돌아나온 기병들이 벌판으로 입성했다. 동만주에서 들여온 육중한 전마(戰馬)들을 탄 그들은 표적들을 향해 한치의 망설임없이 달려들었다.
"나 훈국 마병별장 황익이 왔다! 오랑캐들은 모두 목을 내어놓아라!"
경극이라도 하듯이 선두에 서있는 장수가 그렇게 외쳤다.
허수아비에 대고 할말은 아니지만, 그 쇼맨십은 백성들에게는 잘먹힌 모양이었다.
"우와아아아아!"
휘둘러지는 편곤에 허수아비의 목이 하늘로 뜨고, 말발굽에 치여 몸통이 짓이겨졌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판에 수없이 많이 서있던 표적들이 쓰러지는 모습에 백성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 옆에서는 조금 다른 시범이 펼쳐지고 있었다.
"도츠게키(突?, 돌격하라)!"
왜갑을 입은 군관이 일본도를 뽑아들고 소리치자 병사들은 악을 지르며 달려갔다.
번뜩이는 일본도 수백 자루가 허공을 갈랐다.
순식간에 허수아비들이 일도양단되어 비산하고, 조각난 몸뚱아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일명 항왜군들이 보여주는 퍼포먼스였다.
이 시대 조선의 대일 감정이 그리 좋을리는 없기에 이쪽에는 찬탄을 보내는 구경꾼이 별로 없었지만, 이들 또한 이자원이 공을 들여 육성한 부대다.
거기까지 지켜보던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갑자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거기, 두 분께서는 전 예판이신 신독재 대감의 제자분들이 아니시오?"
"그러하오만?"
송시열과 송준길이 의아해하며 묻자 말을 건넨 이가 대답했다.
"본관은 주상 전하를 모시는 선전관이오. 전하께서 두 분께서 여기있다는 말을 듣고 불러오라 하셨으니 따라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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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수고했다!"
임금이 외쳤다.
오군영-그러니까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에 정초군까지-이 모두 모여 합동 훈련을 펼치는 이곳은 살곶이벌이다.
한양 도성 동쪽으로부터 아차산까지 펼쳐진 평야로, 옛날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쏜 화살이 이곳에 박혔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장관이로구나!"
임금은 왕실 식구들에 심지어 원자 석철까지 데리고 나와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기 전,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갖추고 창칼을 번뜩이는 오군영 군사들만 보아도 가슴이 부풀어 오르던 그였다.
오늘 오군영 병사들이 보여준 모습은 임금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만하면 오랑캐들을 모조리 쓸어없앨 수 있을 것이다. 기껏해봐야 창칼로 무장하고 기병만을 장기로 삼는 놈들이 어찌 우리 군사를 이기겠느냐? 저 훈련도감이 하는 양을 보아라."
개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이들은 단연 훈련도감이다.
임금의 총신인 이자원이 손수 이끌고 있는데다, 예산도 넉넉하고 남만인 교관, 항왜들이나 아민에게서 들여온 전마 등은 훈련도감에 최우선적으로 배치되었다.
따라서 임금의 칭찬도 훈련도감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임금은 자신의 곁에 동생이 앉아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
"어영청도 충분히 잘해냈다."
"예, 전하."
잠시 주눅이 들었던 봉림대군은 임금의 격려에 간신히 기운을 찾아 대답했다.
어영청도 이제는 중군 딱지를 떼고 대장에 오른 이완(李浣)의 통솔 아래 제법 정예스런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6천 명에 달하는 훈련도감과 달리 2천 5백 명 수준에 불과하고 재정도 비교적 부족하다. 아무래도 눈에 덜 띌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근본적으로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바탕으로 아직까지 삼수병(三手兵)제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였다.
이는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하여 총을 다루는 포수와 창검을 쓰는 살수, 그리고 활을 다루는 사수가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체제로서 임진왜란의 충격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이 나름대로 발전시킨 결과였다.
그러나 이자원이 병조와 훈련도감을 장악하고 나서는 이런 삼수병 편제에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앞으로의 군대는 더 많은 화력을 확보하는데 중점을 기울여야 한다.'
물론 청군을 상대로 대책없이 근접 병종을 도태시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수와 살수의 역할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훈련도감에서 사수들의 비율은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었고, 여러 종류의 창검을 다루던 살수들은 장창병(長槍兵) 하나로 통합되었다.
"남만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하옵니다. 기존 삼수병은 너무 번잡하니 어영청도 차차 손을 보아야할 것이옵니다."
역시나 임금의 곁에서 훈련을 지켜보던 이자원이 나지막이 그렇게 말했다.
그간은 훈련도감부터 손보는데 바빴지만 이젠 어영청으로 시선을 돌릴 때였다.
"훈국에서 그러듯이 사수들을 모두 내쫓으란 말이오?"
봉림대군이 물었다.
실제로 그간 훈련도감에서 포수의 비율은 대대적으로 상승한 반면 사수는 전부 도태되었다.
살수들의 사정은 그나마 나았다.
청군의 돌격을 막으려면 근접 병종의 존재는 필수였고, 창수들은 대부분 낭선이나 당파를 버리고 장창을 쥐는 식으로 갈아탔다.
정 창도 못쓰고 검을 놓지도 못하겠다는 자들은 미야모토 무사시의 훈도를 받아 별도 부대로 편성되었고.
그러나 활을 쏘는 사수들은 아무리 숙련된 인원이라 할지라도 조금 뒤떨어지는 군영인 총융청이나 수어청으로 보내졌다.
"척원경(元敬, 척계광의 자)의 병법은 지극히 도통한 것이오. 조총의 쓰임은 유용한 것이지만 활 또한 마찬가지일진데 굳이 활 잘쓰는 이를 싸움에서 배제할 이유는 무엇이오?"
조선인은 원래 활 잘쏘는 민족이요, 아직까지는 활의 효용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자원은 봉림대군의 항변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가 삼수병제 대신 선택한 것이 바로 전면적인 파이크 앤 샷(Pike and Shot).
장창으로 무장한 병사와 화기의 조합이었다.
전쟁에서 더 많은 화력이 확보되고, 총검의 사용이 보편화되기까지 현재도 유럽에서 절찬리에 쓰이고 있는 전술이었다.
이자원은 이것을 네덜란드인 교관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속오군까지야 어렵겠지만 최소한 삼군문(三軍門)만이라도 완전히 탈바꿈해야한다.'
파이크 앤 샷의 단점은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당장 장창만 하더라도 재료가 되는 가시나무나 종가시나무의 수효가 적어 속오군들은 대개 대나무로 창대를 삼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전술 자체가 고강도의 훈련을 필요로 하니 속오군 전체를 이리 편성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망상이다.
별 수 없이 속오군은 비교적 종전에 비해 넉넉히 생산되고 있는 화약을 이용해 화기(火器)의 사용법을 보다 능숙하게 익히게 하는 한편으로, 수시로 병기 재고와 농한기 때 이루어지는 훈련상황을 점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이전에 군적을 제대로 정리하는 것부터가 문제였지만, 이것은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대됨에 따라 전결을 조사하면서 겸사겸사 같이 수행하고 있으니 차차 해결될 일이었다.
한편 오군영 중 총융청과 수어청은 일종의 수비적 군영이었으니 제외하더라도, 어영청과 정초군은 훈련도감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가장 규모가 큰 훈국이 이미 개편을 완료하였으니 어영청과 정초군도 조만간 어렵지 않게 군세를 갖출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자원은 봉림대군 대신 임금에게 말했다.
"이미 도원수 유림과 부원수 임경업이 북방군을 밤낮으로 조련하고 있사오니 삼군문만 제대로 개편이 완료된다면 북벌을 나설 수 있사옵니다."
서북군 또한 삼남의 속오군과 그리 사정이 다르지 않을테지만 나름 재정을 신경쓴데다 유림과 임경업은 노련한 장수들이었으니 그쪽은 맡겨놓아도 될 것이었다.
"삼군문이 1만, 조선 전역의 속오군이 약 10만······."
임금이 중얼거렸다.
전조 말 요동 정벌 때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실질적으로 원정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5만 명이 최대였다.
"청군의 수효는 그 절반 정도 될 것이라 하였지."
아민이 동해여진을 데리고 떨어져나갔고, 호거가 상삼기를 뜯어다 몽골에서 독립했으니 강덕제의 청 조정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약 2만 5천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숫자로는 조선군이 두배지만 임금은 지난 호란 때의 일을 기억했다.
"과연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요동으로 진격하기만 하면 한인(漢人) 의사들이 불길처럼 들고 일어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옵니다, 전하."
봉림대군이 그리 말했지만 임금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그는 이자원을 보며 말했다.
"그대는 병조의 참판이니 어영청의 일도 관장할만하다. 어영대장과 협의하여 뜻대로 추진해보도록 하라."
봉림대군이 뭐라 반박할 틈도 없이 임금은 옆의 내관을 보고 말했다.
"남만에서 돌아온 송시열과 송준길을 불러오라 하였거늘 어째서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가?"
"선전관이 갔사오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옵소서, 전하."
그때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방금 보냈던 선전관이 돌아와 외쳤다.
"전하, 송시열과 송준길 입시이옵니다."
< 변화상 (3)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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