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04화 (104/213)

< 냇물이 향하는 곳 (8) >

임금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아무리 저주를 퍼부었다고는 하나 폐주를 죽이려고 들 필요까지 있겠는가?"

조선왕실과 연관된 저주 사건은 종종 있어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원래 역사에서 정명공주나 민회빈 강씨가 연루된 저주 사건이 그러했고, 효종대에는 귀인 조씨의 저주 사건이 있었지 않은가.

조선은 대개는 예외없이 관련자를 강하게 처벌해왔으니, 저주가 실제로 사람을 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숙청의 빌미로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숙청하기엔 껄끄러운 인간.

그 대안으로 암살을 제시했지만 임금의 마음 어딘가에는 주저함이 남아있는듯했다.

"전하, 어심을 굳게 하소서."

이자원은 임금에게 속삭였다.

"광해가 어찌되었든 역심을 품었음은 분명한 바이오니 반드시 잘라내야 하옵니다. 어찌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있겠사옵니까?"

"음."

임금은 입을 다물었다.

이자원의 말은 틀린 적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목숨까지 살린 적이 있지 않은가.

"폐주는 권대용 같은 하잘것없는 역적과도 다르다. 인조대왕의 지극한 성덕을 이런 식으로 갚다니, 어찌 사람이라면 이럴 수가 있겠는가."

임금은 그러면서 말했다.

"그대가 맡아서 잘 처리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두 군신의 음모가 무르익고 있었다.

===

조선의 관리들은 오전 7시에 출근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어디까지나 원칙이 그러할 뿐 고관들은 건강을 핑계로 집에서 느지막이 일어나거나 일이 있을 때만 등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자원은 대장이 되고 나서도 언제나 꼭두새벽부터 훈련도감에 등청하는 것을 빼먹지 않았다.

쿠케박케르가 선물한 자명종의 시간도 거기에 맞춰져있었다.

이자원은 그보다 먼저 일어나 나와있던 중군 김충선과 함께 훈국 일원들의 훈련 사항을 점검하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궁본무장(宮本武?, 미야모토 무사시)이란 자가 조선에 남아 장졸들을 가르친지도 오래되었는데 어째 효과가 있어 보이시오?"

"확실히 검호라 불리던 자답게 본신의 무예는 따라갈 자가 없사오이다. 개중 칼 잘쓰는 이들은 그의 지도를 받고 성취가 일취월장한터라 싸움이 일어나면 선봉을 맡기기에 모자람이 없소이다."

김충선이 대답했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검술은 이천일류(二天一流)라 하여 두 자루 칼을 쓰는 것을 장기로 삼는다.

그러나 정식 제자도 아닌 훈련도감 병사들이 그 진수(眞手)를 사사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대규모로 군대와 군대가 맞부딪히는 전장에서 이도류가 얼마나 효용성이 있을지는 의문이었기에, 살수대에게 좀 더 실전적인 검술을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 중에서 뛰어난 자들-주로 항왜 2세들이었다-은 무사시가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검술을 보아주는 모양이었는데, 효과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개개인의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장에서 전열을 유지하고 더 많은 화력을 확보하는 것이 더욱 중하오. 홀란도인들이 통교를 하러왔을 때 이것과 관련하여 요청한 부분이 있으니 중군께서는 참고하여주시오."

"알겠사오이다, 대장 영감."

김충선과의 면담이 끝나고 나자 박철균이 곧 그를 찾았다.

아직까진 업무에 복귀하지 않은 그였지만, 이자원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대장 영감."

박철균이 그를 부르자 이자원은 뒤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적비."

"예, 장군."

"잠시 나가있도록."

뒤에 서있던 적비는 아무말없이 움직였다.

호위라는 명목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이자원과 함께 하고 있는 적비이니 둘 사이의 대화가 궁금할 법도 하건만 명령을 거역하지는 않는 것이다.

"광해군을 처리해야겠다."

이자원이 내뱉자 박철균이 잠시 숨을 삼켰다.

"천륜을 어기는 짓이라고 생각하는가?"

"······소관이 어찌 그런 말을 하겠사오이까."

천륜을 따지며 이자원을 비난하기에는 자신 또한 손에 피를 묻혔지 않은가.

오히려 이자원이 본인에게는 다른 기준을 적용했다면, 가슴 속에서 깊은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자원은 스스로도 천륜을 운운한 것이 우스웠는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와서 하늘에 더 지을 죄 같은 것은 없다."

"소관에게 시킬 일이 있으시면 무엇이든 말씀해주소서."

박철균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소관이 가겠사오이다."

"좋다."

박철균은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방법을 청했다.

이자원은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박철균을 내보냈다.

죄책감 같은 것은 들지 않았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왔다."

광해군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

"웬 생선찜이냐?"

광해군은 밥상에 올라온 음식을 보며 물었다.

저번에 하사품 조로 받은 술과 고기처럼 특별할 때를 제외하면, 항상 곡소리 나던 밥상 위에 이런 물건이 올라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모시는 양반 생선이나 해드리라고 이야기가 내려온 모양이오. 낸들 하고 싶어서 했겠소?"

계집종은 여느때처럼 괄시하는 태도로 대답했다.

'예끼, 망할 년 같으니.'

그러나 저 아이가 없으면 누구에게 밥을 얻어먹고 빨래를 시킨단 말인가.

그나마 왕 체면에 손수 물묻히고 살지 않는 것은 나라에서 붙여준 종 덕분이라, 웬만해선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주의하는 광해군이었다.

"너도 들겠느냐?"

"나는 생각이 없수다."

그런 의미에서 기껏 호의로 말했더니 툴툴거리며 거절하는 계집종이다.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광해군은 젓가락으로 한점을 떴다.

대충 국끓여줄 때 들어가는 잡어와 달리 감칠맛이 맴도는 것이, 과연 진미(珍味)라 할만했다.

밥이 끊임없이 들어가는 것이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식사다 싶었다.

광해군은 내심 감탄하며 물었다.

"이 생선 이름이 무엇이냐?"

"하돈(河豚)이라고 들었수."

그 말을 들은 광해군의 입가에서 미소가 가셨다.

"하돈. 하돈이라, 허허."

곧 광해군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돈은 복어를 말함이다.

외양과 울음소리가 돼지를 닮았기에 이 시대에는 복어를 하돈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맛만큼은 제일이었던지라 독을 감수하고서라도 먹는 사람이 많았는데, 심심찮게 사람이 죽어나가곤 하였다.

물론 임금의 수라상에는 감히 올리지 못했던 물건이었으니 광해군도 먹어본 적은 없었다.

"허허, 지난날의 죄과를 이렇게 돌려받는단 말인가."

광해군은 전날 박철균이 찾아왔을 때 취기가 올라 심중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일을 떠올렸다.

"임금이 원하면 살아날 길은 없는 것이겠지."

그가 해봤으니 잘 아는 일이었다.

그는 계집종의 대답을 들은 뒤에도 꾸역꾸역 밥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보위에 있을 적에도 먹어보지 못한 진미를 이제서야 먹게 되었구나."

복어찜을 천천히 씹어 삼키던 광해군의 혀가 뻣뻣하게 굳었다.

털썩 쓰러진 광해군을 보며 계집종은 천천히 뒷걸음질 쳐서 싸리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시킨대로 했사옵니다, 양반 나리."

늙은이 수발 드는 것도 지긋지긋하여 이참에 기회를 타서 저지른 짓이지만 그녀의 손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새로운 삶을 약속한 눈 앞의 남자에게 동앗줄이라도 찾는듯이 올려다보았다.

"수고했다."

그순간 종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목숨을 거둔 계집종의 시체를 들쳐업으며 박철균은 자리를 빠져나갔다.

===

때마침 이자원 또한 고향에서 온 급한 전갈을 받고 양주에 내려와있었다.

당숙이 보낸 그 편지는 적모에 관한 것이었다.

"내 생모에 관하여 아시오?"

이자원은 여전히 방에 누워만 있는 적모를 보며 물었다.

퀴퀴한 욕창 냄새가 풍겼지만 개의치 않았다.

"알다마다."

적모는 아련한 옛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어디선가 핏덩이 같은 아기 하나를 데려왔을 때도 그랬지만, 한해쯤 지나 반병신이 되어 출옥한 여자를 남편이 업어서 집에 데려다 놓았을 때는 기겁을 했었다.

"어쩌면 그 모습에 투기했을지도 모르오."

한번도 대단한 애정을 보여준 적은 없는 남편이 남의 여자를 구하기 위해 벌인 짓을 듣고 까무러칠 뻔했던 그녀였다.

"어찌 사람이 그랬을까······."

적모가 애생을 질투했든 그렇지 않든, 이자원으로선 관심없는 이야기였다.

애생도, 본신의 아버지도 이미 떠나간지 오래였고, 그와는 관계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 일에 연루된 마지막 사람인 적모마저도, 숨을 거두기 일보 직전이었다.

"미안하오."

이자원은 본신을 대신해 사과를 건넸다.

"평생이 살얼음판 위를 걷는 심정이었을테니."

차라리 적모가 경원시하는 것 정도라면 본신에게 매우 잘대해준 편이 아닐까.

"대장의 아버지는 만나보았소?"

"그렇소."

이자원이 말했다.

"전 금군별장 이중전이지. 세상에는 그렇게 알려졌고, 마지막까지 그러할 것이오."

이자원은 단호히 말했다.

출생의 비밀 따위가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면, 그것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하면 된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나는 이날 이때까지 그 사실을 함구하며 살았소. 대장은 염려하지 마시오."

"그 점 하나는 고맙군."

적모는 얼마 뒤 숨을 거두었다.

더이상 역사 뒤편에 숨겨진 비밀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원래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

"신의 어미가 죽어 자식된 도리로 3년상을 치러야 하겠기에 이만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코자 하옵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아니된다. 오랑캐들이 서로 다투는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어찌 사직을 허락하겠느냐. 탈정기복을 명하노니 그대로 따르도록 하라."

그런 연극 한편으로 모든 문제는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본래라면 이자원이 정치적으로 물러나기 가장 쉬운 시점이 이때였을 것이다.

부모의 상을 당한 이가 관직에 머물러 있고자 하면 눈총을 받는 것이 예사요, 불효하다 하여 탄핵까지 당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미 이자원의 반대파는 정치적으로 거의 몰락해있었고, 임금의 비호까지 더해지니 양주에서 3일장을 마치자마자 이자원은 곧장 병조와 훈련도감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계집종이 광해군에게 매여 수발드는 것에 성을 내고 하돈을 올렸사옵니다. 광해군이 그것을 잘못 먹고 죽었는데, 종은 그 길로 도망쳐 숨어버렸으니 전국에 영을 내려 수색을 명하소서."

"윤허한다."

광해군이 하돈을 잘못 먹고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그 어디에도 임금이나 이자원이 연루되어 있다는 풍문은 떠돌지 않았다.

모든 권세를 잃고 물러난 광해군을 이제 와서 죽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본래 이런 음모론이야 말로 뽐내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퍼뜨리기 좋아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오히려 제가 돌아가는 정세에 밝음을 내세워 윗사람이 주도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단정지어 버렸다.

그렇게 광해군의 죽음마저 잊혀져갈 무렵.

"스승께서는 요즘 어찌 지내십니까?"

봉림대군이 오랜만에 그의 집을 찾은 송시열에게 물었다.

"이미 관직마저 관둔 사람에게 스승이라니요."

"한번 사제의 연을 맺었는데 어찌 스승이 아니겠습니까?"

"하하······."

송시열은 차를 들이키며 웃었다.

청서 내의 반(反)강석기 연합은 완전히 붕괴했다.

이조판서 정온 계열의 관리들은 노골적으로 산림과 갈라섰다.

김집은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방패막이로서만 기능하고 있을 뿐, 한 세력의 영수라기엔 많이 초라해져버렸다.

자신들이 함부로 이자원을 옭아매려 한 것이 이리 돌아올줄은 누가 알았을까.

"곧 홀란도인들이 온다지요."

"예, 그리 들었습니다."

송시열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말했다.

"한번 그들을 따라 나서보아야겠습니다. 대군 대감께서 힘을 써주십시오."

< 냇물이 향하는 곳 (8) > 끝

ⓒ 핏콩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