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냇물이 향하는 곳 (7) >
박철균은 뜬금없이 교동까지 가라는 이자원의 말을 떠올렸다.
'교동은 무엇하러 가라는 말씀이시오이까?'
'폐주의 동정을 살펴보아라.'
이자원은 덧붙여 말했다.
'나는 도성을 벗어나기 어려운데다 이름이 알려져있으니 네가 한번 둘러보고 오라는 것이다.'
'전하의 어명이시오이까?'
박철균은 혹 임금이 광해군을 꺼려 감시하라는 연유인줄로 알고 그리 물었다.
'아니.'
그러나 이자원은 고개를 저었다.
'나의 명이다.'
훈련대장이 이미 한참 전 실권(失權)하여 야인의 몸이 된 광해군에게 왜 관심을 갖는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박철균은 이자원의 비밀이라면 끝까지 입을 다물 용의가 있었지만, 이자원은 끝내 그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
'혹시 폐주가 대장께 무슨 해가 된다면, 그때는······ 어찌 처결하실 요량이시오이까?'
박철균이 슬쩍 물어보자 이자원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글쎄.'
그러고는 이어서 말했다.
'해오던대로 해야겠지.'
===
"이자원."
광해군이 그 이름을 되뇌었다.
"오랑캐들과의 전쟁에서 대공을 세운 이라고 들었네."
"그렇지요."
광해군은 어쩐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심하(深河, 사르후)에서 묻은 우리 군사의 고혼(孤魂)이 몇이련고."
"족히 1만은 될것이외다."
박철균은 늙은 폐왕(廢王)의 마음 따윈 헤아리지 않고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광해군의 얼굴은 더욱 쓸쓸해졌다.
"보위에 있을 적엔 항상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거늘, 돌이켜보니 실수투성이로구나."
"그래서 주상 전하의 쾌유를 비신게요?"
박철균의 물음에 광해군은 잠시 눈을 끔뻑였다.
"나리께서 하지 못한 일을 금상께서 하고 계시지 않소?"
"허허, 그럴수도 있겠군."
광해군이 흰 터럭이 대부분인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랑캐를 막아내고, 가도의 폐단을 바로잡은데다 대동의 법을 세워 백성을 편안케 하셨으니 이 늙은이의 치세와는 정반대로고."
그러던 광해군은 문득 태도를 바꿔 자문하듯이 말했다.
"그런데, 그것들이 전부 금상의 덕인가? 훈련대장 이자원이란 자가 이뤄낸 것이 아닌가?"
박철균이 그런 광해군을 차분히 응시했다.
"내게도 이자원 같은 자가 한 사람만 있었다면 이리되진 않았을 것이야."
광해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버지에겐 이순신이 있었고, 지금의 주상에겐 이자원이 있었기에 전란을 극복한 것이다.
만약 그에게도 그만한 신하가 있었다면 금상의 위업은 모두 자신의 것이 되지 않았을까.
"나리께도 그런 사람들은 있었을 것이오. 대장 영감쯤 되는 분은 몰라도 말이오."
그러나 광해군은 누구도 믿지 않았고, 스스로 발밑을 무너뜨렸다.
그렇기에 그는 교동에 유배되어 남은 삶을 마쳐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래, 그랬던가."
광해군은 허탈하게 말했다.
공허한 마음을 달래고자 광해군은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오랜만에 취기가 올라오고, 이전부터 품고 있던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금군별장 이중전의 얼자라고 들었네."
박철균은 고개를 들어 광해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자원 말일세. 이중전은 내가 보위에 있을 때 관직을 살던 이였지."
거기까진 박철균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어서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상하지. 그 친구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적자는 없었던 덕에 대장께서 성서탈적(聖庶奪嫡)할 수 있으셨다 들었소이다."
"아니, 적자 뿐만 아니라 본래 그는 첩 하나 들이지 않은 이였단 말일세."
광해군은 이중전을 기억했다.
별다른 문리(文理)를 뻗치지도 못하고, 집안도 보잘것없었던 무관.
그렇기에 장가는 들었으되 첩질은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본인 또한 여색에 별 관심이 없는 성격이었고 말이다.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광해군의 입에서 옛날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
처음부터 하옥되었다는 애생에게 관심을 두었던 것은 아니다.
형인 임해군이 발정난 개처럼 날뛰며 여자를 취하는 것이야 항상 있던 일이었고, 애생 또한 그렇게 얻은 여자 중 하나라 생각했다.
임해군이 애생의 본래 남편이었던 유희서를 죽인 사건도 그가 워낙 고관이기도 했거니와, 어쩌면 정치적 방안이 되지 않을까 해서였을 뿐 잡혀들어온 애생 그 자체에 대해선 별다른 흥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문 때 그녀를 보기 전까진 말이다.
'과연 임해군이 탐낼만 하구나.'
그때만 해도 자신은 나름 젊었고, 혈기도 왕성했다.
하지만 애생을 대놓고 취했을 때 쏟아질 무수한 비난은 결코 득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 뒤로 몇차례의 심문이 있었고, 애생은 딱히 무슨 처분이 내려지지 않은 채로 삼성에서 형관으로 이감되었다.
그즈음 만난 사람이 옥관으로 있던 이중전이었다.
힘없는 무관 출신인 그가 임금의 밤나들이를 감히 막을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오히려 그에게 적극 협조해야할 판이었으니.
광해군은 그런 이중전이 입을 얌전히 틀어막은 대가로 품계를 올려주고 은전을 내려주었다.
이중전은 그것을 딱히 반기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애생이 갇힌지도 수년이 지났을 때 광해군은 드디어 그 소식을 전해듣게 되었다.
과묵했던 이중전이 임금에게 말을 꺼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애생이 아이를 가졌다고?'
'예. 옥에서는 해산을 하기가 힘드오니 잠시 출옥시켜 의원에게 맡기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그러나 아니될 말.
깊고 깊은 형관이면 모르되 애생이 밖으로 나간다면 무슨 추문이 돌지 몰랐다.
그렇기에 광해군은 그때까지 신임하던 이중전에게 일렀다.
'네가 처리해라.'
하지만 이중전은 처음으로 광해군의 명을 거슬렀다.
애생을 몰래 데리고 나가서 아이를 낳게 한 것이다.
감히 죄인을 끌고 함부로 옥을 드나든 죄를 물을수도 있었지만, 광해군은 특별히 이중전을 용서해주기로 했다.
그를 내치고 다른 사람을 쓰기에는 그렇게 부리기 편한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해군은 애생에게 흥미를 잃었다.
조선의 지존에게 있어 궁중의 모든 여자는 그의 것.
한번 질려버린 여자를 찾기 위해 옥까지 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이중전만은, 입에 자물쇠를 채우기 위해 아예 금군으로 소속을 옮기고 승차도 시켜주었다.
'애생의 소식을 들으니 반쯤 죽어가고 있다 하옵니다.'
'너는 형조의 옥관이 아니라 금군 소속이 아니냐? 신경쓰지 말아라.'
광해군은 그렇게 무시했다.
그러나 이중전은 완강했다.
'아무래도 자식을 보고 싶어하는 것 같사옵니다.'
'그래서 어찌하란 말이냐? 죄인을 내보내달라고? 너도 그 미색에 혹한 것이냐?'
광해군은 짜증스럽게 되물었지만 이중전은 거듭 그것을 청했다.
실로 기이할 정도의 집착이었다.
크게 경을 치려던 광해군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좋다.'
그 무렵 그를 괴롭히던 골치 아픈 문제.
그것을 떠안을 사람이 보였던 것이다.
'애생을 내보내주마.'
광해군은 단서를 달았다.
'네가 나를 위해 일을 하나 해준다면 말이다.'
애생이 석방되고 얼마 뒤.
영창대군이 죽었다.
애생은 나가기 전 압슬형을 당했다.
여기저기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다니지 못하게 취한 조치였고, 오래 목숨을 이어가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겨진 그 자식은.
이중전이 낳게 했던 애생의 자식은 어디로 갔을까.
===
교동에서 돌아온 박철균이 이자원을 만난 것은 늦은 밤, 막 이자원이 집으로 들어서려 하던 때였다.
집에는 금줄이 쳐져있던지라 함부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앞에서 서성거리던 그는 이자원을 붙들었다.
"어떠하던가?"
이자원은 놀란 기색도 없이 그에게 물었다.
"대장 영감."
그 물음에 박철균은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대장 영감께오서는 알고 계셨사오이까?"
"아무래도 사실이었나보군."
이자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으로 두가지가 확실해졌다.
첫째는 박승길의 추측이 맞다는 것, 둘째는······.
"광해군 또한 그것을 알고 있다."
술에 취했다곤 하나 그 이야기를 남에게 털어놓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한 셈이 아닌가.
"교동까지 다녀오느라 수고했다. 들어가서 일을 보아라."
"저, 대장 영감······."
"폐주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모두 잊어버려라. 나도 그러할 터이니."
박철균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자원은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방에는 유주가 아기를 보고 있었다.
- 으아앙!
아이는 이자원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움직여야할지 계산하느라 딱딱하게 굳어있던 이자원의 표정이 살짝 놀라 흐트러졌다.
"아버지가 낯설어 그런가봅니다."
그를 안고 얼르던 유주가 이자원에게 말했다.
"자주 얼굴을 비춰주셔야 아버지를 알아보지요. 한번 안아보세요."
유주에게서 아기를 받아든 이자원은 멀뚱히 히끅거리는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 안아봐요.
병원에서 처음 아이를 안았던 순간이 이자원의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이자원은 말없이 그 아이를 유주에게 건네주었다.
"더 안아보시지 않고요?"
"이쯤하면 되었소."
이자원은 물끄러미 유주를 쳐다보다 말했다.
"자식에겐 좋은 것만 보여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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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상 체제는 오래가진 않았다.
키니네로 학질이 말끔하게 고쳐진 임금은 얼마간 원기를 회복한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이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모두 지극한 하늘의 보살핌이옵니다."
"온백성이 전하의 쾌차를 기원한 까닭이 아니겠사옵니까. 심지어 저 폐주 광해까지 그러했다 들었사옵니다."
임금은 병이 나은데다 기분좋은 인사까지 받자 흥겨웠다.
그런 기분은 신하들과 모여앉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원상들이 수행한 일에는 한치 흠잡을데가 없구나. 실로 내가 인복이 많음이다."
영의정 최명길은 두말할 것 없는 명재상이고, 좌의정 신경진은 군사 전문가였으며 우의정 강석기 또한 능력 좋은 청백리였으니 가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광해군의 치성에 은사를 내리고자 술과 음식을 전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임금은 그저 알아서 잘 처리했으리라 생각하며 넘겼다.
이자원이 은밀히 임금을 찾기 전까지는 말이다.
"광해군이 실상은 나를 저주했던 것이라고?"
임금이 인상을 크게 찌푸리고 물었다.
"예, 전하. 신의 부하가 유배지에서 이런 것을 찾았사옵니다."
임금이 떨리는 손으로 붓으로 쓴 부적을 건네받았다.
"종이에 전하의 휘를 함부로 쓰고 그 밑에 이것을 두었다 하였사옵니다. 이러한 정황을 보건대 겉으로는 치성을 드리는체 하였으나 사실은 깊이 기도하여 살(殺)을 보낸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무속의 헛된 술수 중에 그런 것이 있다 들었다."
임금은 그야말로 분개했다.
광해군을 갸륵하게 여기는 마음이 배신감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찌 처결해야하겠는가?"
"저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아니요, 인조대왕께서도 광해군을 끝까지 사사치 아니하셨으니 드러내놓고 처벌할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그런 마음 자체를 품은 것이 문제이다!"
임금이 일갈했다.
지금이야 저주지만 기회가 주어지면 무슨 일을 더 벌이지 못하겠는가.
이괄부터 시작하여 최근의 권대용까지, 인조대왕과 그를 흔들려는 음모는 끊임없이 있어왔다.
자신이 죽었다면 어린 원자 하나만 남았을테니, 광해군이 엉뚱한 생각을 품고 그것을 노렸다 해도 어찌 알겠는가?
"신에게 맡겨주소서."
"그대에게?"
임금은 이자원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영창대군이 어떻게 죽었는지 혹 아시나이까?"
"음."
임금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병참, 자네······."
"폐주의 나이가 예순이 넘었으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지요."
이자원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 냇물이 향하는 곳 (7)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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