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02화 (10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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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냇물이 향하는 곳 (6) >

"키니네의 약효가 검증되었습니다! 오, 주님! 말라리아를 치료할 성약을 내려주심에 감사하나이다!"

예수회 신부들은 임금의 병세가 차도를 보인 것에 제 일처럼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미에서야 원주민들이 오랜 경험을 통해 말라리아에 특효약임을 증명해왔지만 그곳을 벗어나면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이들조차 약효를 확신하지는 못했지 않은가.

그러나 비록 이교도 군주라고는 하나 평민도 아닌, 지극히 높은 신분이 키니네를 통해 목숨을 건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예수회의 주장에 한층 더 강한 설득력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이 사실을 북경의 아담 샬 신부님께도 알려야겠습니다. 유럽까지 소식이 닿도록요!"

신부들은 이자원을 통해 소식을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자원이 가도를 토벌한 이래 명과의 연락은 대개 가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예수회의 연락망 또한 그들의 것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선교 자체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당장 어의들도 손쓰지 못하고 있던 학질을 이들 남만승들이 바로잡았지 않은가.

이 피부 허옇고 코큰 오랑캐들을 낮잡아보거나, 혹은 무슨 사술을 부리냐는 식으로 경계하던 이들마저 입을 다물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천것들이 다니는 오랑캐식 불도(佛道)'라는 인식이 깨진 것이다.

예수회 신부들은 신이 나서 이자원에게 감사를 표했다.

비록 그 비싼 키니네를 소모했지만 그이상의 가치가 있었던 일이었다.

"이참에 학교를 설립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감사 인사를 받고 있던 이자원이 물었다.

"하, 학교 말씀이십니까?"

지금까지는 예수회 신부들이 필수인력들에게 붙어 주먹구구식으로 지식과 기술을 전수해왔지만, 언제까지고 그럴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예 성당 옆에 학당을 짓고 의술과 라틴어 등을 본격적으로 가르쳐보라는 이자원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부족한데······."

"그렇다면 북경에 편지를 보내 인원을 더 확충해달라 부탁하도록."

예수회 측에서는 이를 반기면 반겼지,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인력만 갖춰진다면 자금은 이자원이 얼마든지 대어줄 수 있었다.

당장 그와 비즈니스 파트너 관계인 장현도 있고, 심세괴에게서 빼앗은 비자금도 남아있으니 말이다.

"바로 추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게오르크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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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은 민간 계층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남만승들을 다시 봤네 그려. 자네가 대국까지 가서 그들을 데려온 이유가 있었군."

국사를 논하기 위해 정승과 판서, 군영 대장들이 비변사에 모인 자리. 신경진이 이자원을 크게 치하하며 말했다.

"과찬이시오이다."

"아니, 아닐세. 건강한 사람도 학질에 걸리면 경을 치르는 법인데 하물며 전하께 변고가 생겼다면 어찌되었을지······. 그 기나목이라는 영약이 아니었다면 큰일이 났을 것이야."

"험."

신경진이 끝도 없이 이자원과 남만승들을 치켜세울 기세였던지라 상석에 앉아있던 최명길이 헛기침을 했다.

"좌상 대감, 전하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원상으로서 국사를 처리해야할 때이외다."

임금이 정신은 차렸으되 이미 오랫동안 피폐해진 몸이라 다시 정무를 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소요되었다.

그때까지는 3정승이 원상을 맡으라는 어명이 내려왔으니, 국상 때에 이은 두번째 원상 기간이 시작된 셈이었다.

물론 임금이 조정을 모두 장악하고 세 정승 또한 그의 심복이나 마찬가지라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우선 시급한 일은 우리가 장악한 진강 일대의 방비를 굳히는 것이오이다."

신경진이 최명길을 보며 말했다.

거의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던 진강성을 취하고, 허술한 봉황성을 떨어뜨려 압록강 북쪽 백여리를 얻은 것은 좋았지만 청나라에서 대군을 몰아 쳐들어온다면 과연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도원수와 부원수에게 명하여 진강의 오삼계를 도와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이 어떻겠소?"

최명길의 말에 배석해있던 호조판서 심열이 답했다.

"유사시엔 그렇게 함이 마땅하오나, 당장 수많은 군세를 강 너머로 보내어 유지하려 들자면 군비가 무척이나 많이 들터인데, 아조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사오이다."

땅은 새로 얻었지만 그곳에서 세입과 징병을 하여 방어태세를 갖추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원래 인구가 많지 않은 지역인데다 전란을 거치면서 더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 본국이 부담을 질 수밖에 없는데, 심열은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잖아도 날씨가 나빠 평년보다 훨씬 살림이 어려울 것이온데······."

심열은 한숨을 쉬었다.

조선 후기를 뿌리채 뒤흔든 경신대기근까지는 아직 30년 넘게 남았지만 기후는 벌써부터 이상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자원으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나마 대동법을 확대해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감자와 고구마 같은 구황작물을 보급하는 것 정도가 한계일까.

한가지 더 남은 방안은 수입 뿐이지만······.

'중원의 곡가도 미쳐날뛰고 있다.'

곡창지대인 강남도 마찬가지 상황인지라 쉬이 쌀을 실어오기가 난망한 상황.

"저번에 통신사를 보냈을 때 일본 쪽과 교섭하기로 했다 들었사오이다. 어찌되었소이까?"

이자원이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저쪽에서 그 뒤 사절을 보내왔을 때 다시 논의를 해보았는데, 남만교인들이 넘어오는 것을 단속만 해준다면 저희 조정에 아뢰어보겠다 하였소."

예조판서 김집이 답했다.

시로를 포함한 첫 망명자들이 넘어온 뒤에도 계속해서 큐슈의 기독교인들은 조선으로 망명을 시도했다.

오다가 죽는 이들도 적잖았지만 조선은 이들을 대부분 구하여 북방으로 올려보내고 있었다.

"저들이 진실로 우리 조선을 믿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오이다."

"무슨 말이오?"

이자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바다를 건너는 와중에 죽은 자들도 만만찮게 많으니, 그들의 목을 베어 일본에 보내는 것이오이다."

소수의 수급이라도 보내게 되면 조선은 막부에 '우리도 단속하고 있다'며 체면을 세우는 셈이다.

그러나 시체의 목을 자르자는 말이 언짢았는지 김집은 인상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 일가와 함께 건너온 이들이 적지 않을 터인데, 유족의 반발은 어찌할 셈이오?"

"어차피 왜인들은 죽으면 화장을 하오이다. 마음먹고 숨기고자 하면 그들이 알 수가 없겠지요."

이자원은 김집이 뭐라 더 반론할 틈도 없이 최명길을 쳐다보며 말했다.

"또한 이제부터는 일본인들을 동북이 아닌 진강으로 보내는 것이 어떠하오이까?"

이미 1차로 도착한 왜인들은 남강(연길), 훈춘, 야춘에 정착했다.

조선과 아민이 호시를 열어 교역하고 있는 장소였다.

그러나 원래 그곳에는 여진족들이 자리잡고 있었으니 조선이 새로 점령한 진강으로 보내자는 제안이었다.

"동북보다 옮기기도 쉬울 것이고, 왜인들은 칼을 잘쓰니 유사시에는 병력으로 활용하기도 쉽사오이다."

일본인들이 정착에만 성공한다면 든든한 완충지대가 생기는 셈이었다.

북벌을 위해 나아갈 기반은 덤이고 말이다.

이외에도 비변사 회의는 한참을 더 이어졌다.

군사와 내정, 외교까지 아우르는 회의의 마지막 쯤에 올라온 안건은 어찌보면 사소한 것이었다.

"다음은 폐주 광해군에 관한 문제요."

최명길의 말에 이자원의 눈빛이 변했다.

"교동에 있는 폐군(廢君)이 우리 임금께서 중병에 걸리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늘에 쾌차를 빌었다고 하오."

"허허, 폐주가."

강석기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광해군과 인조의 악연을 생각해본다면 그 아들인 금상의 쾌차를 비는 것은 영 어색한 일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정작 광해군을 폐위시킨 후에는 나름의 인정을 베푼 적이 있긴 했다.

"인조대왕께서 폐군에게 찬물(饌物)을 항상 넉넉하게 갖춰 들이도록 하고, 만약 먹고 싶어하는 것이 있거든 조금도 태만히 하지 말고 속히 마련하여 들이게 하라고 교시하셨으니 성덕이 옛날에 비추어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 마음에 광해 같은 이도 교화된 것이로군요."

이 소식에 제법 기분이 좋았는지 비변사 일행들은 껄껄 웃으며 광해군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았다.

"전하 또한 증세가 호전되셨으니 광해군에게 덕을 베풀어도 될듯합니다. 좋은 음식을 내리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그리하지요."

그렇게 사안들이 정리된 뒤, 당상들은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네도 가세."

"대감."

그때 이자원은 장인인 강석기를 붙들었다.

"광해가 왕위에 있을 때 좌도(左道)에 심히 미혹했다고 들었습니다."

"음, 그랬지."

강석기가 말했다. 그는 그때도 관직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점쟁이였던 정사륜, 중 노릇을 하다 환속한 이응두 같은 이들이 궁중을 드나들며 광해군을 모셔 지탄을 받았던 일을 기억했다.

"폐주가 겉으로는 전하의 쾌유를 빌며 치성을 드렸다지만 그 실태는 어찌 알겠사오이까?"

"설마 이제 와 그러기야 했겠는가."

강석기가 미심쩍게 말했다.

폐주가 쫓겨난 것이 십수년 전이다. 그는 되도록 그 의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이자원은 흔들림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사람을 보내어 그 동태를 살펴보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강석기는 저주로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쫓겨난 왕이 주상을 죽이려 기원했다면, 그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된다.

"교동에 사람을 보낼 때 휘하의 군관으로 하여금 봉행(奉行)토록 해주십시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강석기는 사위가 이렇게까지 하는데는 이유가 있을거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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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구름조차 하늘을 마음대로 떠다니거늘, 자신은 이 좁은 울타리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다. 아마 남은 평생토록.

한때는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생각하느라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끊임없이 세자 시절 자신을 흔들었던 계모를 폐하고 그 자식을 죽인 것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거듭된 옥사로 자신조차 믿지 않았던 이이첨 외에는 지지 세력을 모두 날려버린 것?

혹은 궁궐 공사로 민심을 잃은 것?

아니면 능양군의 동생을 죽여서 원한을 산 것?

그것도 아니라면 애초에 서자로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인가.

광해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생각이다.

게다가 그가 범한 잘못을 따지자면 너무 많았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일까지도.

"속죄, 속죄라."

아들 부부와 아내마저 앞서가버린 그에게는 살아있을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아직까지 죽지 않은 것은 살면서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인가.

"전하께오서 나리에게 음식과 술을 내리셨소."

그러고나서 며칠인가 지났을까, 그에게 군관 하나가 찾아와 말했다.

오랑캐를 물리친 작금의 임금이 앓아누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나마 정화수라도 올려 쾌차를 빈 것이 예쁘게 보인 모양이었다.

"성은이 망극하다는 말을 전해드리게."

광해군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한때 지존이었던 그가 입에 담기에는 너무나 어색한 말이었지만 이제는 익숙했다.

"자네도 이리와서 한잔하겠는가?"

광해군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수발드는 계집종은 그를 업신여기는 눈치였고, 교동 구석에 위치한 폐주의 유배지까지 구태여 드나드는 이도 없었다.

다시 말해 광해군은 사람이 간절했다는 뜻이다.

보통은 사양할 법하지만, 이 훈련도감 파총이라는 자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받으시오, 어사주요."

태도는 영 불손했지만 말이다.

"젊은 나이에 파총이라니 대단하군."

"대장 영감께 비하면 별것 아니올시다."

"대장이라."

아무리 교동이 소식이 늦다지만 온 나라를 뒤흔든 일대 전쟁에 대한 이야기까지 듣지 못할 정도로 궁벽한 곳은 아니었다.

전쟁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맨 앞에 나오는 것이 이자원의 이름이었으니, 광해군 또한 이 파총이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훈련대장, 이자원."

광해군이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 냇물이 향하는 곳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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