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냇물이 향하는 곳 (5) >
"전하의 학질을 치료하기 위한 영약을 가지고 왔다! 당장 내의원은 남만승들에게 협조하도록 하라!"
이자원의 윽박에 어의들, 그 중에서 의원 이형익은 놀란 얼굴로 항의하고 나섰다.
"아무리 병참 영감이라 하셔도 웃전께 올릴 탕약을 사사로이 간섭하심은 옳지 않사오이다. 하물며 남만승들의 술법이라니요."
다른 어의들 또한 이형익에게 동조하고 나섰다.
혜민서 의원들은 이미 예수회 신부들에게 교육을 받고 있었지만, 콧대 높은 내의원에서는 오랑캐에게 배울 것이 뭐가 있겠냐며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어의들은 남만승들의 의술이란 것을, 실상 부적을 태워 환자에게 먹이는 등의 사이한 술법 정도로나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전 병참 댁 마나님의 해산(解産) 때에도 어의들의 실력을 무시하신 것은 참았지만, 감히 옥체에까지 오랑캐의 손을 대려하심은 신하로서 납득할 수가 없사오이다!"
이형익은 끓어오르는 노기에 소리쳤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자원의 말에 그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중전 마마의 영이시니라. 대궐에 그 이상 가는 웃전이 없거늘 누구의 허락을 더 받아야한단 말인가?"
"주, 중전 마마께서?"
어의들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그러나 이미 내려진 명을 뒤집을 수도 없는 것이고, 게다가 상대는 전쟁터의 흉신악살(凶神惡煞)이라는 이자원이 아닌가.
"그래도 어찌 옥체에······!"
이형익이 용기를 끌어모아 외쳤지만, 그의 등 뒤에 서있던 어의들은 서둘러 흩어진지 오래였다.
황망한 표정으로 뒤를 바라보던 이형익을 밀치고 이자원은 탕약방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저기서 뿜어나오는 증기가 뿌얬지만 예수회 신부들은 용케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기구의 사용법은 아는가?"
이자원이 물었다.
"예, 장군. 북경에서부터 배워 알고 있습니다."
유럽과 동양 의학의 계통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중국에서 최소 수년, 조선에서도 1년 넘게 체류한 이들이다.
약탕기 정도는 눈감고도 쓸 수 있었다.
이자원이 뭐라할 새도 없이 예수회 신부들은 소중하게 받쳐 들고온 키나나무 껍질을 달이기 시작했다.
지구 반대편, 자신들의 동료가 남미 원주민들에게서 발견한 방법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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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신은 혼미해졌다가 떠오르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그를 덮쳤다.
"으, 으음······."
오한과 발열, 구토와 설사.
전형적인 말라리아의 증세가 그렇지 않아도 허약한 임금의 몸을 유린했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살아있는 이상 계속해서 살아가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삶을 지속하는 것 자체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면, 사람은 오히려 죽음을 갈구하게 된다.
지금의 임금이 그러했다.
자신의 몸을 좀먹는 열병은, 차라리 이대로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을 정도로 끔찍했다.
'이대로······ 죽는다······.'
끊임없이 살아야하는 이유를 속으로 복기하지 않았다면 그는 진작 생을 등졌을 것이다.
'아바마마의 원수를 갚지도 못하고.'
- 세자야!
눈이 뻥 뚫린, 악몽 속 인조의 목소리가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아바마마."
저 오랑캐들을 격멸하지 못한채 눈을 감는다면, 지하에 계신 부왕을 무슨 낯으로 보겠는가.
그것이 그가 계속해서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였다.
게다가······ 아직 장성하지도 않은 원자.
그 아이에게 제대로 반석을 다진 보위를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대로 죽어선 아니된다.'
임금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며칠인가 그것을 반복했을 때, 그의 입으로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걸쭉한 액체였다.
'미음은 아니고, 탕약인가?'
하지만 임금의 혀와 코에 전해져온 것은 전통적인 한약재의 맛과 냄새가 아니라,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독특한 미감(味感)이었다.
그는 좌우지간 그것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리고 몇번의 오한과 발열이 지나갔을까.
어느덧 몸의 열은 식어있었다.
"으, 으음······."
임금이 뒤척이며 신음하자 줄곧 곁에 붙어있던 중전과 어의들이 곧장 반응했다.
"전하, 전하!"
"정신이 드시옵니까?"
임금은 간신히 눈을 뜨고 물었다.
흐릿한 눈에 초점에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예가 어디인가?"
목소리는 갈라져있었고, 갈증이 몹시 심하게 일었다.
중전이 급히 꿀물을 한잔 건넸다.
"창경궁 침전이옵니다, 전하. 정신이 드시옵니까?"
의식이 희미한 상태였던 전날과는 달리 임금의 정신은 또렷했다.
그는 중전을 바라보며 똑똑히 말했다.
"몸이 가뿐하오."
"어체(御體)의 열도 내렸고, 맥도 정상이옵니다."
그 말에 중전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 대장의 말이 맞았습니다. 실로 남만승들의 의약이 효험이 있었사옵니다."
어의들은 표정이 썩어 들어갔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침을 놓고 탕약을 들여도 호전되지 않던 증세가 남만승들이 약을 올리고 나자 크게 좋아지지 않았던가.
"이 대장? 남만승? 이게 다 무슨 말인가?"
한편 어리둥절한 임금에게 중전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방사를 치르려다 임금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 어의가 학질이라 판단한 것, 그 말을 듣고 이자원이 학질에 특효라는 남만의 약을 가져온 것, 봉림대군과 함께 이것으로 임금을 치료하기를 청하기에 허락해준 것까지.
"그가 내 목숨을 또 한번 구했구나."
임금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남한산성이 함락 직전까지 갔을 때 군사를 이끌고 와 성을 구한 것에 이어, 이번에는 남만승들의 비약까지 가져왔다니.
"봉림대군의 공도 가상하고, 이자원의 공은 더욱 치하할만하오. 이 두 사람이 있으니 내가 죽어도 뒤는 걱정할 것이 없겠구려."
"전하!"
"농담이오."
농담치고는 듣는 사람들이 모두 식겁할만한 소리였지만, 그들은 임금이 죽다 살아나 정신이 온전치 않은 탓이라 이해했다.
"상선은 게 있는가? 나가서 사람 하나를 데려오너라."
"예, 전하."
임금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내관을 불러 하명했다.
그가 일어나자마자 만나려는 사람은 영의정 최명길도, 동생 봉림대군도 아니었다.
"병조참판 겸 훈련대장 이자원을 불러오라."
===
"훈련대장."
임금은 어느덧 입에 붙어버린 호칭으로 이자원을 불렀다.
미음을 들이키고 나자 제법 기운이 붙은 목소리였다.
"네가 내 목숨을 또 구했구나."
"전하께오서 스스로 살고자 하셨기에 살아난 것이지, 신의 덕이 아니옵니다."
이자원은 실제로 반쯤 그렇게 생각했다.
임금이 목숨을 포기했다면 그대로 조선은 다시 한번 국상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또한 남만승들이 가져온 약초가 아니었다면 방법을 알아도 약을 쓰지 못했을 것이니, 공은 모두 남만승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사옵니다."
"아니다."
임금은 이자원의 손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그들을 데려온 이 또한 네가 아니냐. 그대가 종사를 두번이나 구한 것이다. 이 공을 어찌 갚으랴?"
임금의 말에는 진심으로 이자원에 대한 고마움이 묻어있었다.
업무적으로는 이미 깊은 신뢰를 보내고 있었던 임금이지만, 이제는 인간적인 감사까지 느끼고 있는 것이다.
"받잡기 민망하옵니다."
하지만 이자원은 여전히 차분한 눈빛으로 고개를 조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현재는 임금이 몹시 고마워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심정이 어떻게 변할지는 몰랐기에.
"그러나 그대의 말도 맞다. 선대왕의 원수를 갚겠다는 비원이 아니었다면 나는 세상을 버렸겠지. 오로지 복수만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니 말이다."
임금의 말에 그를 잠시 바라보던 이자원이 말했다.
"전하."
이자원이 임금에게 물었다.
"실로 그 이유 뿐이옵니까?"
"그러면 달리 무슨 이유가 있겠느냐?"
임금이 물었다.
진심으로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무의식적으로 흔들렸다.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이자원은 임금의 흔들리는 눈빛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임금은 치하하는 말을 계속 늘어놓았고, 예수회에 대한 대대적인 포상 또한 약속되었다.
결국 임금의 건강을 우려한 중전이 기별을 보내고 나서야 이자원은 풀려날 수 있었다.
"장군."
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적비가 따라붙었다.
이자원은 그에게 굳이 눈길을 주지 않고 중얼거렸다.
"복수심은 양날의 검이다."
임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조에 대한 죄책감은 임금을 심적으로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조급함으로 인해 종종 내리는 오판과 임금을 옥죄는 심병 모두가 거기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는가.
그러나 그의 불타는 복수심이 아니었다면, 임금이 보였던 거침없는 행보와 이자원에게 준 전폭적인 신뢰 모두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자원은 아직까진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크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인조의 복수만이 살아가는 이유라······.'
스스로는 그렇게 믿고 있겠지만, 과연 이자원까지 그 말을 신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만약 복수와 다른 가치가 상충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는 무엇을 선택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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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길이 죽었다.
적비는 돌아오는 길에 그렇게 보고했다.
"결국 그리됐군."
이자원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두번째로 만났을 때도 그의 상태는 별로 좋아보이진 않았다.
아마 노환이리라.
"손쓸 필요는 없으니 잘되었군."
그러나 어느쪽이든 그의 입은 반드시 틀어막아야 했다.
실제로 당시와 관계되어 있던 당사자였으니 말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들으셨기에······?"
이자원은 주위를 물리치고 박승길과 대면했다.
그의 아들도 손자도, 그리고 적비도 모르는 비사를 전해듣기 위해서 말이다.
"알 필요 없다."
적비는 숭정제가 심어놓은 귀다.
숭정제의 의심을 피하려면, 그리고 능력은 쓸만하니 곁에 두고 있지만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명나라에 넘어가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하."
이자원은 코웃음을 쳤다.
그가 빙의하기 전, 본신의 출생과 관련된 추악한 진실 따위는 실상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의 정신은 온전한 이방인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알려지면 자신의 목을 날려버릴 폭탄이 된다.
이자원은 속으로 이 사실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셈해보았다.
'어차피 증좌는 없다.'
본신의 아버지 이중전이 폐주 광해의 신임을 받은 이유가 밀회를 도와줬기 때문이라는 명확한 증거는 없고,
그 이전에 광해군이 애생을 품었다는 사실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자원이 애생을 닮았다는 것도 단순히 박승길의 사견에 불과하지 않은가.
'박승길의 추측을 사실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둘 뿐.'
본신의 적모와, 폐주 광해군.
'처리해야할까.'
그렇다면 적비를 쓰는 것이 안성맞춤이겠지만 그는 말했다시피 믿을 수 없는 자다.
이자원은 적비를 보고 말했다.
"박 파총을 불러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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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균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처, 철균아. 살려다오.'
형들의 마지막 말이 술잔 위에 스치고, 그 위에 다시 남겨진 형수와 조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자신의 선택은 최선이었다.
나라를 위해, 집안을 위해.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늘처럼 시름이 깊어지는 날은 도저히 술을 마시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옳았다. 대장 영감의 말씀은 항상 옳았기에.'
이자원은 틀린 판단을 한 적이 없다.
정말 그의 말처럼 진압 후 충청도 양반들이 대대적으로 쓸려나가는 피바람 속에서도 자신의 집안은 무사했지 않은가.
"파총 나리, 대장 영감께서 부르시오이다."
초관 하나가 허둥지둥 뛰어와 그가 술을 푸고 있던 주막에 와서 외쳤다.
"대장 영감께서?"
술을 들이켜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상관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법이다.
특히 그 상관이 이자원이라면.
박철균은 훈련도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