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합집산 (7) >
"아민놈 쪽의 진영에서 왔다고? 그렇다면 아민이 보낸 것인가?"
지르갈랑의 물음에 밀서를 가지고 온 이는 황급히 부정했다.
"아니옵니다. 소인은 본래 조선에 살던 만주인이옵니다."
이자원이 아민에게 딸려보냈던 향화호인.
그 속에 섞여들어갔던 조선측의 간자였다.
"조선?"
지르갈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조선에 귀부하라는 말은 아니겠지?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조선놈들의 신하가 되어 살성 싶으냐?"
그럴 바에야 도르곤에게 항복해 유배되는 것이 낫다고 여긴 지르갈랑이었다.
"소, 소인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소인은 그 밀서를 전하라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지르갈랑은 그 말에 밀서를 펼쳤다.
뜻밖에도 그것은 가도의 부총병이라는 자로부터 날아온 것이었다.
「비록 청이 우리의 적이라고는 하나 이리 골육끼리 상쟁을 벌여대니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소. 가도는 북방과 가까워 정친왕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음을 들을 수 있었소. 이대로 가다간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자비를 베풀어 제안하겠소.
가도 근처에는 큰 섬이 많은데, 잠시 환란을 피하러 내려 온다면 그곳을 내어주겠소. 또한 그 군세를 온전히 유지할 수 있게 해주고, 물자도 대어드리리다.」
지르갈랑은 그 내용을 보고 문득 의심이 들었다.
"아예 투항하라는 것도 아니고 군세를 유지해도 좋다고?"
도대체 조선, 아니 가도가 무슨 연유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인가.
혹시 도망쳐오는 자신들을 섬멸하기 위한 계책이 아닌지 의심되는 지르갈랑이었다.
"저, 정친왕 전하. 받아들이시지요."
"맞습니다. 이것 외에는 길이 없을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로호이와 양샨은 그의 속을 아는듯 모르는듯 지껄였다.
한참 그들을 노려보던 지르가랑이 말했다.
"그래, 너희들이 앞장서보아라. 이게 계략인지 아닌지는 그때 보면 알겠지."
이제는 막다른 길이었다.
===
"아직까지 반란이 끊이지 않고 있단 말이냐?"
숭정제는 한탄하면서 소리쳤다.
비록 이자원이 홍타이지를 죽이며 몰아친 나비효과로 산해관 너머에서 이 중원 땅을 호시탐탐 노리던 청의 압력은 약해졌지만, 당연히도 명 내부 문제까지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유적 이자성(李自成)이 홍승주에게 잡혀 죽은 뒤로 큰 반란의 징조는 없지만,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실정이옵니다."
금의위독동지 낙양성의 보고에 숭정제는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도적 고영상만 잡으면 불길이 잡힐줄 알았고, 고영상이 죽은 뒤에는 이자성만 잡으면 될줄 알았다. 그런데 아직까지 백성들이 앞다퉈 도적 되길 원하니 여염의 풍속이 이처럼 악한 때가 없구나."
숭정제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백성들은 병사들에게 죽고, 도적에게 죽고, 기아와 한재에 죽고, 역병에 죽고, 서로 잡아먹어 죽으니 사람사는 집이 열 집에 하나도 되지 않사옵니다. 이런 판이니 앉아 죽느니 차라리 도적이 되겠다며 날붙이를 들고 나서는 실정이라 하옵니다."
"시끄럽다. 이미 은자를 연거푸 수십만 냥 내려 진제했거늘 여기서 무얼 더 하란 말이냐?"
낙양성은 차마 황제에게 '그정도 돈으론 언발에 오줌누기일 뿐더러, 그마저 중간 관리들이 착복했을 것'이라는 진실을 전하지 못했다.
숭정제가 안다고 해서 텅 빈 국고가 채워지거나, 관리들이 제 주머니 대신 백성들에게 은자와 식량을 베풀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황제의 심기라도 편하게 해주는 것이 맞다고 여긴 낙양성이었다.
그때 숭정제가 물었다.
"나라 안의 사정은 이러하고······ 조선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느냐?"
말이 조선이지 이자원에게 붙인 적비를 말함이다.
날로 무너져가는 명나라에 있어 유일한 희망은 조선이었지만, 아직까지 소식이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저 오랑캐 놈들이 두 패로 갈라져 싸우고 있다지? 조선과 이자원은 군사를 낸다는 말이 없더냐?"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숭정제는 잠시 반란을 토벌 중인 홍승주를 올려보내 직접 청을 공격할까 고민했지만, 그보다는 조선을 이용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자원에게 가도 병력을 내라 하고, 아울러 조선왕에게도 칙서를 내려 북벌을 명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에 관해 이자원의 표문이 올라왔사옵니다."
"그래?"
낙양성이 두 손에 받쳐들어 표문을 바치자 숭정제는 그것을 집어 펼쳤다.
"군사를 내기는 힘들다?"
갖은 미사여구를 지나자 나타난 본론은, 숭정제에게는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내용이었다.
"이 자가 오랑캐 황태극을 격살한 자가 맞는가? 어째서 이런 호기를 놓치겠다는 말이냐?"
"그것이······."
이자원의 입장은 간단했다.
가도 병력 단독으로는 청을 도모하기 힘들고, 조선은 군사를 낼 여력이 없다.
숭정제가 마치 조선에 이런 명령을 내릴 것을 예측이라도 한 것 같은 보고가 아닌가.
"붙여놓은 자의 보고도 일치하옵니다. 조선은 근래에 북방 원정과 반란 토벌로 여력을 많이 소비했다 하옵니다."
"그래도 황명을 내리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군사를 내어야 할 것이 아닌가?"
조선이 끝까지 버틴다면 당연히 명으로선 할 수 있는게 없다.
정치적 압박이야 가할 수 있겠지만, 육로마저 끊긴데다 나라꼴이 말이 아닌 상황에서 조선을 정벌하겠다며 군사를 낼 수가 있겠는가.
기껏해야 지금 조선에 봐주고 있는 여러가지 편의를 중지하는 것 정도일까.
그러나 이자원의 표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숭정제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것을 읽어내려갔다.
===
화북을 공격하기 위해 내몽골 일대를 따라 진격하고 있던 호거는 심양에서 들려온 소식을 듣고 눈이 튀어나올만큼 놀랐다.
"이 개같은 작자들을 보았나! 감히 난을 일으켜서 나라를 들어먹어? 도대체 지르갈랑은 무엇을 했다는 말이냐?"
심양도, 황제도 잃고 조적으로까지 선포된 상태다.
휘하의 상삼기를 제외하면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당장 묵던으로 돌아가 이놈들의 목을 죄다 따버리겠다! 당장 회군하도록 하라!"
호거는 광분해서 외쳤다.
호거를 영접하기 위해 나와있던 차하르 친왕 에제이나, 다른 측근들도 감히 말리지 못했다.
심신의 안정을 취하시라 호거를 홀로 남겨놓고 빠져나온 장수들은 이 경천동지할 사태에 저마다 한탄을 늘어놓았다.
"묵던에 있는 우리 가족들은 어찌한단 말인가?"
"설마 우섭정왕이 전부 죽일 셈은 아니겠지?"
"한께서 우리를 역적으로 선포하셨는데 이길 수는 있는가?"
정황기와 양황기, 그리고 정람기의 구사 어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홍타이지 사후 가장 먼저 호거에게 붙어 그를 섭정왕으로 옹립했던 인물들인만큼, 작금의 상황에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참정, 어찌해야 하겠는가? 정말 섭정왕 전하를 따라 묵던으로 돌아가면 싸워 이길 수 있겠는가?"
에제이를 따라 호거를 맞이하러 나왔던 몽고아문 참정 허서리 소닌은 정황기 출신으로, 현명하기로 이름이 나있었다.
때문에 같은 정황기 구사 어전인 아다이가 묻자 소닌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한께서 조칙을 내리셨으니 명분은 저쪽이 쥐고 있고, 이미 안에서 내응할 만한 좌섭정왕의 파벌은 모두 숙청당했을테니 이 상황을 뒤집자면 순수하게 싸워 이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비교적 병력도 적고 먼길을 되돌아온 좌섭정왕의 군세가 우섭정왕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런······."
그들도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지만 소닌이 직접 말로 꺼내니 새삼 절망적이었다.
"허면 어찌해야겠는가? 이대로 저놈들에게 항복이라도 해야겠나?"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지요."
소닌은 담담히 말했지만 호거의 수족인 구사 어전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항복해도 우린 다 끝장일세."
호거의 목을 따서 도르곤에게 바치고, 대청을 위한 결단이었노라며 지껄인다면 당장 목숨은 건질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용서받기에는 너무 지위가 높았고, 또한 너무 멀리왔다.
청의 짧은 역사만 따져보아도 피튀기는 숙청은 몇번이나 있어왔고, 모든 일이 끝난 뒤엔 언제 칼날이 목에 들어올지 전전긍긍하며 평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허면 다른 방법 밖에 없지요. 어전들께서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소닌이 말하자 구사 어전들은 황급히 물었다.
"이곳 몽골에서 다시 세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말에 구사 어전들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몽골은 말이 대청의 영토지 사실 우리 만주인들과는 다른 족속들 아닌가."
힘이 있을 때는 거세게 억눌러 통치가 가능했지만, 반쯤 몰락해버린 호거가 몽골을 기반으로 재기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렇잖아도 불온한 기색이 감돌던 몽골이니 당장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허서리 소닌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아다이의 옷깃을 붙잡고 속삭였다.
"콩고르 에제이가 있지 않습니까?"
"차하르 친왕 말인가?"
방금까지도 함께 있던 몽고아문 승정 에제이.
하지만 그 하나가 있다고 해서 몽골의 반발을 막을 수 있겠는가.
"몽골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을 쥐여주면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구사 어전들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몽골의 독립.
"그렇다면 에제이를 다시 대칸으로?"
"그렇습니다. 대신 대청은 분열을 피할 수 없겠지요."
구사 어전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 받았다.
이미 그들은 계산을 끝내놓은 상태였다.
아다이가 입을 열었다.
"누가 좌섭정왕 전하를 설득하겠는가?"
===
당연히 호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구사 어전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선황께서 얻은 영토를 찢어서 떼어주자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대들은 만주인이 아니라 몽골인이로구나!"
그러나 구사 어전들은 호거를 강하게 설득했다.
"전하,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차라리 지금 몽골인들을 꾀어서 후일을 도모하시지요. 당장 묵던으로 군사를 몰아갔다 패하면 모든 것이 끝장입니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만주를 되찾기만 하면 다시 약속 따위는 고이 잊고 에제이를 폐위시키면 됩니다."
수차례에 걸친 설득 끝에 호거는 끝내 뜻을 꺾었다.
그 또한 전장에서 수없이 뛰어다닌 인물인만큼 지금이 얼마나 불리한 상황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와 몽골은 누대로 좋은 이웃이었으나 시세가 불운했던 까닭에 대칸의 위를 잠시 청나라 태종이 가져간 바 있었다. 그러나 차하르 친왕은 장성했고, 또한 만주에는 혼군(昏君)이 들어서 간신들의 참소에 넘어갔으니 어찌 칭기즈 칸의 인장(印章)을 그 손에 맡겨둘 수 있겠는가?
이에 다시금 정당한 황금씨족의 후예를 대칸으로 복벽(復辟)하노라!"
홍타이지가 몽골을 정복한 이래 차하르 친왕으로 강등되어 있던 에제이는 졸지에 그 아들 호거의 손에 다시 대칸으로 즉위하게 된 것이다.
물론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만주 선한(先汗)의 장자인 아이신기오로 호거를 만주의 대한(大汗)으로 인정하고, 아울러 몽골의 타이시(太師)로 삼겠노라."
물론 호거는 만주로부터 축출당한 상태였던지라 강덕제 쇼서에 맞서 한을 자칭한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지만, 태사라는 직위가 중요했다.
결국 에제이를 내세웠긴 하지만 태사인 호거가 몽골의 모든 권력을 쥐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정도로도 몽골 노얀들의 마음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다시 황금씨족이 대칸위를 되찾았다!"
"조정에는 몽골인도 들어가있다더라!"
"타이시의 상대편이 이기면 몽골의 독립도 엎어질 것이다! 순순히 저 역적 놈들과 싸우는데 협조하라!"
1638년 7월.
아이신기오로 호거가 보르지긴 콩고르 에제이를 대칸으로 옹립함으로써 몽골은 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했다.
그러나 모든 실권은 태사인 호거에게 있었으니, 사실상 몽골에 만주인 정권이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