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합집산 (6) >
가도 부총병.
조선의 영토에 위치한 명의 군진이라는 특수한 지위로서, 사실상의 반독립 세력인 가도의 2인자. 게다가 무려 천조의 벼슬.
그리 생각하면 자신이 원하던 중앙의 요직(要職)에 비해서도 크게 떨어지는 자리는 아니다.
그렇게 마음을 달래며 가도에 온 심기원이었지만 속았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그 중군(中軍) 놈에게 인정(人情) 받아먹는 것이 아니었는데.'
고위직에 있는 자가 아랫사람에게 뇌물받는 것이야 공공연한 일이었고, 자신은 거기서 약간 더 욕심을 부린 것 뿐 아닌가.
그런데 그것 때문에 이자원에게 목줄을 잡혀 버려 최명길의 복귀를 주장한 뒤 여기까지 날아오게 된 뒤, 심기원은 하루도 편히 쉴 날이 없었다.
"산동에서 염초를 1만 근이나 사서 보내라고?"
"생사도 가장 귀한 것으로?"
"경덕진(景德鎭)에서 바로 도자기를 수입해볼 방도를 찾으라니······."
도성에 앉아있으면서 끊임없이 일거리를 맡기는 이자원의 지시,
"부총병께서 친히 나와 환대해주시니 실로 영광입니다."
"병부상서 대인의 일가붙이를 어찌 박대하겠습니까? 비록 가도가 궁벽한 곳이나 최선을 다해 대접할테니 모쪼록 말씀만 잘 전해주십시오, 헤헤. 장사도 얼마든지 편의를 봐드리겠나이다."
심세괴가 명 조정에 대놓고 있던 끈을 유지하기 위한, 뼈를 깎는 기름칠.
원지에서 고생하는 부총병을 위해 조선과 명 상인들이 '알아서' 바치는 재물과 미녀가 없었다면 진작 드러누워 사직해버렸을 것이다.
이렇게 물심양면 불철주야 가도와 조선의 안녕을 수호하려 뛰어다니는 심기원이었지만, 세상은 그를 도와주기는커녕 요즘 들어 그의 신경을 자극하는 혹 하나를 더 달아줄 뿐이었다.
"당장 심양을 들이쳐야 하오!"
새파랗게 어린 놈이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맞먹으려 드는 모습에 심기원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감히 대놓고 꾸짖을 수도 없는 상대였기에 어디까지나 속으로만이었지만.
"오 부총병, 조금 진정하시오. 총병께서는 좀 더 기다리라고 하지 않으셨소."
영원 총병 오양의 아들 오삼계.
가도 정벌에 공을 세웠다 하여 이자원이 부총병으로 천거한 이였다.
"저 오랑캐들이 서로 죽이려 드는 중인데 무슨 기다림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오? 총병께서 움직이지 않으시겠다면 내가 황상께 상주해서라도 심양을 공격토록 하겠소!"
"이미 총병께서 황상께도 아뢰었다 들었소."
무슨 소리를 적어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자원이 저리 나오니 오삼계가 군사를 함부로 움직이기도 무엇한 일이었다.
"총병 대인은 조선의 도성에 머무르실게 아니라 지금 가도에 와서 상황을 보셔야 하오. 이 얼마나 좋은 기회냔 말이오."
이자원이 직접 가도에 와서 상황을 보아도 판단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 심기원은 청에서 정보가 들어는대로 이자원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런 임무는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애꿎은 자신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고 있으니 심기원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리가 없었다.
"싸움이나 할줄 아는 애송이 자식이. 안그래도 심사가 복잡한데 진을 빼는구나."
오삼계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빠져나가자 심기원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마나 잘 싸우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자신이 오삼계보다 더 고생중이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이자원의 명령도 오삼계가 아닌 그에게만 날아왔지 않은가.
「오삼계를 최대한 억제하며 기회를 보아 다음과 같은 사항을 실행할 것.」
거기까지 떠올린 심기원은 몸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이자원 이놈, 혹시 일이 잘못되면 나를 던져주고 빠져나갈 작정은 아니겠지."
이미 코가 꿰였다지만 그런 식으로 버림받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한편 심기원의 방을 빠져나온 오삼계는 주위에 자기 부하들 밖에 남지 않자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때, 이만하면 되겠는가?"
"예, 부총병 대인. 충분히 대인의 감투정신(敢鬪精神)이 전해졌을 것입니다."
"조선인들에게서 아무말이 없다고 우리까지 싸워보겠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비록 총병의 말에 따라 출진하지 않더라도 경사의 황제께서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 흡족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부하들의 말에 오삼계는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황제가 출진을 명해도 이자원은 이런저런 핑계로 거부하려 들 것이 뻔했고, 명은 그것을 강제할 능력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색이라도 실컷 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실로 가도는 요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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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르갈랑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한을 그대로 두고 너희만 묵던을 빠져나왔단 말이냐?"
그 앞에는 호로호이와 양샨이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자신들도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알고 있는 표정이었지만, 그렇기에 지르갈랑은 열이 뻗쳤다.
'젠장! 좌섭정왕은 어쩌자고 이런 놈들을 측근으로 두었단 말인가?'
제가 살기 위해 황제고 뭐고 없이 심양을 버리고 도망친 놈들.
그래도 기사이를 보내 강덕제를 데려오려던 시도는 했던 호로호이와 양샨으로선 억울했지만 지르갈랑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도, 도르곤을 물리치고 다시 묵던을 되찾으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호로호이의 말에 지르갈랑은 열이 뻗쳐 소리쳤다.
"앞에는 아민, 뒤에는 도르곤이다. 묵던이고 요양이고 전부 도르곤의 손에 넘어갔는데 어떻게 싸워 꺾겠느냐? 당장 도르곤 놈이 묵던을 정리하고 나면 우리 뒤를 들이칠 터인데!"
한참 동안 성을 내던 지르갈랑은 겨우 머리를 식힌 뒤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우선 자력으로 저들과 싸워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차라리 흥경에 들어가 좌섭정왕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농성해야겠다. 흥경을 지키고 있는 장수가 누구였지?"
"도로이 얼러훈 버일러(多羅安平貝勒) 두두입니다."
"그래, 그라면 안심이구나."
누르하치의 장남 추옝의 아들 두두.
숱한 전장을 거치며 공적을 쌓은 인물이니 그와 힘을 합쳐 흥경을 수비하면 호거가 돌아올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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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경성.
심양으로 천도하기 전엔 허투알라라고 불렸고, 후금의 수도였던 곳이다.
청의 영토가 늘어남에 따라 후방이 되어버린 이곳이지만, 근래에는 일대에 출몰한 아민군과 산발적인 교전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날 심양에서 난리가 난데 이어, 그에게 사자까지 보내온 것이 아닌가.
"형님."
"아니, 너는 니칸이 아니냐?"
사자로 찾아온 이는 두두의 동생 니칸이었다.
"군기대신께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범문정을 두고 이르는 니칸의 말에 두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태조께서 기의하신 이래로 그런 직위가 대청에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너 또한 역당(逆黨)의 일원이구나."
"형님, 진정한 역당은 좌섭정왕과 정친왕이 아닙니까? 그간 좌섭정왕이 벌인 일 중 과연 이 대청을 위해 한 일이 몇이나 있습니까? 제 사욕을 채우기 위해 권력다툼이나 벌였지요."
니칸이 말을 이었다.
"저는 별다른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제 파벌에 끼지 않았다는 이유로 몽고아문 승정 자리에서 내쳐졌습니다. 형님이라고 다를 것 같습니까? 당장 태종(太宗, 홍타이지)만 하더라도 형님의 수많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작위와 상급 주는데 인색하지 않았습니까?"
두두는 누르하치의 장손이다. 그렇기에 홍타이지의 이런 견제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당사자는 섭섭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니칸이 이처럼 공사(公私) 양쪽의 일을 들어 설득하자 두두의 고심 또한 깊어졌다.
홍타이지야 여러 버일러들이 추대한 한이었으니 섭섭해도 어쩔 수 없다 치자.
그러나 일개 섭정왕인 호거가 그래도 되는 것일까.
"······이대로 우리끼리 싸우다간 나라의 뿌리가 흔들린다. 내가 나서서 좌섭정왕과 우섭정왕 간 사이를 중재하도록 하겠다."
두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어디까지나 호거와 도르곤의 싸움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런 입장만 하더라도 니칸에게는 상당히 반가운 것이었다.
"그러면 정친왕의 군대를 흥경에 들이지는 않는 것이지요?"
"······중립을 지키자면 그리해야겠지."
도르곤과 아민 사이에 끼어 일대 위기에 놓인 지르갈랑이다.
말이 중립이지, 지금 두두는 지르갈랑이 고사(枯死)하는 것을 방관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호거에 반감을 느꼈으되 대놓고 줄을 서고 싶진 않은 두두로선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이 사실을 모른채 흥경으로 나아온 지르갈랑은 열리지 않는 성문에 당황했다.
"이, 이, 이런 미친! 두두! 너마저 좌섭정왕에게 반기를 든 것이냐!"
"버일러께서는 전하와 우섭정왕 전하간 교전을 중지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또한 양측을 중재하기 위해 저를 보내셨사온데······."
"그따위 말 같잖은 소리를!"
지르갈랑이 씩씩대며 소리쳤다.
"정친왕 전하, 대신 퍼알라(佛阿拉)로 가시지요. 그곳에는 태조께서 건주위 시절 근거로 삼으셨던 성이 남아있습니다."
사자가 그렇게 권했지만 지르갈랑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퍼알라는 흥경에서 남쪽으로 불과 십여리에 있다. 퍼알라는 내어줄 수 있으면서 흥경은 내어주지 못한단 말이냐?"
"어디까지나 저희 버일러께서는 대청의 분열을 수습하시고자······."
"먼저 칼을 들이민 놈들이 누구인데!"
이런저런 이유를 다 떼놓고 생각해봐도 퍼알라는 좁고 궁벽한 곳이었다.
도저히 호거가 회군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지르갈랑에게는 불행히도,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지르갈랑이 군대를 수습해 퍼알라에 들어가자마자 뒤를 추격해온 도르곤과 아민군이 성을 에워싸고 밤낮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이미 한께서 양람기를 닝구타총관의 손에 되돌리시고, 황적에 복귀시키셨다!"
"팔기 형제들이여! 개죽음 당하지 말고 이리로 합류하라! 이미 양람기주는 역적 지르갈랑이 아니라 닝구타총관이시다!"
퍼알라를 에워싸고 소리치는 청군들의 목소리에 지르갈랑은 화를 벌컥 냈다.
"이놈들이! 이미 태종께서 결정하신 일을 어찌 뒤집는단 말이냐! 한이라 해도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지르갈랑에게 힘만 있다면야 그 허수아비 황제의 말 따위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처럼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처벌을 받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다는 말은, 지르갈랑의 부하들에게는 무척이나 달콤하게 들렸다.
그 결과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이탈자들이었다.
"제기랄······."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것일까.
분명 자신의 잘못은 아니다. 저 멍청이들이 묵던을 그냥 내주고 오지만 않았더라도······.
하지만 지난 일을 탓해보아야 무엇하겠는가.
'항복해야하나?'
승산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호거의 정치적 동맹으로 활동한 이상, 그리고 상대편에 아민이 존재하는 이상 그는 항복해봤자 그리 좋은 꼴은 보지 못할게 뻔했다.
양람기를 모조리 빼앗기고 유배당하는 것이 최선이리라.
이미 그의 형 아민이 당했던 것처럼.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 살아남지는 않겠다.'
대청의 2인자 자리가 눈 앞에 있었다.
하루아침에 유배자 신세가 되라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있던 지르갈랑 앞으로 밀서 한장이 날아온 것은, 퍼알라에서도 더 버티지 못하게 되었을 때 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