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합집산 (5) >
"역적들을 물리치고 개선하는 군대다! 감히 식량을 주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네놈들은 봄보고르의 잔당이란 말인가?"
"라파의 창고에 쌓아놓은 군량이 있지 않은가? 백성을 수탈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조금 내어달라는 말이다!"
상경회령부에서 남하한 아민의 군대는 라파에 들러 약탈 아닌 약탈을 감행했다.
라파는 닝구타처럼 요심에서 벗어난 변경지역을 제어하는 주요 거점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렇기에 닝구타보다는 못하지만 역시 많은 부족들이 모여 살고 있었고, 원정을 대비해 쌓아놓은 식량도 많았다.
"총관, 이정도면 보급에는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좋다. 식량과 건초까지 남김없이 싹 가지고 가자."
아민이 소소쿠에게 말했다.
라파는 그의 근거지인 닝구타와도 거리가 제법 떨어져있던 만큼 민심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아민이었다.
물론 텅 비어버린 창고를 보고 라파의 청 관리들은 절망할 것이고, 백성들은 원성을 퍼붓겠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저번 조선정벌이 실패하고 외번몽고군이 독자적으로 철군할 때 라파를 한번 약탈하고 갔다던데, 이번에 우리까지 채량(寨糧)을 실시했으니 삶이 곤궁해지겠군요."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소소쿠의 말에도 아민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약한 자는 빼앗긴다.
그가 약했기에 홍타이지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유배지로 밀려난 것이고, 도르곤이 약했기에 호거에게 밀려나 요양에 은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삶의 이치가 그러하니, 아민으로서는 저들에게 베풀어줄 동정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음은 어디로 향해야겠습니까?"
"흥경(興京). 그 일대에서 지르갈랑 놈과 싸움을 벌이면 되겠지."
아민은 수도 없이 양람기를 이끌고 전장을 뛰어다녀보았다.
지금 자신이 데리고 있는 군대는 나름 정강(精剛)했지만, 양람기와 맞붙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정도는 눈 감고도 훤했다.
"정면으로 맞붙어서는 승산이 없다."
흥경, 즉 허투알라는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한 뒤 첫 수도로 삼은 곳이다.
아민에게는 흥경성을 점령할 생각도, 능력도 없었지만 지르갈랑은 그것을 모른다.
"흥경의 상징성 때문에라도 튀어나와 싸우려고 하겠지."
그러나 아민은 그와 맞상대하지 않는다.
한번 제집에서 나온 상대를 이리저리 찌르고 도망치기만 반복할 뿐이다.
"지르갈랑의 군대를 완전히 격멸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민에게 맡겨진 임무는 어디까지나 지르갈랑의 시선을 끄는 것이다.
뒤는 자신에게 사람을 보낸 범문정과 도르곤이 알아서 할테니까 말이다.
"총관께서 대망을 품으신 것은 알았지만, 왜 이리 서두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위험한 길이 아닙니까?"
소소쿠는 청의 중앙 정치와는 관계없이 동해여진 대부락의 수장으로 살아왔고, 그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얼떨결에 이 짓에 동참하기는 했지만 아민이 무엇 때문에 이런 도박을 벌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더군."
아민이 말했다.
닝구타까지 가서 세력을 모으며 와신상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업을 이루기 전까지는 결코 얻을 수 없으리라 여겼던 것이 있었다.
한때 그가 가졌으며, 지금은 잃어버린 것이었다.
"양람기를 내게 되찾아주겠다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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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한 도르곤과 도도는 곧장 요양성을 장악했다.
이미 도르곤이 머물며 이곳 관리들에게 영향력을 투사한데다, 정백기 병력이 일거에 밀어닥쳐 관청을 장악하니 순순히 도르곤의 명령을 받들겠노라 맹세한 것이다.
그 뒤 도르곤은 소수 병력만을 남겨놓고 곧장 심양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불과 150리 떨어져있는 심양인지라 요양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금방 전해질 것이고, 그리 되면 안에서 일을 도모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르곤의 예상은 적중했다.
"우, 우섭정왕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형님!"
눈이 뒤집어져 황급히 달려와 고하는 기사이의 말에 양샨은 크게 놀랐다.
"뭐라?"
"그게 무슨 말인가? 어서 자초지종을 설명해보게!"
"시간이 없습니다! 묵던의 성문을 닫아걸고 병력을 모아야합니다! 좌섭정왕 전하도, 정친왕 전하도 안 계신 이때에 저쪽에 호응하는 자들까지 나타나면······!"
그러나 기사이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들에게 들이닥친 부하들이 보고를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도로이 바루르 군왕(多羅武英郡王) 아지거가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그가 이끄는 병력들이 양백기 구사 어전들의 집에 가서 감시병력을 베고 그들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양백기가 궐기했습니다! 지금 묵던성 전역에서 칼부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호로호이와 양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호거의 측근으로서 부귀를 누릴줄만 알았지, 이런 일에 대한 계획 따위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 우리 병력들은? 묵던에 남아있는 상삼기 병력들부터 수습해서······."
"형님, 이미 늦었습니다."
기사이가 양샨의 손을 부여잡고 말했다.
"늦었다니, 뭐가 말이냐?"
"우리가 상삼기 병력들을 끌어모아서 맞서는 동안 정백기가 요양에서부터 들이닥칠겁니다. 그리되면 좌섭정왕의 측근인 우리들이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묵던에 닿는 순간 만사가 끝장입니다, 형님."
양샨이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도르곤과 도도가 지금 이 순간에도 심양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데, 그 전에 저들을 처리하고 성문을 닫을 수 있을까?
"허면 어찌해야하느냐?"
"우선 수습할 수 있는 병력은 최대한 수습해서 정친왕과 합류하시지요. 좌섭정왕께서도 소식을 들으시면 곧장 회군하실 터이니, 그때가 되어 다시 묵던을 되찾는 것이 상수입니다."
"음······."
싸움 한번하지 않고 수도인 심양을 내어주어야 하냐는, 당연한 물음이 좌중을 감쌌지만 그보다는 보신 욕구가 더 컸다.
자칫하면 시신도 못건질 상황이 될수도 있었던 것이다.
"내가 듣기에도 기사이의 말이 옳은 것 같소. 한을 모시고 묵던을 빠져나갑시다."
호로호이가 그렇게 말하자 양샨도 끝내 거기에 동조하고 말았다.
"조, 좋소. 기사이, 너는 병사들을 데리고 궁궐로 가라! 최대한 빨리 한을 모셔와야 한다"
머리가 온통 살 궁리를 위해 굴러가는 와중에도 쇼서만큼은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먹지는 않은 것이 다행이랄까.
그러나 기사이가 심양궁 중원의 숭정전에 다다랐을 때, 이미 그곳에는 쉬이 뚫기 힘들 정도로 많은 병력들이 포진해있었다.
"양백기가 벌써?"
기사이가 놀라 말했지만 자세히 보니 일반적인 팔기군과는 확연히 달랐다.
변발을 하고 복식도 갖춰입었지만 기사이는 그들이 한인(漢人)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저기서 펄럭이는 깃발은······.
"우전 초하도 배신했단 말인가?"
기사이는 분통을 터뜨렸다.
그때 숭정전에서 나온 범문정이 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역적의 폐행(嬖幸, 아첨꾼)인 기사이가 있다! 저자를 잡아라!"
"예!"
충성스러운 목소리로 응답한 우전 초하들은 곧장 기사이가 이끌고 온 상삼기 병력에게 달려들었다.
급히 강덕제 쇼서만을 데리고 오기 위해 출동한 병력이기에 그 수는 도열한 우전 초하보다 확연히 적었고, 승부는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학사, 호로호이와 양샨이 성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그래?"
보고를 들은 범문정이 생각에 잠겼다.
그들이 도망친 이상 심양 내에서 조직적인 저항은 분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직 도망치지도, 싸우지도 못하고 덩그러니 남아있는 이들이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범문정이 외쳤다.
"황백부왕의 댁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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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도르곤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본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이지만 이 상황에서는 기쁜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호거의 감시를 피하려 요양으로 도망치듯 물러난 것이 엊그제같은데, 이렇게 위풍당당히 심양에 돌아오게 되었으니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밀려오는 감동을 즐기기에 앞서 해야할 일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호로호이와 양샨은 도망쳤다고?"
"예, 전하. 하지만 기사이는 사로잡았습니다."
"그 구더기 같은 놈들."
도르곤이 경멸스런 목소리로 내뱉었다.
호거에게 달라붙어 온갖 나쁜 꾀를 짜내던 그들이었으니, 도르곤의 눈에 좋게 보일리가 없는 것이다.
"한을 뵈어야겠다. 궁궐로 가자."
"명을 받들겠나이다, 섭정왕 전하!"
수크사하의 외침에 정백기와 양백기 병사들이 즐거운듯 웃음을 터뜨렸다.
심양도, 황제도 모두 이젠 모두 그들의 손에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순간엔 다들 그렇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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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궁 숭정전.
홍타이지 사후 권력은 좌익왕정과 우익왕정에 넘어가, 신하들을 거느리고 조회다운 조회가 열린 적이 없던 이곳에는 처음으로 쇼서가 주관하는 자리가 열렸다.
"선황께서 붕어하신 이래 짐의 보령이 어린 까닭으로 두 섭정왕에게 국사와 군무를 나누어 맡게 하였는데, 숙친왕(肅親王, 호거)은 섭정을 핑계삼아 나랏일을 농단하고 임금을 업신여긴 것이 오래되었다.
그러나 오늘 충신들에 의해 간적이 제거되고 도읍을 되찾았으니 짐이 기쁘기가 한량없다. 아직 제거되지 않은 호거와 지르갈랑을 황적(皇籍)에서 추탈하고 아울러 조적(朝敵)으로 선포하니, 너희 신하들은 황명을 받들어 이들을 치라!"
쇼서가 어린애답지 않은 목소리로 그리 외치자 신하들이 모두 엎드려 외쳤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도르곤도, 도도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황제에게 허리를 숙이는 것은 기분이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지만, 얼마 뒤면 다시 숭정전 앞의 신하들은 모두 도르곤의 명령을 받기 위해 줄서있으리라.
그러나 아직 쇼서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또한 짐이 섭정을 폐하고 친정할 것이며, 범문정을 군기대신(軍機大臣)에 삼겠노라."
군기대신은 원래 역사에서는 훗날 옹정제 때에나 설치되는 직위이나, 이곳에서는 강덕제에 의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도르곤과 도도로서는, 이 새로운 직위가 무슨 일을 관장할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형님, 이런 말은 없지 않았습니까?"
"쉿."
도르곤은 그 자리에서 반발하려 드는 도도를 억눌렀다.
그러나 그 또한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범문정······. 아직 싸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강압적인 수를 쓸 정도로 얕은 인간은 아니라고 믿었거늘.'
자칫하면 다같이 죽을수도 있는 악수(惡手)였다.
때문에 권력투쟁을 하더라도 최소한 호거와 지르갈랑을 물리친 뒤가 될 것이라 믿었다.
물론 그리되면 고작 한인 출신 대학사인 범문정보다 종친이자 팔기를 거느린 자신이 훨씬 유리할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지금 칼을 뽑아든 것인가.'
"더하여 닝구타총관 아민에게 양람기를 돌려주고, 정홍기와 양홍기는 그대로 황백부왕 다이샨이 관장하게 한다."
도르곤은 범문정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이거였군.'
호거의 측근들이 싸우지 않고 저희들만 심양성을 빠져나가자, 정홍기와 양홍기를 맡고 있던 다이샨의 아들들은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이복형인 쇼토는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유배되어 있을 뿐이니, 이대로 도르곤이 집권한다면 곧장 그를 불러와 다시금 두 홍기를 맡길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범문정은 그 틈을 파고 들어간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황백부왕의 후처와 그 아들들을 포섭하다니, 빌어먹을 늙은이가.'
도르곤의 속에서는 분노가 치솟았지만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음,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하는가.'
이대로 쇼서의 친정이 시작되고 나면 그는 어디까지나 팔기의 기주 중 한 사람, 종친의 한 사람에 불과해진다.
하지만 지금의 도르곤으로서는 그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이 끝나기만 하면, 전부 도륙해버릴 것이다,'
도르곤은 그리 생각하며 참았지만, 꽉 문 입술에서 한줄기 피가 흘러내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