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합집산 (4) >
일본 사신에 대한 접대는 예빈시(禮賓寺)에서 도맡는다.
명나라에서 오는 칙사를 대접할 때처럼 원접사(遠接使)와 같은 고관이 나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예조 관리들이 여럿 나와 있었다.
예로부터 연회가 열릴 때는 종종 역사(力士)들의 수박희(手拍戲)를 함께 보고 즐기고는 했는데, 조촐한 주안상을 대신해 즐길거리를 주기 위함인지 훈국에서 사람들이 나와 그런 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어이쿠!"
"역시 젊은 사람이 힘이 좋네 그려."
힘에서 밀려 쓰러진 초관 허응선이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상대로 나섰던 이사룡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기껏 서너살 차이인데 형은 무슨 변명을 그리 하시오?"
게다가 이사룡은 냉병기보다는 조총이 특기였으니, 허응선으로서는 단단히 체면을 구긴 셈이었다.
그 뒤로도 차출된 초관들이 줄을 지어 서있었다.
"이야! 이거 용쓰는구만! 좀 더 기민하게 움직여야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병별장 황익이 외쳤다.
일본 사신들과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졸지에 수박 대결을 펼치게 되었으니 초관들 쪽 분위기는 어두웠지만 황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별장 영감."
"험, 자네는 왜 그리 표정이 어두운가?"
박철균이 나지막이 부르자 황익이 그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안그래도 험악한 낯이 딱딱하게 굳어있으니 훈련대장과는 다른 의미로 무서운 인상이었다.
"저쪽, 왜인들 중 한놈이 보이지 않소이다."
"응?"
황익은 박철균의 말에 그쪽을 둘러보았지만 그는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소피라도 보러 간 것이 아니겠는가?"
"잠시 실례하겠소이다."
박철균은 황익을 지나쳐 땀을 닦고 있는 허응선과 이사룡에게로 갔다.
"너희들은 나를 따라와라. 사람 하나를 찾아야겠다."
'빌어먹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본래 사신들이 드나들던 길을 통해 진격해온 까닭에, 조선 조정은 일본 사신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동안 그들의 상경마저 막을 정도였으나 이번에는 그런 기조가 서서히 풀어져 왜사들을도성에 들인 것인데, 한 명이 멋대로 일행을 빠져나가다니.
"담이라도 뛰어넘은 것인가?"
출입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서는 보고가 없었다.
그러나 몸이 날랜 자라면 저 담도 훌쩍 넘어설 수 있으리라.
당장 공산성에서의 안익신도 그랬지 않은가.
한참을 사람을 풀어 찾던 박철균은 의외의 곳에서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전방에 차려 총!"
"악!"
"악!"
연무장에 은빛으로 번뜩이는 칼날들이 빛난다.
그러나 이 시대 조선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환도(環刀)는 아니요, 이른바 왜도(倭刀) - 즉 일본도 또한 아니다.
바로 총검(銃劍)이었다.
21세기 국군에서는 끊임없이 무용론이 제기되고 있는 그것이기는 하나, 이 시대에는 더없이 유용한 물건이었기에 이자원은 곧장 훈련도감에 총검을 도입했다.
소위 연무형 19개 동작 같은 총검술 또한 마찬가지로 뿌리를 내렸다.
"전방에 찔러!"
"악!"
"악!"
절도있는 동작으로 움직이는 훈련도감 병사들을 보고 있던 박철균은 자신이 찾고 있던 자가 이자원의 앞에 서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대장 영감!"
급히 환도를 꺼내들며 그의 상관을 경호하러 나선 그였지만 이자원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늦었군."
이자원의 말에 박철균은 고개를 푹 숙이며 대죄했다.
"죄송하오이다, 대장 영감. 저자가 연회장을 빠져나간 것을 늦게 알게 됐는지라······."
"되었다."
이자원은 이런 것을 가지고 박철균을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이자원이 말했다.
"무슨 이유로 도성을 염탐하려 든 것인가?"
중군 김충선 밑에 있는 항왜인지 곁에 있던 병사 하나가 통역을 맡았다.
"나는 저 이를 따라왔을 뿐이오."
미야모토 무사시가 이자원의 곁에 서있는 적비를 보며 말했다.
박철균의 눈이 슬쩍 그쪽을 향했다.
"적비를?"
이자원이 묻자 무사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유에서?"
"저자에게서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꼈소."
무사시가 말했다.
"일본에는 닌자(忍者)라는 자들이 있소. 조선에도 저런 부류가 있을줄은 몰랐지만, 계속 우리쪽을 감시하는 듯하기에 쫓아갔더니 이곳으로 달아났소."
적비를 그 자리에 붙여놓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무사시가 함부로 자리를 이탈한 것도 사실.
"쫓아냈으면 그만이지, 따라올 필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군."
이자원의 말에 무사시가 고개를 숙였다.
"그 점은 사과를 드리겠소. 조선이 정한 규칙은 따랐어야 했건만."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연무장까지 염탐했으니 간자로 몰려도 할말이 없겠지."
간자는 즉참해도 할말이 없다.
무사시는 그 말을 듣고 입술을 비틀었다.
"나는 간자가 아니오."
"말은 허망한 것이다. 박 파총."
"예, 대장 영감."
박철균이 허리춤에 손을 갖다댔다.
무사시는 그보다 한발 더 앞서 있었다.
"이, 이런!"
어느 틈에 무사시의 검은 박철균의 목 근처, 1자(30cm)까지 닿아 있었다.
실로 번개와 같은 발도술(抜刀術)이었다.
"나도 늙었군."
그러나 무사시의 칼날은 박철균의 목을 파고 들지는 못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중간에 막아선 이자원의 검 때문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무사시가 중얼거렸다.
"일본에 칼 잘쓰는 무사들이 많다하나 이런 실력은 드물다. 이름이 뭐지?"
"미야모토 무사시라 하오."
일본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번쯤은 얻어 들어보았을 이름이었다.
그만큼 유명한 이였으니 말이다.
'전체적인 완력은 오보이보다 아래지만, 훨씬 노련하군.'
이자원은 만주 제일의 용사라 칭송받은 오보이와 겨뤄본 경험이 있었다.
이미 중년에 접어든지라 완력과 민첩함은 떨어졌지만 발도 자체는 훨씬 능숙해보였다.
"그러는 당신은 바로 오랑캐 황제를 일검(一劍)에 베었다는 조선 장군이 아니오?"
"칼로써 죽인 것은 아니다."
홍타이지는 어디까지나 천자총통을 맞고 쥐포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대답에도 무사시는 기쁜 기색을 띄며 말했다.
"나는 항상 천하제일이라 자부했지만, 조선이나 중국의 무인들과는 겨뤄본 적이 없었소. 내가 보기에 그대는 그 중에서도 한손에 꼽히는 무인일 터. 나와 대결해주시오!"
나이가 들만큼 들었음에도 아이처럼 들떠서 말하는 무사시였지만, 이자원은 그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거절하지."
"스스로 말하기는 부끄러운 일이나, 나 또한 나름 일본에서 명성이 있소. 그대와 맞서기에 충분한 자격이 될 것이오."
"나는 군인이지 무인이 아니다."
무인은 자신의 무예를 겨루기 위해 싸우지만 군인은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싸운다.
이자원은 전쟁터에서 본신의 무예 덕을 많이 보았으나, 그렇다고 더 높은 경지를 이루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고 정진할 생각 따윈 없었다.
칼로 안되면 총을 쓰고, 총으로 안되면 대포를 쓴다.
그것이 군인의 싸움 방식이었다.
"내 목적은 오로지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다. 무익한 싸움을 할 이유 따위는 없다."
이자원의 말에 무사시가 표정을 잔뜩 찌푸렸다.
"패도(覇道)적인 발상이오. 무도(武道)라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 모르시오?"
"군인에게 무는 수단일 뿐이다. 군인의 도와 무인의 도는 다른 법이다."
"허."
무사시는 이자원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군인의 도와 무인의 도는 다르다라.'
무예를 가진 자는 뽐내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이토록 젊은 나이에 뛰어난 무용을 가지고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자신만 하더라도 이 무렵에는 천하의 검사들을 만나 검을 겨루는데 정신이 팔려있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자는 나름의 도리와 선을 세웠다.'
"그래서 저렇게 반쪽짜리 무술을 만드신게로군."
총검술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박철균은 이자가 감히 대장 영감이 '창시'하신 총검술을 모욕한다 여겨 성을 내려 했지만, 무사시의 말뜻은 그게 아니었다.
"조총을 이용해 근접전을 펼칠 수 있다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소. 그걸로 심지어 무술까지 만들줄이야. 물론 그 극의(極意)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겠으나, 저 동작들만으로도 충분히 실전적이고 강맹하겠지."
훈련도감에서 총검술을 가르치고 있다고는 하나 품새에 가까운, 지극히 기본적인 동작 뿐이다.
다른 무술들처럼 무언가 더 배울 것이 있다 해도 병사들을 하나하나씩 붙잡고 수년간 가르칠 필요 따윈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 일본 제일의 검호(劍豪)에게는 그것이 되려 이자원이 말한 군인의 도와 통하는 면이 있어보였던 모양이다.
"내 나이 50이 되어 그간 깨달은 무도에 대해 책을 남기고 싶었으나, 조금 더 배워야겠소."
무사시가 말했다.
"잠시 조선에 머물고자 하는데, 허락해줄 수 있겠소?"
===
"저 왜인을 받아들이실 작정이십니까?"
적비가 이자원에게 물었다.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유럽 쪽에서는 이미 총검이 등장했고, 총검술의 발달도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아직 일본까지 전해지지는 않았다.
군사 기밀이라면 기밀인 것이다.
"살인멸구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애초에 너는 그러기 위해 훈국까지 유인한 것 아니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없애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자원은 무사시의 제안을 듣고 그럴 마음을 접었다.
'자발적으로 조선에 머물고 싶어한다면 이용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자원은 그것으로 그 얘기를 접어두고 적비에게 편지 한장을 건넸다.
"이것을 네 주인께 전하도록 하라."
"······천조의 움직임을 염려하시는군요."
북방의 혼란이 지속되면 명이 조선을 추동하려 들지 모른다.
이자원이 전하는 편지는 그것을 막기 위한 보험이었다.
"장군. 청에서 내란이 일어난 것이 사실이라면, 조선이 움직이면 충분히 청을 격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비."
이자원이 말했다.
"너는 칼이다."
적비는 이자원의 말을 듣고 얼굴을 굳혔다.
"칼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이것을 네 주인에게 전해주기만 하면 된다."
"······받들겠습니다."
적비는 고개를 꾸벅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지르갈랑이 묵던을 빠져나갔습니다."
도르곤의 귀에 이 소식이 들려온 것은 지르갈랑이 출진한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심양에 있는 양백기의 수하들이 전해준 소식을 들은 도르곤은 장고에 들어갔다.
"우섭정왕 전하, 정말 지르갈랑이 묵던에서 출진했군요."
"우리도 슬슬 움직여야 할 것이다."
도르곤이 말하자 도도가 대답했다.
"하지만 전하, 우리 병력만으로 되겠습니까?"
"네가 이끌고 있는 정백기가 있지 않느냐?"
동생의 말에 도르곤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지르갈랑이 우리가 요양에서 거병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장 회군할텐데, 그 전에 묵던을 떨어뜨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어렵겠지."
도도가 말꼬리를 흐리며 묻자 도르곤은 선선히 대답했다.
지르갈랑이 양람기를 이끌고 출진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심양에 남은 병력은 많았다.
그러나 도르곤에게도 복안은 있었다.
"묵던 안에 있는 나의 양백기가 움직여줘야 한다."
"허나 전하께서 요양에 계신데 어떻게 지휘하시렵니까?"
도르곤이 의심을 피한 이유 또한 거기에 있었다.
양백기 구사 어전들도 다 심양에 머물며 호거 측의 감시를 받고 있으니, 도르곤이 움직일래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아지거 형님이 있지 않느냐?"
"아!"
아지거는 도르곤과 도도의 동복형이었다.
그러나 그들보다는 오히려 작위가 낮았는데, 그 때문에 존재감이 두 동생보다 떨어지는 편이었다.
게다가 내내 명과의 싸움에 나서있다 심양으로 돌아온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지르갈랑도 미처 신경을 못쓴 것이다.
"이미 양백기들에게는 형님의 명령을 따르라고 일러두었다. 우리가 묵던으로 군사를 몰아가면 일제히 봉기할 것이다."
"역시 전하께는 계획이 다 있으셨군요."
도도는 도르곤의 준비성에 감탄하며 말했다.
만약을 대비해 아지거에게 지휘권을 넘겼었다니.
"자, 예친왕, 움직여라! 간신 호거를 토벌하고 묵던을 되찾아야 한다!"
도르곤이 외쳤다.
'그래, 이제는 내가 전면에 나서겠다.'
최후의 승리자는 호거도, 범문정도, 저 어린 황제도 아닌 자신이 될 것이다.
그리고 청의 혼란이 수습되는 그 순간, 도르곤은 이 모든 일을 초래한 장본인의 목을 가지러 갈 것이다.
'이자원. 네놈이 겨눈 칼이 치워질 날도 머지 않았다.'
도르곤은 이를 빠득 갈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