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92화 (92/213)

< 이합집산 (3) >

"어서 문을 여시오! 문을 여시오!"

아래에서 급박히 부르는 소리에 성곽을 순찰 돌고 있던 조을동은 어리둥절하여 바깥을 내다보았다.

도성 경비 또한 훈련도감이 맡고 있으니 대장(隊長)인 그도 몇번인가 순찰을 돌아봤지만 이처럼 다급한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았다.

"무슨 일이오?"

"북방에서 오는 급한 소식이오! 총병 대인을 당장 뵈어야겠소!"

훈국 병사들은 그 말을 듣자 서로를 쳐다보았다.

도성 문은 인정(人定, 밤 10시 무렵)에 닫혀 새벽 4시쯤되는 파루(罷漏)에 열린다.

마침 시간이 되었기에 조금만 기다리면 성문이 열릴 것이었지만 그는 한시가 급한듯 재촉했다.

"형님, 어떻게 할깝쇼."

"보아하니 정식 파발은 아닌듯한데······ 가만, 오늘 창의문 수문장이 박 파총 나리 아니냐?"

조을동의 물음에 고발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정식으로 수문장만 맡아보는 관리들도 있었지만, 그 숫자가 적다보니 군영에서 무관들이 차출되어 번을 서는 경우도 많았다.

마침 오늘은 박철균이 창의문을 맡은 날이었다.

"네가 가서 박 파총 나리를 뫼셔오너라.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리 급한게냐?"

뛰어온 박철균이 성문을 열고 나서 묻자 그는 우물쭈물하더니 말했다.

"소관은 가도에서 왔사온데, 오 부총병께서 급히 소식을 전하라 하시었습니다."

오삼계를 말함이다.

박철균이 그 말을 듣고 눈을 치켜뜸과 동시에 다시 한번 아래에서 큰소리가 들려왔다.

"평안감사 영감께서 보내신 파발이오! 어서 문을 여시오!"

박철균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

쿠케박케르가 선물한 자명종이 4시반을 가리켰다.

파루가 되어 성문이 열린 것이 4시였으니, 이자원이 깨서 보고를 받기까지 불과 30분 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부총병 오삼계가 보내온 서찰이오이다. 아마 이야기를 전해듣자마자 급히 파발을 띄운듯 싶습니다."

박철균의 보고에 이자원은 조용히 그것을 들추었다.

"아민에게 붙여놓은 자들에게선 별다른 말이 없는가."

"몇몇이 아민을 따라 종군했는데, 그 탓에 오히려 소식을 전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사오이다."

조선에 귀순했던 향화호인들은 두번의 호란을 전후하여 기존 조선인들과 많은 충돌을 빚었다.

그것이 조선인들의 텃세 때문이든, 혹은 향화호인들의 거친 성정 때문이든 조선 내부의 위험요소라는 것은 자명했다.

그 때문에 이자원은 아민에게 원하는 자에 한해 향화호인들을 그에게 보내주겠다고 제안했고, 머릿수가 곧 힘인 아민은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물론 이자원은 그들 사이에 대거 간자들을 심어놓았다.

그 덕에 아민이 별말이 없었음에도 봄보고르를 치러 나간다는 등의 정보를 미리 알 수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별 쓸모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민이 군사를 이끌고 심양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자원은 그 내용을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명의상 북금 정벌의 공을 자기네 추장에게 내세우고, 아버지의 무덤을 참배하려는 것이라 하지만, 의도는 뻔하군."

가도의 정보는 상세했다.

좋든 싫든 청과 가장 가깝게 움직이고 있는 세력이었으니 말이다.

심세괴였다면 모를까, 오삼계가 모아보낸 정보였으니 평안감사의 장계보다 나을 것이 분명했다.

헌데 이만한 일을 벌이면서 조선에 도움도 청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르곤과 손을 잡은 것인가."

이자원이 중얼거렸다.

호거가 청 조정의 주도권을 움켜 쥐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음알음 알려져있었다.

그것은 도르곤파였던 쇼토를 이자원이 몰락시킨 것에서 시작되었으니, 어찌보면 이 사태도 그가 기여한 것일지 모른다.

이자원은 머릿속으로 상경회령부에서 심양까지 가는 일정과, 그 경로를 그려보았다.

'지금쯤 라파에 도착했겠군.'

라파는 닝구타와 마찬가지로 심양에서 동만주로 가는 중간기지 역할을 맡고 있다.

아민이 보급을 취하려면 라파를 틀어쥐는 것이 가장 간편하리라.

그리고 그 다음은······.

"흥경(興京)을 취하겠군."

"대장 영감, 기회가 아니겠사오이까."

병조참판까지 겸하게 된 이자원이지만 박철균에게는 아직까지 대장이란 호칭이 익숙했다.

어차피 같은 종2품이니, 훈국 내에서는 대장이라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었고 말이다.

"무슨 기회 말이냐."

"그야······ 오랑캐들을 물리치고 임금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기회 말이오이다."

박철균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자 이자원은 서신을 덮어놓으며 말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청이 내분에 휩싸인 틈을 타 들이친다 해도,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아직까지 조선은 그럴만한 역량이 되지 못한다.

"심기원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오삼계 또한 서신 말미에 당장 군사를 내서 파고 들 것을 강력히 권하고 있었다.

기야하찬을 지원하자는 계획을 세운 것만 보아도, 임금은 조그마한 틈이라도 보이면 그곳에서 희망을 찾았다.

하물며 내전 직전에 치달은 이런 상황에서는 반드시 군사를 내라고 하겠지만, 이자원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너는 이 사실을 함구하거라.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된다."

이자원의 말에 박철균은 곧장 답했다.

"예, 대장 영감!"

임금에게 가야할 정보를 막는 것에 대한 의문은 품지 않는다.

그의 대장이 내리는 결정은 항상 옳았으니까.

===

"아민이 군사를 일으켰다고 들었다. 이 자가 청에 반기를 든 것인가? 이리도 빨리?"

감사의 장계를 받은 임금은 눈 앞의 두 사람이 입궐할 때까지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두 사람이라 함은 좌의정 신경진과 병조참판 겸 훈련대장 이자원이다. 임금은 군사(軍事)를 결정할 때는 반드시 이들을 앉혀놓고 상의했다.

신경진은 몰라도 이자원과는 항상.

이자원은 임금의 희망 섞인 물음을 단칼에 깨부쉈다.

"아민이 제 땅에서 병력을 일으켜 들이치자 북금이 일거에 무너졌는데, 그 공을 자랑하고자 심양에 직접 입조한다고 밝혔사옵니다. 요양에 있는 제 아비의 무덤에도 들른다니, 아마 그 두 가지 사실이 섞여 전달된 것으로 보이옵니다."

"으음, 그런가."

임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대적인 싸움이라도 일어나는가 싶었더니 그냥 와전된 소문이란 말인가.

"지금은 병력을 조련하고 내실을 다질 때이지, 함부로 군사를 일으킬 때가 아니옵니다. 훈국이 자리를 비우자 권대용 같은 자가 나선 것이 좋은 예가 아니옵니까."

좌의정 신경진이 슬쩍 눈치를 보며 말했다.

신경진의 말에 임금은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라 말을 돌렸다.

"그것은 내가 깊게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자칫하다간 세력을 다 잃고 도망온 기야하찬을 위해서 북방에서 용쓰는 동안 충청도 전역에 불길이 퍼졌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자원이 막았기에 망정이었지만 말이다.

"지금은 왜사(倭使)가 오는 일에 더욱 신경을 써야할 것이옵니다."

이자원의 말에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만교인들을 북방으로 보낼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느냐."

"호조에서 물건이 준비가 되는대로 이주를 시킬 것이옵니다."

김육은 또 돈나갈 일이 생겼다며 비명을 질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 또한 이제는 조선의 백성인 것이다.

"우마(牛馬)와 종자, 의복을 넉넉히 주고 풍토에 맞는 농법을 가르쳐 2, 3년 내로는 자급자족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이옵니다."

"그네들은 일본에서도 따뜻한 남쪽에 살던 이들이라 들었다. 얼어죽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느니라."

임금이 말했다.

어쨌든 왜사가 북방까지 가볼 것도 아니고, 그 점만 해결하면 문제가 없을테니 조금 마음이 풀어지는 임금이다.

"문제는 하나가 더 있사옵니다."

"무엇이냐?"

"저들은 홀란도를 자기네 속국으로 여기고 있사온데, 우리가 그들과 통교함을 알게 되면 항의를 해올 공산이 크옵니다."

쿠케박케르가 일본에 들키지 않게 알아서 잘 조치하겠지만, 조선에서도 불필요한 외교 마찰을 삼가는 것이 좋았다.

"개항장으로 내어준 벽란도는 도성과 거리가 있으니 각별히 신경만 쓴다면 문제는 없을 것이옵니다."

이번에는 신경진이 말했다.

"그렇다면 왜사가 감히 우리에게 깊이 항의할 일도 없다는 뜻이군."

임금은 부왕이 일본을 대하던 모습을 기억했다.

이괄이 난을 일으켰을 때 왜관에서 차병(借兵)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을 정도였고, 그 뒤에도 조총과 왜도를 수입하려 애썼던 부왕이다.

어디까지나 왜인들에게도 쓸만한 구석이 있었기에 그런 것이니, 자신도 이용해먹을 수 있을만큼은 이용해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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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시마바라에는 지금 조선군이 쳐들어와 남만교를 공인하고 막부를 개종시킬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돌고 있습니다. 우리 쇼군께서는 조선과 누대에 걸쳐 정답게 지내왔는데, 이런 흉험한 말을 듣고 크게 놀라신 까닭으로 소관을 보내셨습니다."

일본 사신으로 온 자는 등지승(藤智繩)이라는 이로, 이미 몇년 전에 동래에 왔다간 적이 있는 자였다.

급히 구성된지라 사신단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는 제법 정사(正使) 티가 나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요. 우리는 청과 불구대천의 원수로서, 그들과 싸우는데도 힘에 부치거늘 어찌 일본을 적으로 돌리겠소?"

등지승도 으레 이런 싸움이 끝나고 나면 돌게 마련인 헛소문임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물론 아국은 조선의 신의를 믿고, 조선왕 전하의 인덕이 아름다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길리시단(吉利施端)들은 함부로 오랑캐를 숭상하고 제 임금에게 칼까지 들이미는 족속입니다. 전하께서 그들을 어찌 처결하오셨는지요?"

"그것을 갖고 오너라."

임금이 명령하자 내관 하나가 함에 나뭇조각을 받쳐들고 종종걸음으로 뛰어왔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나뭇조각을 본 등지승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해안으로 떠밀려온 왜선들의 파편이오. 아마 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이리된 것이 아닐까 싶소."

"저, 전부 이리되었단 말씀입니까?"

"그렇소. 살아남은 이들이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오는 길에 죄다 풍랑 맞고 죽었다.

조금만 생각해도 미심쩍은 이야기다.

그러나 등지승은 함부로 더 추궁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상대는 일국의 왕이었으니 말이다.

"······길리시단들은 우리나라의 죄인입니다. 이리 바닷속에 가라앉았으니 신불(神佛)의 노하심이 아닐까 싶지만, 혹 헛소문을 믿고 조선에 계속 건너가려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전하께서 부디 이웃의 정을 생각하시어 결단해주십시오."

결국 등지승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였다.

"걱정 마시오. 표류해오면 모두 일본으로 송환해 그 땅의 처벌을 받게 할 터이니."

임금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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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어지럽고 소출이 적다는 이유로 성대한 연회 같은 것도 열리지 않았다.

사신단에게 주어진 것은 조촐한 주안상이 다였다.

그동안 조선 관리들의 발뺌이나 계속 듣고 있던 등지승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사신관에 들어가버리고, 일행들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때 곁에 앉아 술을 기울이고 있던 미야모토 무사시의 눈에 무엇인가가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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