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합집산 (2) >
"오랜만에 뵙습니다, 우섭정왕 전하."
오랜만에 몽골에서 돌아온 도도의 얼굴은 거멓게 그을려있었다.
사석에서는 편히 형님이라고 부르던 이전과는 달리, 도르곤에게 깍듯이 예를 취하는 그다.
지금 이 자리는 형제의 정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라, 그들의 목숨을 걸고 일을 꾸미는 자리였기에.
"고생 많았다."
정백기는 그간 몽골에 머무르며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감시하고 있었다.
기주인 도도 또한 중앙 정계에서 물러나 몽골에서 제법 고생을 하고 있던 터였다.
도도 본인이 병을 칭한데다, 정백기가 지쳤다는 핑계를 대긴 했지만, 호거가 직접 몽골을 거쳐 화북으로 출진하려는 뜻을 품지 않았다면 일이 어려워졌을 것이다.
"내가 요양에 오지 않았다면 호거가 감히 그런 계획을 세우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도르곤이 말했다.
호거가 이미 도르곤의 세력을 짓누를 정도로 주도권을 장악했다고는 하나, 도르곤이 공식적으로 자리에서 내쫓기거나 숙청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 경계를 누그러뜨리려면 요양으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골치 아픈 정치 이야기라니, 차라리 몽골에 머물러있는 편이 나을뻔했군요."
"정말 그리 생각하느냐?"
도르곤이 동생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야망으로 따지자면 자신보단 덜하지 않은 동생이다.
지금 도도가 하는 말은 너스레에 불과하다.
도르곤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정말 전하께서 요양에 오셨으니 일은 오히려 더욱 어려워진 것이 사실입니다. 호거가 마음 놓고 묵던을 떠나는 이유가 있지요."
도도의 말은 사실이었다.
"호거의 부재를 틈타 묵던으로 귀환하려 해도 지르갈랑이 막으려 들겠지."
그러나 이는 도르곤의 예상 내였다.
"우섭정왕 전하, 그가 왔습니다."
마침 바깥에서 호위를 서고 있던 수크사하가 그에게 보고를 올렸다.
"이리로 모시도록 해라."
도르곤의 대답에 수크사하의 안내를 받아 한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당신은······."
도도가 뜻밖의 인물에 놀라 묻자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두 분 전하. 본래 성경(盛京, 심양)에서 뵈어야 하건만, 저 좌섭정왕의 횡포 탓에 요양으로 오셨으니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남자는 바로 내각대학사 범문정(范文程)이었다.
세간에서는 사정이 어쨌거나 호거에게 협력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던 그였기에, 도도의 놀라움은 더했다.
"어서 오시오, 대학사. 호거의 감시가 심할 터인데 용케 요양으로 오셨군."
"제 형님은 목숨을 걸고 더 험한 곳까지 가셨는데 제가 어찌 몸을 사리겠습니까."
범문정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공통의 목적을 위해 손을 잡기는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완전한 신뢰 관계를 형성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범문정이 직접 이곳에 방문한 것이다.
"좌섭정왕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전권을 쥔 이래로 조정은 온통 대의(大義)가 아니라 좌섭정왕의 세력을 챙겨주기 위해 돌아가고 있으니, 위로는 황상을 능멸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지요."
"옳은 말이오."
도르곤은 선선히 긍정했다.
그가 권력을 잡았다면 적어도 호거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강덕제가 허수아비가 되는 것은 똑같았겠지만.
"한께서 품으신 뜻도 물론 마찬가지겠지요?"
"물론입니다."
범문정은 쇼서의 친필이 적힌 밀서를 내밀었다.
아민과 달리 도르곤에게는 위험을 감수하고 범문정이 직접 이것을 지니고 온 것이다.
고래(古來)로 황제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국사를 전횡한 권신이 한둘이 아니었고, 거기에 맞서 허수아비 황제가 내려보내는 밀서의 내용도 대개가 비슷했으니, 곧 역적을 처단하고 나라를 바로 세워주길 바란다는 상투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도르곤 또한 그 내용 자체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 밀서야말로 그가 지금부터 취하려는 행동의 정당성을 보증해주는 것.
도르곤과 도도는 꿇어앉아 조칙을 받들며 외쳤다.
"신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도도 등은 종실의 일원으로서 역적 호거를 처단하고 나라와 사직을 바로 세울 것을 맹서(盟誓)하겠나이다!"
호거를 제거하기 위한 강덕제와 도르곤의 동맹이, 여기에서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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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부터는 그야말로 논의가 일사천리였다.
"성경에 있는 정친왕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 그리고 일이 끝난 뒤 황상께서 이를 추인하시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도르곤이 기주로 있는 양백기는 여전히 심양에 남아있다.
그러나 지르갈랑이 눈을 부라리며 도르곤이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 든다면, 머리가 없는 양백기는 큰 힘을 쓰지 못하리라.
그렇기에 그것은 범문정 측에서 맡아주기로 하였다.
"호거가 묵던을 굳게 지키라고 명령하였는데 지르갈랑이 과연 순순히 걸려들겠습니까?"
"정친왕 또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니, 보통의 수단으로는 힘들겠지요."
범문정이 도도의 미심쩍은 물음에 대답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좌섭정왕의 수족과 같은 정친왕이라 할지라도, 제 안위를 위해서라면 무조건 꺾어야하는 상대가 있습니다."
범문정의 말에 눈치빠른 도르곤이 말했다.
"아민이로군."
"맞습니다."
지르갈랑이 아민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양람기의 원래 주인은 바로 형 아민이 아니었던가.
"그를 무슨 수로 끌어들였소?"
"일이 아직 성사된 것은 아니니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범문정이 그리 말해주기를 거부하자 도르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교활한 한인(漢人) 놈이.'
아민과도 무언가 거래가 오고 갔을 것이고, 아마 호거를 몰아낸 뒤 무슨 자리나 이권이든 약속했으니 그가 포섭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도르곤에게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것을 들으면 내가 반발하리라 예상했는가.'
도르곤은 범문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역시 어린 놈의 한이든, 그를 조종하는 범문정이든 믿을 놈이 못된다.
그런 확신이 굳어져가고 있었다.
"아민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도도가 나서서 물었다.
아민은 어쨌든 한번 독립을 시도한 인물이 아닌가.
"지금은 우리나 닝구타총관이나 그리 사정이 다른 것 같지가 않군요."
범문정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반역 전과를 들추어내기엔 자신들이 꾸미는 짓도 만만치 않다는 뜻이었다.
때문에 도도와 달리 도르곤은 아민의 가담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말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단지 이렇게 물었다.
"아민이 이유없이 묵던으로 군사를 몰아올 수는 없을텐데, 그에게 무슨 명분을 쥐여주기로 하였소?"
"별것 아닙니다. 그저 조그만 심술을 부려볼 뿐이지요."
범문정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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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없는 동안 묵던을 잘 부탁하오, 정친왕."
"여부가 있겠습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청나라 최고 권력자가 결심하니 준비는 금방 끝났다.
정황기, 양황기, 정람기의 상삼기(上三旗)를 끌어모아 그 숫자가 1만.
이번 침공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호거의 결심이었다.
물론 심양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 호거는 거기에 대해서도 안배를 마련해놓기는 하였다.
"정친왕이 묵던의 방어를 총괄토록 하시오."
"명을 받들겠나이다, 섭정왕 전하."
지르갈랑은 명목상 심양에 남아있는 팔기와 우전 초하(한군팔기의 전신)를 모두 관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가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자신이 이끌고 있는 양람기와 우전 초하 뿐.
"상삼기 병력 중에서 묵던에 남아있는 이들은 호로호이와 양산, 그대들이 이끌도록."
"예, 전하."
호거는 자기 측근들에게 별도로 부대를 맡겼고,
"정홍기, 양홍기는 황백부왕(皇伯父王, 다이샨)의 아들들이 맡겠다고 합니다."
"끙, 결국은 그렇게 되는군."
다이샨의 장남 요토와 차남 쇼토가 각각 이자원에 의해 몰락한 후, 후처인 나라 하라 씨 소생의 아들들이 두 기를 장악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요토나 쇼토와 달리 실력이 검증되지 않았다..
"그놈들, 싸울줄은 아는가?"
지르갈랑은 크게 한숨을 쉬었지만 애써 그래도 별일이야 있겠냐며 마음을 달랬다.
이미 홍타이지 사후 벌어졌던 투쟁의 대세는 거진 결정되어 도르곤도 요양으로 떠나갔으니 말이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도 희소식이었다.
허수아비인 강덕제 쇼서를 제외한다면 이 청나라의 1인자는 호거이니, 자연히 자신은 그 밑의 2인자가 되는 셈이 아닌가.
그는 이제부터 홍타이지 밑에서의 다이샨처럼 권력을 누리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조금 더 앉은 자리가 편했다.
"닝구타총관 아민이 묵던으로 오고 있습니다. 대적(大敵) 봄보고르를 토벌했으니 직접 한께 목을 바치겠다고 하는데 그 군병이 수천에 이릅니다!"
"뭐라고?"
지르갈랑이 놀라 외쳤다.
"아니, 봄보고르 따위가 무슨 대적이며 목을 바칠 것이라면 사람을 시키면 되지 제가 군대를 이끌고 나아오는 것은 무슨 속셈이란 말이냐?"
설마하니 호거가 없는 틈을 노려 반란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것인가.
"받아들일 수 없으니 닝구타로 돌아가라고 해라!"
지르갈랑의 명에 따라 아민에게로 간 사절은 구구절절한 내용의 답장을 가지고 왔다.
"이 참에 아버지 무덤에 들르고 싶으니 반드시 묵던을 거쳐가야겠다고? 웃기는 소리! 오고 싶으면 혼자 와야할 것 아닌가!"
아민과 지르갈랑의 아버지인 슈르하치의 무덤은 요양에 있다.
동북에서 오고 있는 아민이 요양으로 가려면 심양을 거치는 것이 맞긴 했지만 역시나 군대를 데려오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이 점을 지적하니 날아온 세번째 편지는 지르갈랑의 화를 돋구기에 충분했다.
"이런 빌어먹을!"
「너 지르갈랑은 천하의 소인으로서 나와 태종 사이를 헐뜯고 끝내 양람기를 차지했으니, 형제의 의리를 저버림이 이와 같았다. 나는 너의 참소(讒訴)로 유배되었음에도 이를 원망치 아니하고 다만 묘소에 참배하기만을 바랄 뿐이었으나, 너는 원래 내 것이었던 양람기를 도로 빼앗길까 두려워 이를 막고 있는 것이 아니냐? 참으로 불효하고 신의없음이라.
네가 무엇이라 하든 나는 신하와 아들의 예를 다할 것이다.」
"이것이 반역이 아니면 도대체 뭐가 반역이란 말인가!"
지르갈랑이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정친왕 전하, 깊이 생각하시옵소서. 아민이 무례한 편지를 보내기는 했으나 섣불리 군사를 내어 주벌할 수는······."
"시끄럽다! 벌써 라파(현 길림성 교하시 일대)까지 나아왔다는데 그따위 소리나 할 셈이냐?"
지르갈랑은 부하를 노려보며 외쳤다.
자신에게 양람기를 빼앗긴 것에 앙심을 품고 군사를 몰아오는 것이 뻔하지 않은가.
'빌어먹을, 이래서 미리 사르후다에게 아민을 암살하라 명을 내려놓았던 것인데.'
그러나 조선군에게 패해 오히려 제 목숨만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한심한 노릇이었다.
'이 참에 아민을 토벌하는 수밖에 없겠다.'
차라리 잘되었다.
호거가 아민과 자신을 계속 저울질하게 놔두며 전전긍긍하느니, 아민을 확실히 꺾는 것이 나으리라.
"아민을 쳐야겠다! 너희는 한께 가서 이 사실을 아뢰고 조칙을 받아오라!"
그러나 이것마저 지르갈랑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도 봄보고르의 목을 보고 싶소. 게다가 아민이 제 아비를 보러가는데 막을 필요는 없지 않소?"
순진무구하게 그리 말하는 쇼서 때문에 칙서를 받아내기가 여간 난망한 것이 아니었던 탓이다.
아민은 점점 다가오는데, 황제가 아무것도 모르는체 저리 버티고 있으니 지르갈랑으로서도 결심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좌섭정왕께서 내게 방어를 명하셨으니 그에 따르면 될 일! 황명은 없어도 된다! 모두 출진 준비를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