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합집산 (1) >
옛 금나라 상경회령부.
봄보고르는 이곳을 차지하여 흑룡강 부족들의 충성을 받으며 스스로 금나라 한이라고 일컬었다.
청은 여러 차례 군사를 보내어 싸움을 벌였지만, 거리가 멀었던만큼 파병 인원이 적을 수밖에 없었고 정세도 정세인지라 봄보고르는 어렵잖게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달랐다.
- 뎅 뎅 뎅 뎅─!
"적이다!"
청군은 신호를 전달할 때에 금속으로 된 운판(雲板)을 마구 두들겨 적의 침입을 알렸다.
비록 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변방이라지만 봄보고르군도 마찬가지였다.
"이놈들! 겁도 없이 이 금국 대한(大汗)의 영토에 쳐들어왔구나!"
보고를 받은 봄보고르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몸소 군사를 끌어모아 싸우러 나간 것까지는 이전과 같았지만, 이번에는 싸움의 양상이 크게 변해 있었다.
"솔론 놈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라!"
"너희같은 야만인들이 감히 대청을 배반하고 나라를 세웠겠다? 죽음으로 갚으라!"
명, 조선, 몽골 등을 견제하느라 청의 주력이 대부분 요동에 묶여 있어 소수 병력으로만 쳐들어오던 종래의 청군과는 달리, 지금 맞서고 있는 청군은 닝구타에서 온 병력이었다.
"총관, 적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셉니다."
"그러나 정작 성을 등진 뒤편은 허전하지 않은가? 소소쿠, 그대가 가서 봄보고르군의 허를 들이치도록."
직접 대부(大斧)를 들고 펄펄 뛰어다니는 봄보고르와 달리, 청군 측의 아민은 차분히 전장을 관조하며 명령을 내렸다.
아민이 닝구타를 장악한지 벌써 수개월이 흘렀다.
조선이 닝구타까지 진격하는데도 저 멀리 떨어진 청 조정에서는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소소쿠와 같은 동해여진의 유력자들은 모두 아민의 통제 아래에 들어왔다.
그로 인해 아민이 부릴 수 있게 된 병력은 수천이 가뿐히 넘어갔다.
고작 수백 명 정도의 병력으로 봄보고르를 진압하러 나선 기존 청군과 달리, 전쟁에서 운신의 폭 자체가 넓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압도적인 승리로서 나타나고 있었다.
"대금(大金)의 전사들이여! 우리를 수도 없이 핍박하던 청나라 놈들이다! 다시 노예로 전락하고 싶으냐!"
"한발짝도 물러서지 마라!"
봄보고르와 그의 부하들은 애써 병사들을 독려했지만 창칼과 화살이 날아드는 상황에서 그런 말이 먹힐리가 없었다.
"흐, 흐익······!"
"우, 우리가 졌다! 다 도망가야 해!"
애초에 금의 후신을 칭하기는 했으나 국가 체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을리가 없었다.
단지 상경을 차지하고 금나라네 한이네 칭했을 뿐, 흑룡강의 여진인들은 그대로 자기 부족에 속해 이전과 별로 다를 것 없이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느슨한 결속은, 아민이라는 숙장이 지휘하는 청군 앞에서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한이시여! 서둘러 몸을 피하십시오!"
"내가 왕도(王都)를 버리고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봄보고르처럼 명분도 식견도 없는 이가 그나마 한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건덕지는 오로지 금나라의 도읍을 취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회령부를 버리고 달아난다면 그는 청에 쫓기는 일개 오랑캐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모두 상경성으로 퇴각하라! 그곳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한번 청나라 놈들과 맞서겠다!"
봄보고르는 급히 몸을 빼서 성 안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당연히 질서정연한 후퇴는 아니었던지라, 짓밟히고 흩어지는 군사가 청군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은 자들보다 많았다.
야전에서 봄보고르를 크게 깨뜨린 아민은 곧장 상경성을 포위해들어갔다.
"저것이 금 세종이 쌓았다는 성벽이로군."
푸른 벽돌을 쌓고 흙을 다져넣은 성벽은 금나라가 망한 뒤에도 꿋꿋이 서있었다.
그 모습이 제법 장관이었지만, 조선이나 명에 있는 석성(石城)들에 비하면 방어력은 그리 높아보이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화포가 없으니 성을 공략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적들 또한 수성에는 익숙하지 않을테니 피차일반일세."
아민은 그리 말하며 푸른 성벽을 노려보았다.
'봄보고르. 이제 저놈만 꺾는다면.'
동만주와 북만주는 모조리 자신의 영향권에 들어온다.
이 먼 곳까지 심양에서 나온 관리가 직접 다스리진 못할테니, 아마 닝구타에게 그 처리가 위임될 것이다.
"공격을 퍼부어라! 저 북적 놈들을 오늘 안에 깨뜨리지 못하면 경을 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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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落城)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봄보고르부터가 성을 끼고 싸우는데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다.
"봄보고르를 잡아라!"
"감히 대청에 반역한 자다! 도망치도록 놔두어선 안된다!"
상경성은 오랜 세월의 풍파에 인적(人跡) 간데없고 황량함만이 더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봄보고르가 차지한 이래 나름 보수할 부분은 보수하고, 그 부족이 머물러 있으며 오랜만에 도시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그 온기는 순식간에 피와 살육의 열기로 화했다.
곳곳에서 불꽃과 연기가 피어오르고, 청군은 북금의 부족민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한이라."
아민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금 태조와 태종, 희종과 해릉왕이 머물렀던 궁궐이 앞에 보였다.
"봄보고르 놈, 네 명의 황제가 누리던 궐을 제가 차지했으니 죽어서도 여한은 없었을 것이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봄보고르가 마침 개처럼 끌려와 아민의 발 밑에 엎어졌다.
"봄보고르."
"으윽······."
봄보고르는 턱이 깨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 눈에는 물기가 가득했는데, 아픔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았으나 아민의 흥미를 식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이런 자가 한을 칭했단 말인가.'
백부 누르하치나, 사촌동생 홍타이지에 비하면 실로 보잘것없는 인간.
그것이 봄보고르에 대한 아민의 솔직한 평가였다.
"목을 쳐서 소금에 절여라. 묵던의 섭정왕께 보낼 것이다."
"예, 총관!"
아민의 명령에 부하들이 대답했다.
누구도 어느쪽 섭정왕을 말하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작금의 정세에서는 명확했으니까.
"궁궐의 문을 엄히 닫아걸고 아무도 드나들지 마라. 금나라 황제들께서 머무르신 곳이다."
아민의 명령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전리품을 배분하고, 항복한 부족들에게 다시 충성 맹세를 받은 뒤 제가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고, 상경성에 군영까지 펴는 일까지 총괄해야 했던 것이다.
"끄응."
아민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했다.
"나도 늙었는가."
아직 쉰도 되지 않았지만 몸은 이미 예전같지 않았다.
'환갑까지는 살지 않겠는가.'
근거는 없었지만 아민은 그리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하늘이 왜 자신을 다시 세상에 내보냈겠는가.
천명(天命)이 있지 않고서야······.
"총관, 묵던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묵던에서?"
아민은 뜻밖의 소식에 물었다.
확실히 봄보고르를 치러 가기 전에 심양에 이를 알리기는 했지만, 그가 알기론 굳이 전장인 이곳까지 찾아올 정도로 다급한 사안은 딱히 없었다.
그의 의문은 심양에서 온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더욱 커졌다.
"그대는 대학사의 형이 아닌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총관."
범문정의 형 범문채(范文寀)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그대 같은 서생이 수천리 길을 넘어 전장까지 오다니 별일이군."
아민이 은근히 비꼬며 말했다.
범문정과 범문채 형제는 한인임에도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신임을 받으며 그들의 수족 노릇을 했다.
아민을 견제하는 일에도 그 꾀를 내어놓았을 터이니 그가 범문채를 반기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황상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범문채는 동요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답했다.
"황상의?"
그러나 아민은 그 말을 듣자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물을 뿐이었다..
그 태도에 범문채는 살짝 당황했다.
"황제 폐하의 명이라 하였습니다, 총관."
"말은 그렇게 해도 칙서도 무엇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내가 없는 칙서에 대고 사배(四拜)라도 올려야 한단 말인가?"
아민의 말은 정곡이었다.
자기 손으로는 무엇도 할 수 없는 황제다. 좌섭정왕의 허락없이 공식 칙서 따위를 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강덕제가 수결한 밀서를 가지고 심양에서 이곳까지 오는 것은 위험부담이 컸으니, 지금 범문채는 완전한 맨손이었다.
"한인들이나 할법한 요식행위는 집어치우지. 그래, 한께서는 좌섭정왕 몰래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다던가?"
아민이 무례한 말투로 물었다.
그러나 범문채는 아민의 태도를 꾸짖는 것은 포기하고 본론을 꺼냈다.
이것은 아민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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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아민이다. 봄보고르라는 화근을 드디어 끊어냈구나!"
호거는 모처럼 들려온 희소식에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청의 경제 상황은 나날이 악화되어 가고 있었고, 사람들의 불만을 돌리고자 호부 관리 여럿의 목을 날려버리기까지 한 호거였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17세기의 기후 변화로 농사는 파탄나고, 대명 무역조차 막힌지가 오래.
이미 홍타이지 대부터 청의 경제는 몽골을 지나 화북을 약탈하는 것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된 변경의 혼란으로 그것도 쉽지 않았으니, 모든 원망은 좌섭정왕 호거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 판에 아민이 오랜만에 전과를 올렸으니 치하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앙축드리옵나이다, 섭정왕 전하!"
"모두 닝구타총관을 발탁하신 전하의 선견지명 덕분이옵니다!"
측근들의 아부에 기분이 좋아진 호거가 외쳤다.
"이제 후방의 근심도 모두 사라졌으니 한조(漢朝)를 치는 일에 전념할 수가 있겠다! 내가 직접 군병을 모아 화북으로 나아가리라!"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대대적인 화북 약탈을 벌이고, 전공까지 챙겨 흔들리는 민심을 다잡으리라.
'거기다 생각 외로 큰 승리까지 거둔다면.'
그때는 지금 황위에 앉아있는 꼬맹이에게 양위를 강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만만하게 좌중을 둘러보는 호거를 향해 측근들은 연거푸 찬성의 말을 늘어놓았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비록 태종께서 붕어하시고 나라가 흔들렸지만 전하께서 모두 수습하셨지 않사옵니까? 이제는 부족한 물자만 충원한다면 다시 한번 천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하, 아직 우섭정왕이 있지 않사옵니까."
마지막으로 덧붙인 정황기 구사 어전 탄타이의 말에 호거가 얼굴을 찌푸렸다.
"도르곤 그놈은 요양에 가있지 않느냐?"
우섭정왕 도르곤은 지금 요양성으로 옮겨가 있었다.
요양과 심양이 지척이라 하지만, 아예 조정이 있는 심양을 떠났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했다.
호거는 그것을 조정에서 손을 떼겠다는 항복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전하께서 묵던을 비우시면 그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릅니다. 기왕이면 우섭정왕과 함께 출진하시지요."
"내 전공과 재물을 도르곤과 나누란 말인가?"
굳이 에제이를 몽고아문 승정으로, 허서리 소닌을 참정으로 삼아 몽골을 장악한 이유가 무엇인가.
화북에서 몽골을 거쳐 만주로 들어오는 물자를 자신이 틀어쥐려 하는 것이다.
당연히 자기 휘하의 상삼기에는 가장 많은 식량과 가축이 배분될 것이다. 협조적이지 않은 팔기에는 그 수량이 확연히 적을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아예 도르곤이 종군한다면 그런 보람이 없어지지 않겠는가.
"정친왕 지르갈랑을 묵던에 남겨놓고 갈 것이다. 그가 도르곤이 묵던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견제할테니, 걱정할 것 없다. 아무리 도르곤이 날고 기어도 요양에 앉아 무슨 일을 꾸미겠는가?"
호거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말했다.
실로 도르곤의 생각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