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창구 (5) >
"장현."
"예, 대장 영감."
이자원의 부름에 옆에 있던 장현이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가 눈짓하자 재빨리 앞에 있던 꾸러미를 풀어놓는 장현이다.
"조선은 홀란도와 다음과 같은 품목을 거래하고 싶소."
장현의 손에 들려올려진 것은, 눈이 부실듯이 하얀 몸체 위에 청료(靑料)로 하여금 무늬를 그린 도자기였다.
이름하여 청화백자(靑華白磁)다.
마침 역사적으로도 15세기 중엽 고청화(古靑華)가 태동한 이래 한창 한강 일대의 도요(陶窯)들 사이에서 청화백자가 거듭 발전해나가고 있는 시점이다.
도자기의 본류(本流)라 할 수 있는 경덕진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일본산 자기만을 다뤄오던 쿠케박케르의 눈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했다.
"호오······."
쿠케박케르의 눈이 커졌다.
조선의 도자기 수준이 일본보다 높다기에 기대하고 있었지만 생각 이상이었던 것이다.
"선물로 드리겠소. 이 나라 조선에서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물건이니까."
이만한 상등품(上等品)은 드물겠지만 투자라 생각하면 별것 아니다.
과연 이자원의 말을 들은 쿠케박케르의 눈에는 감추지 못할 정도로 욕망이 흘러넘쳤다.
"이것만으로도 조선과는 거래를 틀 가치가 있는 것 같군요."
"끝이 아니오."
이자원은 차를 들며 말했다.
"인삼이라고 들어보았소?"
"알고 있습니다. 조선이 그것의 특산지라는 것도요."
러시아 출신 신부 마르친 마르치니우스가 서양에 소개한 이래로 인삼의 존재는 제법 널리 알려졌다.
몇달 뒤면 즉위할 프랑스의 루이 14세도 재위 중에 이를 진상받은 적이 있고, 당연히 쿠케박케르도 본국에 이에 관련해 보고를 올렸다.
원기를 돋아주는 동방의 신기한 풀은 얼마든지 수요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인삼은 대부분 중국으로 흘러들어간다 들었습니다만."
"몇년 내로 홀란도에게도 이를 수출할만큼 생산량이 나올 것이오."
이자원이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쿠케박케르는 미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인삼은 동방에서도 잘 나지 않는 귀한 약재라고 알고 있습니다. 혹 우리가 인삼에 대해 무지하다 여겨 하신 제안이라면, 필히 철회하셔야 할 것입니다."
인삼이 아닌 것을 인삼이라 우겨 팔 계획이라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쿠케박케르의 엄포에 장현이 나서서 말했다.
"이미 동북 지역에서 일부 인삼이 들어오고 있고, 요동으로 사람을 보내어 인삼을 쓸어오는 계획도 완성 중입니다."
'무엇보다 가삼(家蔘)의 재배가······.'
그러나 장현은 그 말을 삼켰다.
이것은 아직까지 이자원과 그를 비롯한 역관 집안 몇만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이 남만인에게 알렸다간 무슨 수를 써서든 재배법을 빼내려 들리라.
"조선의 인삼과 호각을 다투는 물건들입니다. 홀란도가 이것을 사들여 손해볼 일은 절대 없다고 자부합니다."
벨테브레를 통해 장현의 말을 전해들은 쿠케박케르는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표정을 풀었다.
확실히 인삼을 안정적으로 수급받을 수 있다면 꽤 짭짤한 수익이 남을 것이다.
굳이 유럽까지 가져가지 않더라도, 조선의 인삼은 베트남까지 소문이 나있었으니까 말이다.
직접 배를 끌고 가 무역을 할 정도로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을 대신해 팔아먹는다면 앉아서 돈을 버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 있소."
하지만 이자원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도자기에 인삼······. 또 뭐가 있습니까? 비단?"
"잘 아시는군."
허나 이번에는 쿠케박케르가 당하지만 않겠다는 듯이 손가락을 저었다.
남만인의 무례해보이는 행동에 장현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자원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미 일본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질좋은 생사(生紗)가 많습니다. 일본인들은 그것을 사들여 비단을 직조하지요. 비단의 질은 생사에서부터 결정되는만큼, 조선이 일본보다 낫다고는 하기 힘들텐데요?"
그런 상황은 모르고 있었냐는듯 쿠케박케르가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이자원은 역시 표정에 미동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명나라에서 일본으로 수출되는 생사는 조만간 끊어질 것이오. 생사 뿐만 아니라 다른 품목들도 마찬가지겠지."
폭탄발언이었다.
어쩌면 동아시아의 정세를 완전히 비틀어버릴지도 모를 그 말에 쿠케박케르가 눈을 크게 떴다.
"무, 무슨 이유로 말입니까?"
"일본이 생사를 어디에서 가져오는지 모르시오?"
"그야······ 나가사키까지 건너온 중국 상인들이 팔기도 하고······."
해금령으로 중국의 공식적인 해상무역은 끊어졌지만 정지룡 등 수많은 중국의 해상세력들은 활개를 치고 있었다.
명 조정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고, 굳이 대대적인 단속에 나설 이유가 없었기에 그들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비공식적인 루트 외에, 일본이 수입하는 경로가 하나 더 있었다.
"류큐, 우리는 유구국이라고 부르지."
이자원이 말했다.
"이미 그 나라가 일본에 점령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과연 조공무역이 지속될 수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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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는 오늘날의 오키나와다.
이 나라는 조선이나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중국의 조공국으로서, 중계무역을 통해 번성하였다.
처음에는 동남아에서 사들인 후추와 소목 등을 조공의 형식으로 중국에 팔며 이익을 챙겼지만, 시간이 지나며 주력은 생사 무역으로 옮겨갔다.
1609년 사쓰마의 침공으로 유구가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한 뒤에도 유구는 계속해서 명에 조공하며 일본에는 생사를 공급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명 입장에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던 일이지만 말이다.
"명은 천자국이오. 이런 사실이 만천하에 까발려진 다음에도 조공을 계속 허락할 순 없겠지."
제 코가 석자인 명나라다.
군사를 내어 유구를 해방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그러나 '유구의 정당한 왕권이 회복될 때까지' 조공을 중단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맙소사."
쿠케박케르는 이자원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 자는 무슨 수를 써서든 네덜란드의 동방 무역에서 일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가로채려 드는 것이다.
"일본과 외교 문제가 될텐데요."
"글쎄, 그리되지 않도록 잘 숨기시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막부는 조선에 항의하기 전에 제일 먼저 네덜란드를 히라도에서 쫓아낼테니."
그러거나 말거나 이자원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반면 일본과 달리 우리는 생사를 얼마든지 공급받을 수 있소. 굳이 조공이라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아도 말이오."
가도라는 사실상의 경제자유구역을 쥐고 있는 조선으로서는 그저 그만큼 남는 생사를 수입해 비단을 제조하고, 일본이나 네덜란드에 팔면 되는 일이다.
"장군은······ 정말······."
장군 같지가 않군요.
쿠케박케르가 말을 삼켰다.
"이제는 우리가 조선에 무엇을 팔 수 있을지 이야기해봐야겠군요."
쿠케박케르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귀한 도자기를 받았으니 답례를 해야겠지요. 저희도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도자기보다는 약간 더 크고 무거운 물건인지라 쿠케박케르의 부하들이 제법 힘을 써서 들고 왔다.
"자명종(自鳴鐘)이라는 물건입니다. 때가 되면 알아서 울려 시간을 알려주지요."
쿠케박케르는 동양인들이 자명종을 보고 그 정밀함에 놀라는 모습을 여러번 보아왔다.
대개는 신기한 장난감 따위로 생각할 뿐이었지만, 어쨌든 처음 시계를 본 사람들이 느낀 놀라움은 대개 호감으로 바뀌었다.
동방의 권력자는 금은보석은 썩어넘칠 정도로 있을게 분명했으니, 이런 물건을 선물하는 것이 오히려 뇌리에 남을 것이다.
쿠케박케르는 그렇게 확신했다.
"선물 고맙군."
그러나 이자원은 그 정교한 시계를 보면서도 그다지 동요가 없었다.
누구든 스스로 울리는 기계라 들으면 신기하게 쳐다볼 법한데, 그냥 슬쩍 보고 치우는 것이 아닌가.
"이 자명종이야말로 유럽 기술력의 정수입니다. 한번 천천히 살펴보시면 얼마나 섬세하고 정교히 만들어진 물건인지······."
자명종의 가치를 몰라보는가 싶어 쿠케박케르가 침튀기게 부연설명을 늘어놓으려는 그때, 이자원이 제지했다.
"알고 있소. 이 정밀함과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제작 과정. 단순히 시계를 만드는데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겠지."
이자원의 말에 쿠케박케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 지요."
"총이든 대포든 전함이든 마찬가지일 것이오."
그렇기에 이자원은 시계가 아니라 시계 장인들을 원했다.
"우리 조선이 홀란도에 바라는 것은 분명하오."
이자원은 그간 생각해놨던 것을 꺼내들었다.
"군사를 훈련시키고 전술을 가르칠 전문가. 이들은 우리 조정의 돈으로 고용하겠소. 또한 인도의 초석.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대들이 쓰는 것과 같은 총기와 대포. 그리고 장인들. 가능하겠소?"
쿠케박케르는 구체적인 요구에 말꼬리를 흐렸다.
"초석이나 무기는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군사 전문가나 장인들은······."
장교들은 VOC의 상관장인 쿠케박케르와 계통이 다르니 그가 확답을 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또 장인들이 조선에 고용되는 것은 기술이 유출될 수도 있는 사안 아닌가.
쿠케박케르의 염려를 들은 이자원이 말했다.
"조선은 홀란도의 경쟁자가 아니오."
아무리 장인들을 고용한다 한들 네덜란드에게 기술적 우위를 점할 수는 없다.
이자원은 그 점을 강조했다.
"오히려 홀란도가 동방에서의 우위를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동반자지. 그런 이들에게 군사 원조 정도가 어렵겠소?"
쿠케박케르는 이자원의 말에 끄응, 하고 신음했다.
'확실히 조선은 타타르와 전쟁 중인 상태라고 들었다.'
저번 전쟁 때는 타타르가 조선의 수도를 함락하고, 지금 국왕의 아버지는 그에 맞서싸우다가 죽기까지 했다니 전쟁도 보통 전쟁이 아닌 것이다.
까딱하다 조선이 멸망하기라도 한다면 이 먹음직스러운 시장이 통째로 날아가버리는 것이었다.
이자원의 말대로라면 일본 시장도 휘청거릴 판이 아닌가.
마침내 결심한 쿠케박케르가 말했다.
"본국에 의사를 타진해보겠습니다. 아, 물론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해줄 것을, 상관장인 제 이름으로 요청하지요."
이자원은 일단은 그정도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시급한 것은 화약과 무기의 안정적인 공급이었으니까.
"조선과 네덜란드 양국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협상이 원활하게 타결된 것에 대한 기쁨이 차오른 쿠케박케르는 손을 내밀었다가 아차했다.
그러나 이자원은 자연스럽게 그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는 별것 아니라는 말투로 말했다.
"아, 그리고 그대들이 오는 동안 조선의 해안을 측량한 자료를 남겨놨을텐데, 그것도 이쪽에 넘기시오. 이 나라의 모든 것은 주상 전하의 몫. 바다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오."
쿠케박케르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귀신 같은 남자였다.
그러나 어쨌든, 조선과 네덜란드는 정식으로 무역 관계를 맺게 되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개항 때까지 은둔해있던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로써 국제 무대에 첫발을 내딛었다.
한편 조선과 달리 청에서는 다른 의미로 역사가 크게 뒤틀리고 있었다.
작가의말
쿠케박케르는 1637년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조선의 특산물로 쌀, 구리, 인삼을 꼽았습니다. 나름 조선의 정세를 주의깊게 보고 있었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