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88화 (88/213)

< 새로운 창구 (4) >

항해는 쉽지 않았다.

동남아까지 다닐 정도로 일본의 해상 범위는 넓었지만, 단순히 어업 등에 종사하던 작은 배로는 조선까지 나아오는데도 천신만고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왜관을 자주 들락거리던 길잡이의 도움을 받아 시로와 일행들은 대부분 동래에 닿는데 성공했다.

"여기가······."

"조선······."

동방의 유일한 기독교 국가치고는 일본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쇼군이 국교로 세운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이리라.

"주님, 부디 새로운 천지에서도 성령의 빛으로 저희 마음을 이끄시어 항상 바른 마음 갖게 하소서."

시로는 목에 건 십자가에 입을 맞추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통받는 고향에도 머지 않은 시일 내에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쇼군의 힘을 빌리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갈 때 올려야만 하는 기도였다.

동래의 다이묘라는 사람은 자신들을 꺼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쇼군을 만나게 되면 모든 것은 달라지리라.

시로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차분히 쇼군의 답장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답은 상당히 빠르게 도착했다.

브루노 신부와 함께 도성으로 올라오라는 명령이 내려온 것이다.

===

왜인들을 북방으로 보내자.

이자원의 제안은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옳은 말이다."

임금이 말했다.

"왜인들을 전부 천리 밖 북방으로 보내버리면 일본에서 사절이 온다한들 어찌 알겠느냐?"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일본은 물증이 없으니 조선을 깊이 추궁할 수 없고,

난민들을 전력으로 삼는다는 목적도 달성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일부 신하들이 지적한 것처럼 반란을 일으킬 염려도 없다.

"함경도에 일러 모든 지원을 끊으면 되니 말이옵니다."

북방은 춥고 척박하다.

그러면 그런대로 거기에 맞게 농사를 지을 순 있고, 또 이자원이 명나라에서 들여온 감자도 있으니 어느 정도는 자급자족이 가능하지만, 조선 본국의 지원 없이는 완전한 자립은 불가능하다.

당장 오랑캐들과의 분쟁부터 막아내야할테니 말이다.

"아민은 우리가 왜인들을 보낸다한들 크게 항의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아민은 정식으로 닝구타총관이 된 뒤 닝구타를 중심으로 물자를 틀어쥐고 부족 사이의 분쟁에 개입하며 자기 세력을 넓히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훈춘, 야춘, 남강(연길)에서 열리는 호시는 그것을 가능케하는 중요한 숨구멍이었다.

"그래. 이 일은 훈국이 총괄토록 하라."

이자원의 말에 임금이 선선히 답하자, 신료들의 표정이 잠시 어색해졌다.

훈련도감이 아민과의 연락이나 왜인들의 사민을 도맡다니.

이 또한 군무(軍務)라 우길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면 병조가 맡아야할 일 아닌가.

하지만 여기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정온과 이식 같은 이는 매우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동맹 관계였던 산림마저 병신같이 이자원에게 역공을 당해 찌그러졌으니 그들 단독으로 반대하고 나서기엔 힘들었던 것이다.

"아, 이 일은 병조에서 맡아야 하는 것인가?"

그 순간 임금이 막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제야 임금이 법도를 따를 생각이 있나 하여 삼사의 관료들이 입을 열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훈련도감은 어디까지나 도성의 방비만 도맡을 뿐이지 나라의 군사를 총괄하는 자리가 아니옵······."

"허면 훈련대장 이자원에게 병조참판 직을 제수한다. 병참이 알아서 하라."

임금은 말을 끊고 그리 명을 내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자원이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좌상 같은 경우는 병조판서와 훈련대장을 겸직한 적도 있거니와, 근래에 훈련대장의 공이 매우 크니 병참을 겸하게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임금이 그리 덧붙이자 누구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이자원이 조정에서 차지하는 무게감은 한층 더 커지게 된 것이었다.

===

새로운 기회를 찾아 조선을 찾아온 이들은 일본인들 뿐만이 아니었다.

네덜란드 히라도 상관장 쿠케박케르는 갑판에 나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 모습을 본 벨테브레가 슬쩍 웃음을 띄며 물었다.

"긴장되시오이까, 상관장 나으리."

이역만리에서 만난 네덜란드인이라 그런지 빠르게 친해진 두 사람이었다.

어째 조선어 억양이 섞인듯한 벨테브레의 물음에 쿠케박케르가 대답했다.

"우리 네덜란드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까 말일세."

"네덜란드의 운명이라······."

중국의 정세는 혼란할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와 적대 관계이고, 일본 또한 현재로서는 완전히 믿을만한 파트너는 아니다─ 라는 설명은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쿠케박케르가 조선과의 교역에 사활을 거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자네는 정말 괜찮겠는가?"

귀국을 포기하고 조선에 남겠다는 선택을 후회하지 않느냐 묻는 것이다.

실제로 벨테브레의 두 동료는 쿠케박케르를 따라오지 않고 곧장 일본에서 네덜란드로 귀국하는 편을 선택했다.

하지만 벨테브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미 조선에서 가정을 꾸렸습니다. 가끔씩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도 있었지만, 신기하게 대장 영감이 언제든지 고향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말씀을 하시니 그런 생각이 말끔하게 사라지더군요."

벨테브레의 대답에 쿠케박케르는 희미하게 웃었다.

"사람 마음이란 것이 신기하군. 어쩌면 그 장군이 자네들을 순순히 보내준 것도 이런 효과를 기대했던 덕일지도 모르겠네."

쿠케박케르는 그렇게 말하며 이자원에 대해 들은 정보를 떠올렸다.

타타르와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장군.

조선왕의 신임을 받는 총신.

게다가 네덜란드와의 수교 또한 그가 밀어붙인 사안이라 들었으니, 이 협상의 실질적인 상대측이라 봐도 좋으리라.

"선물은 준비해놓았는가?"

쿠케박케르가 뒤에 서있는 부하를 보며 물었다.

"예, 상관장님."

언제 어디서나 권력자에게 바치는 뇌물은 잘 통한다.

조선의 왕에게 줄 선물과 별도로 저 동양인 장군의 눈이 돌아갈만한 물건 또한 가져오라 명령한 쿠케박케르였다.

그 대답에 흡족한 웃음을 띄며 쿠케박케르는 다시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벨테브레가 강화도라 가르쳐준 섬이 보였다.

안정적인 교역이 가능한 새로운 창구.

조선이 눈 앞에 있었다.

===

거리가 가까우니 강화에 남만인들의 큰 배가 왔다는 소식은 금방 도성에 전해졌다.

"이 남만인들은 네덜란드라는 나라의 상인인데, 그 도읍의 이름이 홀란도(惚蘭都)라고 하여 흔히 그 이름으로 일컫사옵니다."

예수회 신부들이 설명했다.

이어서 정중하게 쓰여진 쿠케박케르의 요청문이 예수회에 의해 한문으로 번역되어 임금에게 바쳐졌다.

그 내용인즉슨 요청에 따라 조선에 왔으니 통교와 거래를 논의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홍이포 같은 것은 본래 남만으로부터 온 무기인데, 그 위력이 우리 총통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남만인들의 병기가 우리보다 몇수 앞선 것은 사실이고, 저들이 배를 끌고 강화도에 온 것도 북벌을 위해 무기가 필요하다는 요청했던 것이니 너무 놀라고 꺼리지 않아도 될 것이오이다."

의견이 분분해지기 전에 이자원이 나서서 그렇게 말했고, 임금이 재가했다.

"배는 강화에 묶어놓되 그 우두머리와 일행 몇에게는 말과 수레를 내어주어 도성으로 오도록 하라."

쿠케박케르 일행이 도성에 올라왔을 때도 번잡한 예식은 없었다.

남만인들은 명이나 일본, 여진 등의 정식 사신들과는 달리 단지 교역하러 온 상인들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 결과 네덜란드인들은 임금에게 문서와 예물를 바친 뒤, 모든 실무는 이자원과 처리하라는 명령만 받았을 뿐이었다.

쿠케박케르는 약간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조선의 권신인 이자원이 직접 교섭하러 나온다는 것은 실로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이자원과 마주 앉자마자 깨지고 말았다.

"그······ 이 장군이라는 분이 실무를 맡았다 들었습니다만."

쿠케박케르가 묻자 통역을 맡은 벨테브레가 급히 그에게 속삭였다.

"이분이 훈련대장 이자원 영감이십니다."

"뭐라고?"

유럽에서도 이처럼 젊은 나이에 중앙군을 맡은 장군은 흔치 않다.

거기다 타타르와의 전쟁을 이끌었다 들었으니 당연히 늙수그레한 숙장일 것이라 지레짐작했던 쿠케박케르는 놀라 물었다.

"조선의 왕가도 이씨라고 들었는데 장군도 왕족의 일원인 것인가?"

"왕가는 전주 가문이고, 장군의 가문은 다르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쿠케박케르는 오히려 잘된 셈이라고 스스로의 마음을 달랬다.

'조선은 상업에 그리 밝지 않은 나라라고 들었다.'

게다가 그 대상이 닳고 닳은 상인이나 외교관이 아니라 나이가 새파랗게 젊은 장군이라니.

보좌랍시고 옆에 앉은 이도 이자원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이 은자의 나라가 네덜란드의 지갑이 되고 싶다면 소원대로 해주어야겠지.'

"오는 길은 평안하셨소?"

이자원이 차를 권하며 물었다.

가도를 통해 명나라에서 들여온 고급이다.

쿠케박케르는 그 맛에 나름 감탄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염려해주신 덕분에 안전하게 왔습니다. 일본의 가톨릭 교도들은 조선에 잘 도착했는지 모르겠군요."

"그쪽도 뜻대로 되었소. 협력에 감사를 표하지."

쿠케박케르는 예수회 신부를 시마바라에 데려다준 자신의 공을 은근히 드러냈고, 이자원은 선선히 그것을 치하했다.

"그래서······ 조선이 먼저 네덜란드에 손을 내민 이유가 궁금하군요. 지난 십 수년간 조선에 억류되어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돌려보내면서까지 말입니다."

쿠케박케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자원은 잠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지적했다.

"먼저, 우리가 홀란도인들을 억류한 것은 본의가 아니오. 왜관을 통하여 일본에 보내려 하였으나 그들이 기독교인이며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지."

"일본 측에서는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습니다만······."

"그들은 제 사익을 챙기고자 조선과 홀란도가 접선하는 것을 막은 것이오. 조선에는 홀란도가 일본의 속국이라고도 주장했는데, 알고 있소?"

이자원의 말에 쿠케박케르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그러졌다.

실제로는 1666년 하멜이 탈출하여 일본으로 도망쳤을 때 일본이 펼쳤던 주장이지만, 지금도 조선이 이에 관해 일본 쪽에 물어본다면 마찬가지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조선과의 접촉을 막은 것도 모자라 우리가 자기네 속국이라니.'

물론 원활한 무역을 위해 크게 숙여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소리를 조선에 와서까지 듣게 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쿠케박케르는 상인답게 얼굴에 티를 내지 않았으나, 속으로 일본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자원이 노리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둘째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당신들과 같소."

이자원이 말을 이었다.

"바로 교역이지."

"글쎄요, 우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일본 쪽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조선이 먼저 요청을 했기에 이 먼 곳까지 오긴 했지만, 수지타산이 맞을지 모르겠군요."

쿠케박케르는 우선 튕기고 보았다.

웬만큼 좋은 조건이 아니면 교역을 트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암시였다.

'자, 어쩔테냐. 너희가 급해서 우리를 찾은 것 아닌가. 아니면 너희 왕을 실망시킬테냐?'

쿠케박케르가 상대방의 반응을 즐길 준비를 하며 생각했다.

"그렇소? 그럼 어쩔 수 없군."

그러나 이자원은 동요하지 않고 말했다.

"네덜란드가 안되면 포르투갈과 거래를 트는 수밖에. 우리의 '동맹'인 명나라에서 하는 것처럼 말이오."

"포, 포르투갈?"

쿠케박케르는 벨테브레의 통역을 듣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포르투갈은 16세기 마카오-나가사키 루트를 통해 동아시아에 활발한 무역을 펼치며 막대한 이익을 얻었지만 지금은 정세의 변화로 인해 쇠락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아직까지는 동아시아 무역의 플레이어였다.

오히려 조선이라는 새로운 시장에 사활을 걸고 뛰어들 가능성이 적잖은 상황.

"그, 그들은 포교를 일삼는 가톨릭 교도인데······."

"상관없소. 예수회를 이 땅에 들여온 사람이 나요."

무심코 일본에서 포르투갈을 방해할 때 쓰던 레파토리를 꺼내자 이자원이 곧장 답했다.

'그래, 아예 가톨릭 신부에 가톨릭 신도들까지 조선에 데리고 왔지.'

쿠케박케르가 멍청한 소리를 했다고 자책했다.

게다가 이자원은 자기네식으로 변형된 이름이 아니라, 명확한 발음으로-원어와 살짝 차이는 있지만-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이라고 지칭하지 않았는가.

'잘못 생각했다. 조선은, 적어도 눈 앞의 이 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군.'

쿠케박케르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포르투갈은 저물어가는 해일 뿐입니다. 우리 네덜란드는 조선의 의향을 최대한 맞추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오."

이자원이 말했다.

"드디어 본론으로 넘어갈 수 있겠군."

작가의말

포르투갈은 1580년 스페인에 병합되었는데, 그에 따른 이익은 적었던 반면 스페인의 적이 고스란히 포르투갈의 적으로 전환되며 교역 비용이 가파르게 치솟았습니다.

거기다 항해술의 우위도 점차 내려놓아야 했을 뿐더러 중국 상단들이 일본과 직교역을 하며 마카오-나가사키 루트의 이익 또한 감소하였고, 1633-1639년에 걸친 일본의 금국령으로 직격탄을 맞게 되었습니다(홍성화,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의 성쇠, 2017).

사실 네덜란드보다는 이쪽이 더 목마른 것 같긴 하지만...과연 어떻게 될지?

네덜란드는 일본 속국이라는 드립은 실제로 일본이 조선에 쳤던 것입니다.

일본 쪽에서 하멜 일행을 곧장 돌려보내지 않았다며 항의하면서 했던 말인데, 당연히 헛소리지요. 다만 일본 입장에서는 그리 생각할만도 한 것이, 앞서편 후기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VOC는 일견 굴욕적으로 보일 정도로 일본과의 교역에 공을 들였고, 정말 신하처럼 행동하기도 하였습니다.

“속국이라니, 날 모욕할셈인가!”...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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