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창구 (3) >
시마바라의 백성들은 가혹할 정도의 학정에 난을 일으켰지만, 탄압은 난이 진압된 후가 더욱 잔혹했다.
그들도 그것을 알았기에 성 안의 식량이 떨어지자 해초까지 캐먹으며 끝까지 저항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하라성이 함락되는 순간 항거하던 사람들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 살아남은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중년의 남자는 그 참혹한 광경을 보고 잠시 할말을 잊었다.
"아버님."
"이오리."
양아들이 부르는 소리에 그가 뒤돌아보았다.
"무엇을 그리 골똘히 고민하고 계십니까?"
이오리가 묻자 남자는 대답했다.
"이 자들은 뭘 위해 싸웠을지 생각하고 있다."
애초부터 싸움이 성립하지 않음에도 키리시탄들은 최후의 최후까지 싸웠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것일까.
"성에서 끝까지 버티다보면 그 신이라는 자가 동앗줄이라도 내려줄줄 알았나 보지요."
이오리의 말투에는 약간의 빈정거림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이오리를 향해 물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조선에서는 비슷한 일이 있었다던데."
"아, 아버님께서도 들으셨나 보군요."
고쿠라번에서 제법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이오리다.
이 번은 조선과 나름 가까운 덕도 있어, 식자층 사이에서는 바다 건너의 전쟁에 대해 이런저런 소식이 전해지곤 했다.
"조선왕도 성에 갇혀서 끝까지 항전하다 목숨을 잃었다고 하지요. 그래도 장수 하나가 신묘한 계책으로 오랑캐들을 물리치고 그 아들을 왕으로 옹립했다고 합니다."
남자가 들은 이야기도 비슷했다.
홀로 오랑캐들의 전열을 뚫고 그 황제까지 단칼에 베어죽였다는 장수.
남의 나라 이야기임에도 그 충의와 무용은 한때 화제가 되었었다.
'한번 만나보았으면 좋겠는데.'
요시오카 가문의 삼부자를 검으로 꺾은 뒤 천하제일이라 자부하던 자신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후소(扶桑, 일본) 땅에서나 통하는 이야기.
세상은 이보다 더 넓고, 강자 또한 셀 수 없이 많으리라.
"그러고보니 막부에서 조만간 조선에 사신을 보낼 예정이라 하더군요."
그때 이오리가 툭 내뱉었다.
"막부에서?"
"통신사에 대한 답방이라 하던데, 사실은 조선의 동태를 살펴보려는 것이겠지요. 키리시탄들이 그리로 대거 도망쳤으니 말입니다."
주모자인 아마쿠사 시로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시마바라 일대에서 '시로가 조선군을 이끌고 돌아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막부는 그 소문을 제법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실은 아버님께도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내게?"
남자는 뜻밖의 일에 놀라 물었다.
"예. 조선에서 신주(神州)를 칠 능력이 있을지 알아보려는데 아버님처럼 무(武)에 정통한 분이 도와주셨으면 한다고······."
"나 같은 칼잡이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아버님처럼 이름 높은 분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충분히 자격이 되십니다."
낮게 보면 한 사람의 칼잡이.
그러나 문무의 도를 중요시 여기는 지금의 풍조 속에서 남자와 같은 고절(高絶)한 무예가는 높은 대우를 받았다.
"조선이라."
하물며 그─
병법제일로 이름높은 미야모토 무사시라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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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왜인들 사이에서 남만교(南蠻敎)가 성하였사온데 왜주(倭主)가 이를 금지한 까닭으로 그 술수를 믿는 자들이 난을 일으켰사옵니다. 이내 왜주의 군대가 이를 공파하고 성을 떨어뜨렸사온데, 잔당들이 앞다퉈 우리나라에 도망해오며 말하기를,
"조선국 장군의 도움을 얻고자 한다"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배 몇척에 수십 명이 타서 오더니, 또 같은 무리라 하는 자들이 수백 명이나 따라오고, 다시 저들 고향에는 조선에 오기를 원하는 자가 수천이나 있어 도망쳐올 기회를 노리고 있다하니 참으로 놀랍고 두려운 일이옵니다.
신이 이를 꾸짖어 물리치려 하였으나 도성에 들어와있다는 남만교의 승려가 나서서 보증인을 자임하니, 우선 거제현감에게 일러 그곳으로 옮기도록 하였사옵니다.
모쪼록 이런 사정을 알려 전하의 하교를 받들고자 하옵니다······.」
동래부사 정양필(鄭良弼)의 장계가 올라왔을 때 조정은 과거 문제와 관련하여 논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송준길은 이자원의 비호 아래 함부로 중신을 헐뜯었다는 죄목으로 파직당했을 뿐, 다른 처벌은 받지 않고 풀려났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선비의 명예-어디까지나 그들의 관점에서-를 잠시 내려놓아야만 했다.
"양명학적 해석으로 쓴 답안을 인정하자니."
이자원의 입김을 받은 유생 몇이 올린 상소에 그들의 이름 또한 더하여야 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반발을 불러왔다.
"전하, 송시열과 송준길을 처벌하소서!"
이처럼 강도 높은 주장을 하는 자가 있는가하면,
"이는 정학을 배운 선비가 할말이 아니거니와 선비들의 혼란이 극심할 것이옵니다."
실리적인 관점에서 신중론을 펼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의외로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무과는 어찌될 예정이라 하던가?"
"무예의 비중은 그저 최저점만 넘기면 되는 정도로 낮추고 강서(講書) 위주로 시험을 본다더군. 오군영의 경우엔 배치 후 다시 교육을 받는다던데. 그 야전교범인가 하는 서책을 통해서 말일세."
우선 조정의 무관 출신들은 다시 새로이 바뀌는 무과에 집중하고 있을 뿐, 주자학과 양명학의 대립에는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 또한 기본적으로 유학자이긴 하나, 하나하나의 해석 차이에 목숨을 걸 정도로 심오하게 파고 들지는 않는 것이다.
문관들의 대립은 좀 더 격렬했지만, 여기에는 양명학에 조예가 깊은 최명길과 장유가 버티고 있었다.
"주자는 실로 나라의 큰 스승이나, 왕수인도 명나라의 현인(賢人)으로서 학문과 사상에 밝고 치국의 도를 깨우친 이였소.
게다가 영왕(寧王)이 난을 일으켰을 때 꾀를 써서 사로잡기까지 하였으니 이처럼 문무에 두루 뛰어난 사람이 어디 있겠소?"
"왕수인은 대국에서도 존경을 받는 사람인데 소방(小邦) 선비들만이 좁은 소견으로 그를 헐뜯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오."
영의정 최명길과 신풍부원군 장유.
양명학을 옹호하고 나서니 양자의 논리가 팽팽하여 치열하게 맞서고 있었다.
저 둘에게 맞설만한 인물이라면 단연 김집 밖에 없었겠으나······.
"왕양명의 도학은 모르겠으나 그 문장은 본받을만하오."
김집은 마지못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주자와 배치되는 왕수인의 사상까지 긍정할 수는 없지만 어디까지나 문체가 순수하니 그 글을 배울만 하다는 뜻이었다.
사실상 소극적인 찬성이었다.
"예판이 배신했다!"
"입으로는 항상 정학을 논하던 자가 어찌 이리 돌아설 수 있단 말인가?"
"영상이 임명되었는데도 제가 말한 것처럼 사직도 하지 않았지!"
김집에게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는 꿋꿋이 버텼다.
'나의 학문을 이을 제자들까지 죽일 수는 없지 않은가?'
자신을 통해 이어지는 학맥은 송익필과 이이, 성혼이라는 기호학파의 세 대학자로부터 모두 연원하는 것이니, 후계로 점찍어놓았던 송시열과 송준길이 죽는다면 대가 끊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신독재(김집의 호) 선생께서 이리 말씀하시니 양명학에도 배울 점이 있는게 아닐까?"
"신독재 선생은 공자도 아니고 주자도 아닌데 어찌 그가 말했다 하여 따른단 말인가?"
"아니, 그래서 자네가 기호학파의 학통을 이은 그분보다 나은가?"
어쨌든 김집이 이렇게 나오자 사론(士論) 또한 뭉치지 못하고, 더러는 김집의 주장에 호응하게 되니 이것이 이자원이 의도했던 바였다.
한편 잡과는 이런 논쟁에 가려 예수회 신부들이 출제에 참여한다는 문제도 그리 부각되지 않았으니, 도성의 중인 몇만이 발빠르게 그들에게로 움직였을 뿐이다.
어쨌든 그렇게 어느 정도 상황이 일단락되어가고 있을 때 시마바라 교인들의 집단 망명 소식이 전해져 온 것이다.
임금은 이런 논쟁이 지겨웠던 터에 이 이야기를 듣고 환호작약했다.
"남의 백성을 함부로 뺏는 것은 이웃의 도리가 아닐뿐더러, 이 왜인들은 제 나라가 금하는 바를 믿다가 난까지 일으켰사옵니다. 성정이 순하지 않을 뿐더러 국법을 우습게 여긴다는 하나의 증좌이니 이들을 우리나라에 둔다면 두고두고 해악이 되지 않겠사옵니까?
모쪼록 왜조에 연통하여 속환함이 마땅하옵니다."
이조판서 정온이 말했다.
그러나 임금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는 옳지 않은 말이옵니다, 전하."
임금이 한 소리 하려던 그때, 기다렸던 것처럼 이자원이 나섰다.
"우리가 일본을 공격하여 그 땅을 취하고 호구를 빼앗은 것이 아니요, 오로지 왜인들이 전하의 덕을 숭상하여 귀부해왔을 따름인데 어찌 돌려보낼 수 있겠사옵니까."
"훈련대장의 말이 맞사옵니다. 서경(書經)에도 호생지덕(好生之德)이라 하였사오니 만물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은 제왕의 풍모인데 어찌 왜주에게 돌려보내 죽음에 이르게 하겠사옵니까."
"이미 왜란 때에도 많은 왜인들이 선묘조의 어진 덕에 감화되어 대구와 의령 땅에 정착했으니 그 예를 준용하면 될 것이옵니다."
이자원에 이어 강석기와 신경진마저 찬성하고 나서자 임금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1천 명이 넘는다라.'
이자원에게 미리 언질을 듣기는 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숫자였다.
게다가 계속해서 유입될 것이라 하지 않는가.
지난 전쟁에서 김충선이 이끄는 왜병들의 실력을 익히 들었던 그였다.
그런데 남만교를 믿게 허락해주는 정도로 그들을 부릴 수 있게 되다니 어찌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왜인들을 추려 칼을 잘쓰는 자는 따로이 편성해 훈련중군의 밑에 배속시키고, 나머지 양민들은 땅을 주어 우리 백성으로 삼음이 바람직한듯 하다."
임금이 그렇게 말하자 누군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전하, 이 일은 깊게 생각하여야 하옵니다."
영의정 최명길이었다.
"무슨 말이오, 영상."
다른 사람이라면 그저 반항한다 여겨 듣지 않았을 임금이나, 최명길에게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바로 아버지 인조가 최명길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요토의 계략에 걸려들었으니 말이다.
그때도 최명길은 깊게 생각할 것을 권했었다.
"탄압 탓에 제 고향을 버리고 조선에 의탁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저들은 엄연히 일본의 죄인이옵니다. 일본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모르되 이를 우리 조정에 추궁한다면 반드시 곤란해질 것이니, 우선 일본의 반응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보시옵소서."
일리가 있었다.
지금 북벌을 위해 왜인들을 받아들이려 하는 것인데, 그것이 일본의 성질을 건드려 발목을 잡힌다면 본말이 전도되는 것이 아닌가.
이 시대 일본과의 관계는 미묘했다.
40여 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망이 나서 조선을 침공한 결과 수많은 약탈과 학살이 자행되었고, 아직까지 백성들은 일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조정의 입장은 살짝 달랐다.
청의 위협이 점차 심화되면서 그 반대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제법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또한 잘못은 죄다 전조(前朝)인 도요토미 정권의 탓으로 떠넘기고, 조선과는 굳이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 선린 관계를 깨뜨려야 하는가.
임금이 이마에 주름을 잔뜩 만든 채 이자원 쪽을 바라보았다.
"영상 대감의 말이 맞사옵니다."
이자원은 뜻밖에도 최명길의 말을 긍정했다.
"허면, 왜인들을 그대로 속환하자는 말인가?"
이런다면 굳이 남만승을 보낸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자원의 뜻은 달랐다.
"저들을 북방으로 보내 번병(藩屛)으로 삼으소서."
이자원이 말했다.
"일본이 항의해 사신을 보내오더라도, 전부 풍랑에 죽었다고 답하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작가의말
미야모토 무사시는 양아들 이오리와 함께 시마바라의 난에 참전했습니다(당연히 진압군 측으로요).
이때를 전후해 그는 스스로 ‘도를 만났다’고 하니, 육체적으로는 중년을 맞아 쇠락해가는 중이었을지언정 기술적으로나 철학적으로는 완성되었던 시기일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