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86화 (86/213)

< 새로운 창구 (2) >

'신앙의 형제들을 구하고 싶지 않으시오?'

이자원이 건넸던 제안은 분명했다.

키리시탄을 탄압하는 막부를 피해 도망칠 곳을 제공해주겠다는 것.

그 가교를 예수회가 맡아달라는 것.

아담 샬도, 조선에 정착한 예수회 일원들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같은 믿음을 가진 어린 양들을 구할 수 있는 기회인데다, 교세를 확장할 수 있다는 실리적인 이유가 겹쳤기 때문이었다.

반면 이자원이 키리시탄들에게 손을 내미는 이유는 간단했다.

'누가 봐도 순수한 의도는 아니지만······.'

박애(博愛) 같은 말처럼 그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없으리라.

일본인들의 칼싸움 실력은 익히 알려져있다.

조선은 타타르에 복수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 중이니, 공짜로 실전 경험을 학습한 일본인들을 대거 받아들인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키리시탄 중에는 사무라이들 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공인(工人) 등이 많으니, 기이할 정도로 기술과 지식 흡수에 집착하는 이자원의 입맛에 딱 맞았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것이 이 땅의 키리시탄들에게 내려진 유일한 동앗줄임은 틀림없는 사실.

브루노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신부님은 어떻게 넘어오신 것입니까?"

시로가 물었다.

옛날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는 이를 통역으로 불러놓긴 하였지만, 브루노가 방금 전 일본어로 인사를 꺼낸 것을 보니 딱히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역시나 브루노는 일본어로 답했다.

"여러 사람의 호의를 받아 들어왔습니다."

쿠케박케르는 그를 찜찜하게 여기긴 했지만 조선에 빚을 지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조건은 명확했다.

'막부군에 발각되더라도 어디까지나 네덜란드는 모르는 일'이라는 단서를 붙여가며 그를 배에 태워줬던 것이다.

절대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약속 때문에 브루노는 쿠케박케르나 네덜란드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제법 열정적으로 조선에서 이곳까지 오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그래서 신부님께서 조선의 초청장을 들고 오신 것이로군요."

웅성거리는 키리시탄군의 수뇌부들을 자제시킨 시로가 물었다.

물경 3만 7천에 달하는 대군세의 대장이었지만 그 또한 한 사람의 교인.

신앙을 이끄는 목자에게 함부로 말을 할 수는 없기에 격을 높이는 그였다.

"그렇습니다, 형제님. 조선은 박해받는 일본의 기독교인들을 안쓰럽게 여겨 정착할 땅을 내어주고 자신들의 백성으로 인정하겠다 하였습니다."

브루노의 말에 시로의 장인인 아리에 켄모츠가 흥분해서 물었다.

그는 한때 키리시탄 다이묘였던 아리마 씨를 섬겼고, 그 경력 덕분에 반란군의 군무를 실질적으로 총괄하고 있는 장본인이었다.

"땅까지 준다고 하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조금 척박하긴 하지만 땅은 얼마든지 있다고 합니다. 신앙 또한 저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조선에는 지금 교회가 지어지고 있으며, 그 숫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늘어날테니까요."

사람들은 더욱 놀랐다.

교회가 생기고 있다니.

정말 조금 전 들은 말이 헛소문이 아니었단 말인가.

"조선에도 주님의 말씀이 전해졌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시로의 측근인 와타나베 덴베에가 황급히 물었다.

그러자 브루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조선국 장군이 직접 요청한 까닭으로 우리 예수회가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지요."

그 순간 좌중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리에 켄모츠가 부르짖었다.

"조선의 쇼군이!"

"국교로 삼았다는 뜻이 아닌가?"

이것은 브루노가 의도하지 않았던 바였다.

그는 예전 혹시 모를 일본에서의 포교를 위해 일본어를 배워놓기는 하였고, 그 때문에 여기에 파견된 인물이었지만 당연하게도 일본에 산 적이 없던 인물인만큼 그 세부적인 뉘앙스 차이에는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단순히 '장군'이라는 뜻으로 던졌던 말이, 쇼군이 곧 최고 실권자인 일본인들에게는 마치 기독교가 국교가 된 것인마냥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아아, 동방에도 드디어 주님의 빛이······."

"우리가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음에도 조선이 먼저 주님의 품에 안기다니! 안타깝지만 또한 감동스러운 일이오."

이들은 조선의 정세에 대해 무지했지만 적어도 바로 옆 나라라는 것은 알았다.

그런데 엎어지면 코 닿을 그곳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지 않은가.

그간 탄압당했던 회한이 북받쳐오름과 동시에 희망 한줄기가 피어오르는 그들이었다.

안타깝게도 브루노는 울음 섞인 말투로 왁자지껄 터져나오는 시마바라 방언을 조금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말이다.

다만 그는 계속해서 조선이 얼마나 기독교에 대해 관대한지 늘어놓을 뿐이었다.

영업을 위해서 말이다.

"장군은 우리 교회에 대해 깊은 후의(厚意)를 보내고 있습니다. 조선에서의 교세도 나날이 늘어가고 있지요. 여러분들이 조선에 오시게 되면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입니다."

브루노의 말을 들을수록 조선은 동방의 예루살렘처럼 느껴지는 그들이었다.

실제로 지금 반란군이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일본이오. 어찌 사람이 나고 자란 땅을 저버릴 수 있겠소? 내가 복음을 퍼뜨려야 하는 곳도 이곳이고, 차라리 한 몸이 죽어서 그 밀알이 된다면 되었지······."

아직 순교의 뜻을 버리지 못한 시로에게 브루노가 강변했다.

"이미 저 잔악한 막부군이 턱 끝까지 나아왔습니다. 순교도 중요하지만 배교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을 선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제께선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복음 16:26)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신부님의 가르침이 전적으로 맞습니다. 대장, 결단해주십시오."

"장인, 4만 가까운 우리 군사가 전부 조선으로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어차피 누군가는 남아서 지휘해야할텐데 그들을 버리고 도망치겠습니까?"

장인에게 시로가 말했다.

"봉기에 참여한 모두가 키리시탄은 아닙니다. 또한 하라성이 함락되었을 때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이들은 여기 있는 우리 뿐이니, 다른 자들은 목숨까지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후에 신앙을 지키려는 자들이 망명해온다면 그것을 열심히 도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필리핀으로 가는 것보다 이 편이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나는 성이 떨어질 때까지 여기에 남아있겠습니다."

시로의 결심은 굳었다.

싸워서 패해 모든 것이 끝난 상황이라면 모르되 아직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형제님."

"신부님의 염려는 알고 있습니다. 신부님이 원하는 만큼은 아니겠지만 조선에 일부는 보낼 생각입니다. 오야노, 그리고 아카호시."

호명된 부하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대들은 미리 신심 깊고 근면한 이들을 추려내시오. 그리고 완전히 성이 포위되기 전에 배를 타고 조선으로 건너가는 것이 좋겠소."

고민하던 시로가 내놓은 타협안이었다.

브루노 입장에서는 못내 아쉬운 결과였지만 시로의 뜻은 굳었다.

"배는 있습니까?"

"우리군은 대부분 시마바라 사람입니다. 배 타지 않는 이들이 드물지요."

원래 역사에서 키리시탄들은 시마바라의 난이 실패로 끝난 후 동남아까지 도망을 시도했고, 실제로 대규모의 망명이 이루어졌다.

그보다 한참 거리가 짧은 조선으로 건너가는 것이라면 더 여건이 좋을수도 있었다.

시로의 말에 납득한 브루노는 잠시 주저하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실은 조선의 장군으로부터 받은 언질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것 참. 어찌 설명을 해야할지······."

시로는 의아한 표정으로 브루노를 바라보았다.

궁금증이 인 좌중이 그를 채근하자 결국 입을 연 브루노였다.

"이곳에 혹시 야마다 우에몬사쿠(山田 右衛門作)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기 있는 통역인데, 그의 이름을 어찌 아십니까?"

브루노가 일본어를 할줄 알았기 때문에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통역이 바로 야마다였다.

시로를 비롯한 좌중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지만 오히려 브루노 본인이 더 당황해서 되물었다.

"저 사람이 정말 야마다가 맞습니까?"

"그렇소."

브루노는 손가락을 들어 야마다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자, 장군께서 말씀하시길, 저기 있는 저 자가 바로 막부와 내통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

'말할 기회가 있으면 전하도록. 이놈이 막부의 끄나풀이다.'

별뜻없이, 혹 성이 조금 더 버티면 도망도 쉬워질까 하여 이자원이 던진 말이 이렇게 돌아올줄은 누가 알았으랴.

야마다 우에몬사쿠는 화가 출신으로, 성을 지키는 한편으로 막부와의 교섭문을 쓰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임무를 이용하여 막부와 내통하게 되었는데, 원래 역사에서는 이것이 들통나 옥에 갇혔다가 성이 함락되며 살아난 자였다.

그리고 지금 이순간, 원래 역사보다는 조금 더 빨리- 그 증거가 드러나고 있었다.

"대장, 그간 주고받은 교섭문을 살펴보니 야마다가 그 문장을 이용해 은밀히 막부와 통하고 있었던듯 합니다!"

본래라면 이런 고발은 그냥 웃어넘겼을 시로다.

그러나 이미 개종하여 주님의 뜻을 받든 조선의 쇼군이 일본 구석 무명 그림쟁이 이름까지 맞추고 그를 내통자로 지목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농담거리가 아니다.

"쇼군의 말이 맞았소."

시로가 중얼거렸다.

"내 부장인 야마다가 내통자였다니."

설마 그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브루노가 야마다를 지목했을 때 시로의 마음속에 생겨난 조그마한 의심은 순식간에 그의 머리를 지배해버렸다.

'조선의 쇼군은 주님의 사자인 것이 아닐까?'

시로가 듣고 자란 성인(聖人)들은 한결같이 어느날 신의 부름을 받고 행동에 나섰다.

개종을 하든, 예언을 하든, 아니면 전쟁에 나서서 승리하든.

"설마 동방에도 그런 분이 나타날 줄이야."

조선이 낙원의 땅이 되었다 하더라도 일본을 떠날 생각은 없었던 시로의 마음이 일순간에 변하기 시작했다.

막부군이 물밀듯이 몰려오고 있으니 곧 이 십자군이 패망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가 순교해도 일본에서 교(敎)가 뿌리뽑힐 공산이 컸다.

하지만.

'그런 성자라면 이 일본 또한 교화시키실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직접 건너가 그분을 뵙고 일본을 정토하도록 간청한다면······.'

"조선으로 가십시오, 대장."

장인 아리에 켄모츠가 말했다.

"하지만 남은 사람들이."

"그들은 제가 이끌겠습니다."

아리에가 말을 이었다.

"열여섯에 불과한 당신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키리시탄들을 이끌게 한 것은 대장만큼 신심깊고 복된 인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쇼군도 대장의 뜨거운 신앙심을 보면 기필코 형제들을 구하기 위해 칼을 뽑을 것입니다."

아리에의 설득에 한참 고민하던 시로는 그의 손을 부여잡았다.

"장인. 오래지 않아 돌아오겠습니다."

그때는 시로 혼자만이 아니라 신앙의 형제들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십자군이 함께 따라올 것이다.

물론 바다 건너 이자원에게는 무척이나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아직 그는 이 사실을 몰랐다.

===

"조선은 이미 키리시탄의 나라가 되었다더라."

"쇼군이 직접 세례를 받았고 이제 국호를 예루살렘으로 바꾼다고 하더라."

"조선의 쇼군은 성인으로, 천리 밖을 내다보는 예언자라더라."

하라성 안에 도는 괴소문은 싸움에 지쳐있던 키리시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브루노 가르시아라는 예수회 신부까지 와서 보증을 해주니 조선에 건너가려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많았다.

쿠케박케르는 곧 히라도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전해왔지만, 브루노는 거기에 따라가지 않고 남았다.

오야노 마츠에몬과 아카호시 스미시게는 몰려드는 지원자들에게 당황했지만, 출항은 무리없이 진행되었다.

1차로 아마쿠사 시로가 탄 5백 명의 선단이 몰래 시마바라를 빠져나갔고, 성이 완전히 포위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뒤따랐다.

1638년 4월.

세부적인 날짜에는 차이가 있지만 원래 역사와 비슷한 시기에 하라성이 함락되고 학살이 벌어졌다.

이미 가혹한 가톨릭 탄압을 벌였던 막부는 훨씬 그 강도를 높였고, 많은 키리시탄들은 배교하거나 아니면 타국으로 망명했다.

물론 망명자의 절대 다수는 굳이 멀고 먼 필리핀이 아니라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소문난 조선으로 향했고 말이다.

그리고 막부 또한 이런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었다.

작가의말

시마바라의 난 후 정확히 얼마 정도 규모의 일본인 집단이 해외로 망명했는지는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시마바라의 난을 다룬 논문들은 전개나 배경에 집중하지 저들에 관해서는 상세한 서술이 없고, 일본인 디아스포라에 대해서 찾아보아도 근현대기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이더군요.

일본웹 쪽에서도 딱히 걸리는게 없고...

하지만 김시덕 교수의 「일본인 이야기」 등 간략하게나마 언급한 책들을 보면 확실히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은 확실할 것 같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