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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85화 (85/213)

< 새로운 창구 (1) >

"부처나 상제에게 정성을 올려 자식을 바라는 일은 쉽게 믿고 따를 바가 아니오. 남만교의 천주라 해도 다를 것 같지가 않구려."

특히 저 남만교라 하는 자들은 유자가 아닐뿐더러 불승이나 도사들과도 계통이 또 다른지라, 좋은 기술은 취하더라도 혹 우리네 풍속을 해치지 않게 경계해야한다는 것이 봉림대군의 입장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아직 우리 둘 나이가 매우 젊은데 무슨 걱정이오?"

그러나 봉림대군이 말해놓고 나서 언뜻 눈치를 살피니 부인이 말을 꺼낸 의도가 수상했다.

장씨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허허, 이것 참."

눈치를 보아하니 공양 드리는 것은 핑계고, 오랜만에 나들이를 하고 싶어 그런 모양이었다.

원래 같으면 불공을 드린다며 어디 산사(山寺)라도 가겠지만, 근 몇년간 그가 어영청에 매여 있었으니 부군을 놔두고 도성을 떠날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한창 지어지고 있다는 남만사(南蠻寺)는 도성 어귀에 있는지라 들러보기에 부담이 없었다.

"그래, 그런 것이라면 한번 다녀오시오."

대충 무슨 생각인지 알아차린 봉림대군은 그렇게 말했다.

재(齋) 같은 것은 모두 허망하다 하지만, 이 참에 바람을 쐬고 싶은 부인 소원을 못들어주겠는가.

이러나 저러나 가정의 평화에는 신경을 쓰고 있는 봉림대군이었다.

그때 문득 봉림대군의 머릿속에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남만교도 이자원이 들여온 종교가 아닌가.'

그는 거기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북경에서 그들과 접촉했던 것일까.

자신 또한 그들에게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잠깐, 부인."

봉림대군이 말했다.

"공양 드리러 갈 때 나와 같이 갑시다. 남만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한번 들어보아야겠소."

===

전례(典禮)에 관한 논의는 가톨릭의 동아시아 포교에 있어 가장 민감한 문제였다.

가장 현지식 포교에 적극적이었던 이 시기의 예수회는 제사를 인정하는 등 과감한 유연성을 보여줌으로써 중국에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었다.

도미니코회나 프란치스코회, 파리외방전교회 등의 교회는 이러한 예수회의 방침에 반대를 표했지만, 어쨌거나 예수회는 실효성을 중시했고, 조선에도 마찬가지 방침을 적용키로 했다.

문제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원래 역사에선 80년 쯤 뒤에는 클레멘스 11세의 칙령에 의해 전례가 확고히 금지되니, 예수회라 하더라도 그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다.

"혹 자기네 법왕(法王)이 그런 어명을 내린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신도들이 스스로의 제사를 폐하려 들 것이옵니다."

"상민들이야 제사를 지내든 말든 신경쓸 바가 아니지 않은가?"

제례가 일반 상민 가정까지 널리 퍼진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이다.

아직 상민들 가운데서는 제사를 지내는 자도 많지 않으니, 지금의 임금 또한 그런 문제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꼭 상민들만이 남만교에 빠지라는 법은 없지요."

조선 후기 수많은 양반들이 천주교를 믿었고, 위패를 태우거나 제사를 거부했다.

그것이 정치적인 문제와 엮이면서 대대적인 박해 또한 벌어지지 않았던가.

"설마 그럴리야 있겠는가? 양반들은 대개 절 가까이 가는 것도 꺼려하는 판인데."

임금은 회의적이었다.

불교에 깊이 빠진 양반들이 없진 않지만 그들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대부분은 불교든 남만교든 허망하다 생각하니 말이다.

"앞날은 어찌될지 모르옵니다. 미리 남만승들에게 주지시켜 놓아야하겠사옵니다. 조선은 이런 문제를 심각히 생각한다고 말이옵니다."

물론 이자원은 직접 전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다닐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80년 후엔 이미 그도 없을 것이고, 그가 추진 중인 일도 어떤 식으로든 결착이 나있을테니까.

다만 미리부터 임금의 명으로 우려를 표해놓으면, 예수회 측에서도 교황청에 자신들의 논거로 삼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이자원의 생각이었다.

"음······. 허면 남만승들에게 왕명을 내려 조선의 풍속을 존중하라 요구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자원의 말에 임금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할 말은 더 있는가?"

"남만인들에게서 답서가 왔사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남만은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예수회가 아니다.

히라도에 있는 네덜란드 상관.

그들이 보낸 것이었다.

===

시간을 잠시 돌려 1637년 2월.

네덜란드 상관장 니콜라스 쿠케박케르(Nicolaas Koeckebakker)는 세 사람의 네덜란드인이 털어놓은 말을 듣자마자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조, 조선이 우리와 교역을 하고자 한다고? 조선의 군주가 직접 한 말인가?"

표류되어 조선이라는 은자의 나라에 갇혀살다 왔다는 것도 놀라운 이야기였지만, 그들이 꺼내놓은 제안은 더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어보는 쿠케박케르에게 세 사람은 자신들의 말에 한치의 거짓이 없다고 맹세했다.

"그가 직접 꺼낸 이야기는 아니지만, 왕의 측근인 조선 장군의 제안입니다. 10년 넘게 억류되어 있던 저희들을 보내준 사람도 바로 그 사람입니다."

"조선의 장군은 이 나라의 전쟁영웅으로, 왕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중국에도 갔다왔는데, 그곳에서 유럽의 강성함을 듣고 또 우리 네덜란드의 위세에도 감명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를 히라도로 보내 통교를 하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도우시는군!"

쿠케박케르는 솟구치는 환희에 주먹으로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는 이것이 기회임을 깨달았다.

'동아시아에서 교역을 벌여 이득을 취할 만한 나라는 두 곳.'

바로 중국과 일본이다.

그러나 현재 VOC(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두 나라 모두에 대해서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우선 가장 먹음직스러운 상대인 중국은, 1620년대 교역을 트려다 분쟁으로 이어진 후로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판이다.

일본은 그보다 사정이 나았다.

영국이 철수하고 포르투갈이 쫓겨나면서 사실상 독점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간 상관장의 부재와 부실 운영으로 인해 히라도 상관은 많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만을 놓고 벌어진 일본 상인과의 갈등이 결정적이었다. 여기에 대한 보복으로 5년 간이나 무역 금지를 당하고 1633년부터야 재개할 수 있었지 않은가.

"일본과의 무역은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이네."

쿠케박케르가 말했다.

"그러나 일본과 같은 곳을 하나 더 거점으로 삼을 수 있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지."

그간 네덜란드는 일본과 교섭하는데 있어 상당히 자세를 낮추어 왔으나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자유무역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들의 영역은 이 작은 히라도의 상관 하나에 불과했다.

"원한다면 조선의 수도 근처 항구를 열어주고 도자기와 비단을 마음껏 교역하도록 해주겠다라······. 조선에서는 도자기와 비단도 나는 것인가?"

"도자기는 일본의 것보다 조선의 것이 훨씬 좋습니다. 그리고 비단 또한 걱정하지 말라더군요."

상관장이 이정도로 관심을 보일줄은 몰랐기에 자연히 훈련도감 출신 네덜란드인 세 사람의 톤도 올라갔다.

쿠케박케르는 이들이 과장하는 것이 아닌가 싶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시도해볼만한 사업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조선과 한번 물꼬를 터보고 싶은데, 상관장인 내가 직접 가야겠지?"

"그러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쿠케박케르는 이 공을 남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또 조선 측에서도 이들 중 가장 높은 사람인 자신이 가야 성의를 보인다 느끼지 않겠는가.

"상관장님."

그때 부하 한 사람이 그의 귀에 대고 무언가 속삭였다.

쿠케박케르는 부하의 말에 흥분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약속이 떠올랐다.

"음······. 그래. 내가 직접 아리마에 가기로 했었지."

"약속을 어긴다면 두 사람이 불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부하가 말한 두 사람은 히로시마 번주 아사노 미츠아키라와 나가사키 봉행 사카키바라 모토나오다.

쿠케박케르가 심기를 거슬러서는 좋을게 없는 인물들인 만큼, 약속을 무시하고 조선에 가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싶었다.

"무슨 일이시기에 상관장께서 직접 가시는 것입니까?"

궁금해진 벨테브레가 묻자 쿠케박케르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최근에 일본의 가톨릭 신도들이 반란을 일으켰거든. 그것 때문에 일본이 우리에게 원조를 요청했네. 히라도의 우리 선박에 대포를 싣고 오라고 요구하기에 내가 직접 가기로 했지."

쿠케박케르는 아쉽다는듯이 그렇게 말했지만 벨테브레를 비롯한 그들의 반응은 이상했다.

"무슨 일인가?"

"아, 그게······."

벨테브레가 대표로 나서서 말했다.

"저희는 아까 말씀드린 그 조선 장군으로부터 거기에 대한 명령도 하달받았습니다."

"뭐라고?"

"저희와 함께 합류한 예수회 신부 있지 않습니까? 그자도 무슨 명령을 받고 온 모양입니다. 상관장님께서 목적지까지 데려가 주신다면, 조선 쪽에서 고마워할 것입니다."

벨테브레의 말에 쿠케박케르의 표정이 변했다.

===

하라성(原城).

수탈에 못이겨 봉기한 농민들과 주인 없는 낭인들은, 한때 진압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고 나가사키까지 진출을 시도하는 등 기세를 올렸지만 거기까지였다.

폐성(廢城)이었던 하라성에 들어가 농성을 시작한지도 어언 3개월.

성 안의 모두가 끝이 다가옴을 느끼고 있었다.

"마쓰다이라 노부츠나가 이끄는 진압군이 어언 12만이라고 합니다."

"12만······."

아마쿠사 시로(天草 四郎)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총대장이라 하나 17세의 소년에 불과했으므로 실질적인 군무는 밑에서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일지라도 얼마나 승산이 없는지는 감을 느끼고 있었다.

"싸워서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항복하여 배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필리핀으로 망명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이니 그들 키리시탄을 받아들여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시로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로 살아나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소? 나는 순교를 각오했소."

필리핀까지는 얼마나 먼지 들어서 알고 있다.

시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먼 나라까지 도망치려다 바다 위에서 죽느니 차라리 순교자가 되고 싶었다.

"······조선은 어떻습니까?"

그때 뜬금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로의 물음에 그 말을 한 부하가 답했다.

"지금 성 안에선 조선에서는 이미 가톨릭이 공인되었고, 자유롭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를. 그 말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이오?"

시로는 그냥 헛소리라 여겨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부하는 여전히 진중한 목소리로 시로를 설득했다.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조선의 동래에 드나들던 이 하나가 전해준 소식이라고 합니다."

"가엾은 영혼들이 서로를 위하려 지어낸 소리가 아니겠소. 정말 그러면 좋겠지만, 조선이 뜬금없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리가······."

"대, 대장!"

그때 급히 달려온 사무라이가 외쳤다.

"무슨 일이오?"

"성 안에 숨어들어온 침입자가 하나 있는데, 범상치가 않습니다."

"침입자가 범상치 않다니."

성벽을 그냥 뛰어넘어 들어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러나 심문을 위해 그자를 들이게 한 시로와 좌중의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큰 키와 푸른 눈.

그리고 하얗게 드러난 피부와 목에 걸린 십자가.

"안녕하십니까, 신앙의 형제들이여."

그는 시로가 이 땅에서는 이미 박해받아 영영 쫓겨나버렸을 것이라 생각했던 종류의 사람이었다.

"예수회 신부 브루노 가르시아라고 합니다. 조선의 초청장을 들고 왔습니다."

작가의말

네덜란드는 일본과 교섭하는데 있어, ‘일본인은 진실로 위대하여 긍지높으며, 네덜란드인은 비소(卑小)하다’며 일본인을 칭찬하라는 행동강령을 내리면서까지 교역에 공을 들였습니다(신동규, 근세 일본의 ‘島原․天草의 난’으로 본 江戶幕府와 네덜란드의 共助關係, 2009). 그러나 그들이 원하던 바를 모두 달성하지는 못했지요.

동 논문에서는 쿠케박케르가 직접 아리마에 가기로 하자 히로시마 번주와 나가사키 봉행이 흡족해했다는 기록을 제시했는데, 이 시기 나가사키 봉행이었던 사카키바라 모토나오와 바바 토시시게 둘 중 어느쪽인지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임의로 전자로 썼으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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