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84화 (84/213)

< 거꾸로 부는 바람 (3) >

"과거에서 정학을 배제하자니."

김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나라를 진정 금수의 세상으로 만들 작정이시오?"

이 시대 조선에 있어 정학이란 곧 주자학을 의미한다.

애초에 개국 때부터의 국시였으니 당연한 노릇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누가 뭐라하든 선비들의 제일(第一) 목표는 열심히 학문을 갈고 닦아 입신(立身)하는 것.

과거에서 주자학을 배제하겠다는 말은 완전히 현 주자학의 위치를 흔들겠다는 심산이 아닌가.

기득권을 떠나 한 사람의 성리학자로서 김집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자원은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이었다.

"불경 같은 것을 과거에 출제하라 상소하지는 않을 터이니 안심하십시오."

"당연한 말을······!"

이자원의 선심쓰는 듯한 말투에 김집이 화가 나 외쳤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의 흐름에 넘어가는 꼴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김집이 물었다.

"훈련대장이 청해서 데리고 온 남만승들의 학문을 퍼뜨릴 작정이시오?"

"무슨 문제라도 있소이까?"

없는 것이 이상하다.

김집은 이자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귀동냥으로나마 듣기로, 남만승들은 소위 상제(上帝)를 모시고 그 아들이라 하는 자가 행하고 가르친 바에 따라 수양하는 일파라고 들었소. 따라서 저 도교의 무리와 근본이 크게 다르지 않으니, 옛날 진시황부터 시작하여 여러 폭군·혼군들이 방사(方士)를 총애해 대업을 망친고로 아조에서는 이런 폐단을 크게 경계하였소!

그런데 어찌 그들의 학문을 과거에 낼 수가 있단 말이오?"

"그런 사례와는 조금 다른 것 같소이다만. 당장 황상께서도 탕약망(湯若望)에게 천문을 맡기셨고, 지금 전하께오서도 남만승들의 재주를 높이 사시고 있지 않습니까."

차마 김집으로서도 그들의 기술이 쓸만하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럴 경우 황제와 임금마저 부정하는 꼴이 되지 않는가.

김집은 해서 말을 돌리는 것을 택했다.

"정 그러면 그런 기술들은 잡과(雜科)에나 내면 될 일이오."

"겨우 그정도를 원했다면 예판 대감에게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오이다."

임금에게 직접 간하거나, 아니면 상관인 신경진이나 장인인 강석기에게 말해도 된다.

잡과가 어떻게 바뀌든 사족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는 일은 없을테니까.

"그런 잡기는 정학이 될 수가 없소. 애초에 목적이 다르니 말이오."

김집은 완강했다.

그가 보기엔 예수회 신부들이 전해주고 있는 의술이나 화포술, 천문학 등은 조선에 비해 낫긴 하지만 심신을 수양하거나 치국(治國)하는 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렇다고 도교 비스무리한-김집이 보기에는-그들의 교리를 과거에 내는 것은 더더욱 안될 말이고.

그런 김집을 보며 이자원이 물었다.

"허면 양명학(陽明學)은 어떻소이까?"

"사이비에 불과하오."

김집이 딱 잘라 말했다.

"영상 대감께서도 양명학을 깊이 공부하셨다 들었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외까?"

"물론이오. 대체로 성인의 학문은 곡식과 옷감 같은 것이라, 날마다 쓰면서도 그 묘용을 깨닫지 못해 간혹 진부(陳腐)하다 여기는 자들이 나오는 법이오. 그러나 왕양명의 말은 양지(良知)만을 내세우고 공부를 그르쳐 온전하지 못한 학문이니, 실로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가르침만이 정학이자 성도(聖道)임을 알 수가 있소.

다시 그가 조술(祖述)한 사설(邪說)을 살펴보면······."

"대감."

이자원의 말에 김집의 반론이 끊겼다.

이자원은 솔직히 말해 이런 학문적인 논쟁에 관해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제자를 구하고 싶지 않으신가 보군요."

"······명보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는게요?"

"물론이지요. 그럼 이 문제를 가지고 대감을 설득해야겠사오이까?"

김집은 논쟁 중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바로 이 자리 자체가 정치적 거래를 위한 장이라는 것.

"명보 또한 죽으면 죽었지 정학을 과거에서 쫓아내자는 말에 찬성하지는 않을 것이오."

"완전히 배제하자는 뜻은 아니오이다."

이자원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과거의 답안에 양명학적 해석 또한 인정하자는 뜻이지요."

"말도 안되는."

김집은 이것이 말장난에 불과함을 알았다.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들은 시험관의 성향에 따라 어느쪽으로 답안을 써야 점수를 받을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당장 양명학이 크게 유행한 명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지 않은가.

끝내 장거정이 과거에서 주자학에 따른 답만을 인정하고, 사서정문까지 반포하여 그 준칙을 알리려 했음에도 양명학풍의 답안을 써서 합격한 자가 나오는 등 혼란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대장은 지금 과거제에 혼란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오."

"지금 조정에 있는 관리들 중에도 양명학에 조예 깊은 이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사오이다. 그들이 함께 심사하여 어느쪽이든 옳은 해석을 내어놓기만 한다면 정답으로 처리해주면 되겠지요."

이자원은 말을 이었다.

"정말 성리학이 옳고 세상의 진리라면, 더는 독점적인 관학의 지위를 누리지 않더라도 현명한 자라면 누구나 주자를 받들지 않겠습니까?"

"······."

"그렇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지 않소이까? 소관이 원하는 것은 단지 이것 뿐이오이다."

그를 포함한 산림 일파들이 양명학자로 전향할 필요도 없다.

그저 신하된 입장으로서 이를 옹호해주기만 하면 된다.

허면 송준길의 목숨을 살려주겠다.

그것이 이자원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거절할 경우 닥칠 일은 뻔했다.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영창대군의 일로 조정을 뒤흔들려 한 죄는 단순 불경을 넘어 역모로 처리될 것이다.

거기에 엮여 들어가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리라.

"대장이 왕수인의 대제자되는 사람인지는 몰랐구려."

김집은 가치돋친 말을 던지며 일어섰다.

"들어주시는 것이오이까?"

"이런 애매한 개악(改惡)이 얼마나 갈지 두고 보겠소."

이쯤되면 수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자원은 밖을 나서는 김집의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때가 되더라도 도로 회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원하는 것은 얻었다.

'과거에 양명학을 도입한다.'

임금이라 해도 쉽게 밀어붙일 수가 없는 일이다.

아니, 오히려 그 또한 굳이 그래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러니 높은 명성을 지니고, 학문에 도통한 김집과 그 제자들이 격렬하게 들끓어오를 사론(士論)을 막아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목을 전부 날리는 것보다야 방패막이로 쓰는게 나을테고 말이다.

"양명학이라고 주자학과 크게 다르진 않겠지만."

현대인인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사실 양명학 같은 것도 뜬구름 잡는 소리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한번 독점 체제가 깨진다면 그 틈을 비집고 얼마든지 새로운 사상, 새로운 학문을 들여와 공인할 수 있다.

양명학이라는 전례가 있으니 말이다.

이제 정학(正學)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학문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쇄신해야만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

"양명학이라니."

송준길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과거에서 왕수인의 학문 또한 인정할 것을 상소하라 하더군."

"그것은······."

송준길이 이를 악물었다.

그들은 뼛속까지 성리학자였지만, 그런 상소를 올린다면 세간이 어떻게 보겠는가.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사문난적(斯文亂賊)이 될수는······."

"역적의 오명보다는 낫지 않겠나."

지금 송준길의 상황은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했다.

누군가 엄호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쓸데없는 옛날 얘기 꺼낸 잘못'으로 경미한 처벌에 그치겠지만, 사건이 확대된다면 정말 여러 사람 목이 날아갈 수가 있는 사안인 것이다.

이자원의 도움이 없다면 그 화가 어디까지 미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부탁하네."

송시열이 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암."

"사문을 위해서라도 명보, 자네는 죽어서는 안되네."

언제나 자신보다 한발 앞서 있던 친척이자 동문이었다.

그런 그가 살아달라며 부탁하자 송준길의 눈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북받쳤다.

"스승님께서도 나서시기로 했네."

"허."

"나도 도울 것이야. 그 짐을 자네에게만 지우지는 않겠네."

송시열은 끝내 악마의 손을 잡았다.

===

한성부 중부 숭교방에는 봉림대군의 사저가 있다.

금상의 맏동생이요, 어영청 도제조인 주인의 위세에 걸맞게 제법 크고 멋들어진 저택이었다.

그 큰 저택 중에서도 가장 심처(深處)에는 대군 내외가 거하는 안방이 있었는데, 남부러울 것 없는 위세에 걸맞지 않게 이곳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대감, 뭐라도 좀 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살이 통통하게 찐 여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봉림대군의 아내,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 장씨다.

평소에는 금슬이 나쁘지 않은 두 사람이었지만 봉림대군이 이처럼 입을 꾹 다물고서 식사를 거르니 그녀로서도 답답했다.

그러나 봉림대군은 부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리 툭 내뱉을 뿐이었다.

"생각이 없소."

봉림의 말에 몸이 단 부인은 애타는 심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씀이라도 해주시지요."

"아녀자가 신경쓸 일이 아니오."

봉림대군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누웠다.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나오는 말에 아내에게 조금 미안한 감은 있었지만, 일일히 말투에 신경쓰지 못할 정도로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송준길이 하옥됐다······.'

이 소식을 들은 봉림대군 이호는 섬뜩함을 느꼈다.

전쟁의 영웅인데다, 천조의 벼슬까지 겸하고, 임금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권신.

그것이 이자원이다.

심지어 그 아비가 영창을 죽였다는 사실조차 그에게는 아무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가 만약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가 있겠는가?

'내가 나서자니.'

봉림의 귀에 최명길의 목소리가 스쳤다.

'대감께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면 생사가 위험하오이다.'

이자원을 쓰는 것은 어디까지나 임금이다.

이자원을 견제하는 것은 임금의 판단에 딴지를 거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것도 대군인 자신이 나선다면 주상이 칼을 뽑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최명길이 가르쳐준 것이다.

뵙기를 청하는 송시열을 와병 핑계로 물리친 것도 그 때문이지만,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았다.

'괜히 그와 척을 져버린 것은 아닐까.'

봉림대군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자원에 대한 걱정은 걱정이고, 그를 이길 수도 없는 상황에서 시비를 걸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 날로 고민은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대감, 어의가 왔습니다."

"어의?"

부인의 말을 들은 봉림대군이 벌떡 일어났다.

"와병 중이라 하시기에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어, 어서 오시게."

병은 핑계였지만 어의를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맥을 짚던 어의가 약 몇가지를 처방하고 나자 의례상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대군이다.

"요새는 많이 바쁜가?"

"바쁘기야 바쁘지요. 훈국 이 대장의 부인이 회임하였다 하여 그리로도 가고, 남만승들에게 조선에서 변통할 수 있는 약초를 가르쳐주라는 어명이 있었기에 그쪽과도 만나고 그렇사오이다."

"남만승들이라. 그들이 주상 전하도 진찰하는 것이오?"

"엄연히 오랑캐들인데 그럴리야 있겠습니까. 다만 혜민서 의원들 말로는 실력은 제법 있다 하더이다."

대군이 그런 이야기들을 주고받다가 적당히 어의를 돌려보냈을 때였다.

부인 장씨가 어느새 그 대화를 들었는지 건너와 말했다.

"대감, 남만교에 한번 들러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거기는 왜 말이오?"

"듣기로 우리 집안 계집종 하나가 거기서 공양(供養)을 드려 아들을 낳았다 하니, 효험이 있지 않겠습니까?"

원래 역사에서 현종이 될 원(棩)이라는 아이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그들 슬하에는 딸 둘 뿐이다.

그래도 나이가 젊으니 큰 걱정은 않고 있건만 부인은 제법 조급한 모양이었다.

작가의말

양명학은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나라에서 나서서 대대적으로 핍박한 일은 없습니다.

장유나 최명길 같은 사람도 제법 소양이 있었을 정도이니까요.

다만 학문적으로 비주류였던 터라 심심하면 디스가 걸리긴 했습니다.

어쩌면 김집의 눈으로 보는 이자원은···대충 마르크스 경제학을 5급 경제 과목에 도입하자는 인간일지도 모르겠네요ㅎㅎ

정작 본인은 양명학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요.

양명학과 주자학의 충돌로 인한 수험생의 혼란은 실제로 명말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자 강남 등지의 선비들은 여기에 대한 대책으로 문사(文社)라는 조직을 만들어 사시(私試, 모의시험)를 치고 개중 우수작을 출판하는 등의 양상이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윤상수, 거업을 통해 본 명말의 과거와 학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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