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83화 (83/213)

< 거꾸로 부는 바람 (2) >

노인에게도 젊었던 시절은 있었다.

사실 새파란 청년기는 이미 지난지 오래였지만, 지금처럼 허리가 굽지 않고 머리가 세지도 않았으니 젊다면 젊은 시기였다.

그 시절 나이가 많이 차서야 과거에 합격한 노인은 처음으로 얻은 관직에 기뻐했고, 또한 그만큼 직분에 충실했다.

말인즉슨 사헌부 감찰로서 가리지 않고 들이박았다는 뜻이다.

‘사람이 어찌 까닭없이 죽을 수가 있단 말인가? 대군에게 죄를 물으려거든 마땅히 조당(朝堂)에서 의논하여 처결할 일이지, 정항이나 이정표 같은 측신들이 관계되었다는 말이 나도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수상하고 또 수상한 죽음.

심증은 있으나 누구도 캐지 못할 때 노인은 물증을 잡기 위해 돌아다녔다.

성과는 있었다.

열여섯 명이나 되는 금군에게 잡혀 두들겨 맞은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 중 처벌받은 사람은 셋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유야무야 넘어갔다.

박승길이 이중전을 주목하게 된 것은 그때쯤부터였다.

‘금군별장 이중전.’

‘이름이 그리 알려져 있지 않으나 드러낼 수 없는 궂은 일을 도맡아 처리한다고 들었다.’

영창대군의 죽음과 전후하여 정항과 이정표를 만나고, 강화까지 따라가 감시한 자.

아마 금군을 사주한 이 또한 그이리라.

하지만 몸이 나아 복귀하자마자 예산의 현감으로 발령난 그는 더 탐문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감히 발령을 거부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현감으로 부임하여 부랴부랴 업무에 적응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것이 두어달.

그러던 어느날, 겨우 숨을 돌릴 지경이 되자 친하게 지내던 사헌부의 동료 한 사람이 내려왔을 때였다.

‘임해군의 첩 환어사(喚御史)가 잡혀왔는데, 친국을 견디지 못하고 옥사한 뒤 그 시체는 저자에서 찢겼소이다.’

임해군의 옥으로 수배되어 도망다니던 환어사가 드디어 잡혀 죽었다- 하며 지나가는 말로 꺼내놓는 그였다.

‘헌데 이상하지요. 환어사는 본래 창기(娼妓)에 불과하고, 또 공초에 연루되어 있지도 않았는데 대역죄(大逆罪)와 똑같이 다스리다니.’

그때의 노인 또한 듣고 보니 낌새가 이상했다.

임금이 그 사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나, 정작 누구보다 경계해야할 임해군은 이미 5년 전에 죽어버리지 않았는가.

‘혹 환어사가 남긴 말이 있는가? 사헌부의 대관 또한 친국장에 나갔을테니 국안(鞫案, 사건 기록) 남겨 놓은 것이 있을 것 아닌가.’

‘있기야 할텐데······ 형장(兄丈)께서 원하신다면 슬쩍 가져와보겠소이다.’

환어사가 아마 유언처럼 남겼을 말.

그것은······.

“개 두 마리가 고기 하나를 놓고 다투는구나.”

“작금의 일을 말함이오?”

노인의 힘없는 혼잣말에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그저 앉아있을 뿐인데도 산악과 같은 기세를 자랑하는 자.

그저 홀로 중얼거렸을 뿐인데 어쩌면 지금 상황을 비꼬는 말로 들렸을 수 있겠다 싶어 박승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저 옛일이 생각났을 뿐이오.”

“옛일이라. 노인장이 털어놓은 그 옛일 때문에 여러 사람이 곤란하게 되었소.”

박승길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것 참. 그치들, 내 손주도 아니면서 옛날 이야기를 조르더니 그새 사고를 치고 만 모양이로군.”

이자원은 박승길을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검버섯이 숭숭 피어있고 몸은 해쓱하게 말랐다.

본래 대가 센 것인지 죽을 날이 머지 않았기 때문인지 전혀 겁먹는 기색이 없다.

“허나 그 말에 거짓은 없소. 이중전은 폐주의 밀명을 갖고 정항과 이정표를 만났고, 강화까지 가서 감시하였소. 이래도 영창의 죽음에 관계가 없다 하겠소?”

“진실 따위는 내 관심사가 아니오.”

이자원이 말했다.

실제로 이중전 같은 인간의 이름은 후세에서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가 역사를 틀어버리지 않았다면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 따위는 영영 드러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노인장을 찾아온 것은 만에 하나를 위해서요.”

이미 여론에 손을 써두었으니 영창대군의 죽음을 조정에서 파헤치진 않겠지만 계속 박승길이 떠들고 다니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이 시각 이후로 내 아버님에 관한 소리가 하나라도 노인장의 입에서 나온다면······.”

이자원이 조용히 말했다.

“저 밖에 있는 피붙이들의 목숨은 장담할 수가 없을 것이오.”

농담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할 능력도, 의지도 있었다.

박승길 또한 얼굴이 미미하게 떨렸다.

“아버님. 그렇군. 당신이 바로······.”

하지만 박승길의 반응은 엉뚱했다.

“그래. 이상하다 생각했었지. 갑자기 끈없는 무관 나부랭이가 출세를 하고.”

“무슨,”

이자원이 말릴 틈도 없이 횡설수설하던 박승길은 이내 얼굴에 열이 오르더니 가슴을 부여잡았다.

“아버님!”

“할아버지!”

문 밖에 서있던 박승길의 아들과 손자들이 급히 달려와 그를 진정시켰다.

“이만하면 되었사오이다. 아무리 훈련대장 영감이라 해도 어른을 붙잡고 이리 고초를 겪게 하시다니요.”

아들의 항변에도 이자원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저 노인이 하려던 말을 들어야겠네.”

아직 박승길의 호흡은 진정되지 않았지만, 눈빛만큼은 그가 사헌부 감찰로 있었을 때처럼 어딘가 날카로운 기세가 있었다.

무언가가 있다는 직감에 재차 박승길을 추궁하려 할 때였다.

“장군.”

그때 적비가 이자원의 귀에 속삭였다.

“무슨 일이냐?”

“훈국에 서찰 한장이 날아왔는데, 장군께서 기다리시던 것이오이다.”

적비의 말을 들은 이자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들어가보아야겠소. 기회가 될 때 찾아오도록 하지.”

박승길이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일단 기억해두었다.

===

“운이 나쁘군.”

송시열이 하옥된 송준길을 찾아와 말했다.

유생들의 상소를 부추겼다는 이유로 잡혀온 송준길이었지만 국문은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어지고 있었다.

스승인 김집이 청서 쪽에서 열심히 발품을 팔고 있기 때문이었다.

송시열이 보는 눈 없이 이곳에 찾아든 것도 그 힘을 조금 빌린 덕이 컸다.

“무슨 뜻인가?”

송준길이 물었다.

“박승길, 그 노인이 쓰러졌다는군. 의식이 없다고 내 방문을 거절했네.”

“······훈련대장이 손을 쓴겐가?”

“글쎄. 어쩌면 거짓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느쪽이든 달라질건 없을걸세.”

송시열의 말에 송준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귀신도 아니고, 모든 대신과 종친들의 발목을 잡아버리다니. 이자원 그 자가 얼마나 영악한지 알겠네.”

“상상이나 했겠는가.”

설마 이자원의 아버지에 관한 추문을 ‘조정 전체를 흔들려는 음모’로 몰아갈줄은 몰랐다.

도성의 순라 업무는 보통 포도청이 맡아보게 되어있었으나, 임란 뒤부터는 그 상당 부분을 훈련도감이 떠안았다.

하룻밤 사이에 괴서 수십 장 붙이는 정도야 일도 아닐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주상의 역린, 왕권에 대한 도전을 건드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중전이 영창대군을 죽였네 안죽였네 떠들어보았자 아무런 반향도 없을 것이네.”

“그렇겠지.”

사람들의 이목은 다른 곳에 쏠려있으니까 말이다.

“방도는 없겠는가?”

송준길이 지친 목소리로 묻자 송시열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목숨을 구할 길을 묻는 것인가, 아니면 이 난관을 타파하고 승리할 길을 묻는 것인가?”

“부끄럽지만 전자일세.”

송준길은 이대로 불온분자의 오명을 뒤집어쓴채 죽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훈련대장의 약점을 하나 잡았다 생각하고 진행한 일이 이리 돌아올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방법이라면 하나 있네.”

송시열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무엇인가?”

“구명을 부탁하는 것이지.”

“봉림대군 대감에게 말인가?”

김집은 그들의 스승이니 직접 나서기엔 면이 서지 않을 것이고, 기댈 사람은 봉림대군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송시열은 고개를 저었다.

“대군께선 얼마 전부터 나를 피하고 계시네.”

“허면?”

도대체 누구에게 청해야 하는가.

“세간에는 주상 전하의 뜻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 셋 있다고 하지. 첫째는 전하 자신, 둘째는 중전 마마.”

그리고 마지막은.

“훈련대장 이자원.”

“우리가 칼을 겨누어 이 사단이 났는데 그에게 매달리자고?”

송준길은 어처구니가 없어 물었다.

“물론 우리가 직접 나설 수는 없을 것이네.”

송시열은 돌아서며 말을 이었다.

“장작에 누워 쓸개를 핥으려면(臥薪嘗膽) 우선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는가.”

“영상 대감이 할 것 같은 말이로군.”

송시열은 뒤에서 들려오는 송준길의 대답에 쓴웃음을 지었다.

===

조선통신사 일행을 따라간 세 사람의 네덜란드인.

얀 얀스 벨테브레와 디럭 헤이스버르츠, 얀 피르터르츠는 히라도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서신을 보내왔다.

네덜란드 상관과 무사히 접촉해 이자원의 제안을 전했다는 것, 덧붙여 다른 사안도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내용이 써있었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겠군.’

“내일 입궐하시오이까?”

서신을 갈무리하는 이자원을 보며 적비가 물었다.

“그럴 것이다.”

“남만인들과의 통교를 조선왕 전하와 논의하시겠군요.”

“그래.”

순순히 긍정하는 이자원에게 적비가 의문부호를 띄웠다.

“이 일이 알려지는 것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너는 네 주인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고하고 있고, 나 또한 그것을 알지. 그래서 이 일을 숨길 것이라 생각한 것이냐?”

“솔직히 말하면, 그렇사오이다.”

적비의 말에 이자원이 답했다.

“내가 숨기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네 주인께 거리낄 것이 없다는 뜻이다. 조선이 북벌을 위해 홍이포 한두문 사들인다고 그분께 무슨 위협이 되겠느냐?”

거기에서 끝나지는 않겠지만, 적비에게 그것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조선을 돕는 것이 곧 네 주인을 돕는 것이다.”

적비의 능력만 거두어 쓰면 될 뿐.

그때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겠다는 쪽과 가로막는 쪽의 실랑이였다.

“무슨 일인지 보고 오라.”

적비가 곧장 튀어나갔다가 돌아오더니 이자원에게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그 이름을 들은 이자원은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명령했다.

“모시거라.”

===

“훈련대장.”

“예판 대감.”

이자원과 김집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김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제자들의 망동으로 누를 끼쳤으니 이 사람이 고개를 들 수가 없구료.”

“아신다니 다행입니다.”

이자원이 말했다.

“제자들의 공격은 그리 나쁘지 않았소이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똥물을 제대로 뒤집어썼겠지요.”

“······선처를.”

“그러니 한번 더 당할 생각은 없사오이다.”

김집이 뭐라 말하기 전에 이자원이 선언했다.

“예판 대감께서는 이미 영상의 임명을 반대해 자리를 내어놓겠다 하셨으니 물러가실 분이고, 그 제자들은 불궤를 도모했다 하여 사약을 먹이면 끝나겠지요.

이외의 관리들 또한 전부 물갈이될 것이오이다.”

이 상황에서 조정의 산림을 모조리 쓸어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당파 하나를 뿌리뽑겠다는 말에 김집은 말문이 막혔지만 말이다.

“이판 이하 청서의 소수파들도 차마 반대하지 못할 것이오이다. 산림이 최근 그들에게 도움되는 일이라곤 하지 않았으니 말이지요.”

“이 사람에게 무엇을 바라시오?”

그러나 김집 또한 정치를 알만큼은 알았다.

“정말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면 말 대신 행동으로 보일 사람이 대장이 아니오?”

이미 결심을 해놓고 이런 말을 늘어놓는 것은 이자원의 방식이 아니다.

뜸들이던 이자원이 입을 열었다.

“쌍기(雙冀)가 이 땅에 과거를 들여온지 7백년쯤 되었지요.”

“그러하오.”

뜬금없는 화제에 김집이 약간 당황하며 답했다.

“탕왕이 새기기를, 구일신(苟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이라. 하지만 작금의 과거는 옛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요.”

이제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고, 새로운 문물이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입신양명을 최우선으로 치는 이 나라에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배우려 드는 사람이 많을지는 이자원으로서도 미지수였다.

“만일 과거에 정학(正學)이 아닌 학문을 낸다면, 예판께서 사론의 반발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자원의 말에 김집의 낯이 변했다.

작가의말

영창대군의 죽음, 박승길 폭행 사건, 환어사의 체포는 모두 1614년(광해군 6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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