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82화 (82/213)

< 거꾸로 부는 바람(1) >

이자원은 실로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본래 훈련도감 근처에 마련해놓아, 매일 들고 나던 곳이었으나 동북 원정과 반란 진압으로 자신이 집에 머물지 못하게 되면서 아내가 처가로 처소를 옮겼고 근 반년간 빈집으로 남아있었다.

"영상 대감, 어서 오십시오."

한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집은 썰렁했으나 이런 이야기를 처가에서 나눌 수는 없었기에 최명길을 이곳으로 부른 이자원이었다.

강석기가 자당(自黨) 내에서 공격받을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인천에서 막 올라온 최명길은 그다지 넓지 않은 집에 발을 들였다.

"실로 오랜만이구려. 반갑소, 이 대장."

남한산성에서 만났을 때와 달리 말을 높이는 최명길이다.

그때는 이자원이 일개 초관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임금의 신임을 한몸에 받는 종2품 훈련대장이 아닌가.

그 또한 영상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이자원에게 전처럼 마냥 하대할 수는 없는 그였다.

"말씀을 편하게 하시지요. 좌상 대감도, 우상 대감도 그리 하시니 말이오이다."

"좌상은 대장의 직속상관으로 오래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며, 우상은 대장의 장인이 아니오? 나는 그런 사이는 아니니 이리 말을 높이는 것이 좋겠소."

최명길이 그렇게 정리하자, 이자원은 굳이 더 권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영상 대감을 청하고 싶었던 터인데 이리 누추한 곳까지 발걸음해주시니 광영이오이다."

"허허, 그런 말도 할줄 아시오?"

평소 생각하던 이자원의 이미지와 달리 선뜻 입바른 말을 꺼내자 최명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훈련대장이 한 일들을 지방에서나마 쭉 지켜보았소."

호란을 극복하는 과정이야 바로 곁에서 그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그 뒤 황제께 나아가 당당히 주상 전하의 책봉을 받아 돌아온다거나, 조선 백성들을 괴롭히고 반란을 획책한 무도한 가도를 정벌하더니 숫제 민생에도 다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은가.

대동법만 해도 그랬다.

"이번 대동법의 확대도 호조가 밀어붙였긴 하나 말을 꺼낸 사람은 훈련대장이었다고 들었소."

최명길이 말을 이었다.

"나는 대동법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긴 했지만, 군기 방납의 폐단을 없앤 것은 잘한 일. 오군영의 재정이 그로 인해 확충되고 지방민들의 부담도 줄었지. 실로 장한 일이오."

머뭇거리던 최명길은 이자원을 바라보다, 오랫동안 흉중에 품고 있던 말을 꺼냈다.

"영상 대감."

"화친을 주장한 것은 어디까지나 오랑캐들의 세를 당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오. 그 때문에 노추 황태극을 격살한 대공을 세우고도 대장을 묶어 보내라 청한 것이지."

최명길의 눈이 저편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모시던 임금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듯이.

"하지만 무슨 핑계를 대든 결국 비겁한 짓이었음은 틀림이 없소. 결과를 보면 더욱 그러하지. 그러니 이 말은 꼭 해야만 하겠소."

최명길의 머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미안하오, 용서해주시오. 훈련대장."

이자원은 고개 숙인 최명길을 바라보았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국이었던만큼 그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고, 지금 와서 딱히 악감정도 없었다.

"알겠사오이다, 영상 대감."

하지만 기왕 그가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시면 그때의 빚을 한번 갚아주시는 것은 어떻겠사오이까?"

이자원의 말에 최명길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의아한 표정이다.

"영상 대감의 도움이 필요하오이다."

이자원의 말에 최명길이 물었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 주상 전하의 총애를 받는 대장께서 대체 무슨 곤란에 빠졌기에?"

최명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번에 올라온 능원대군의 상소를 들어보셨을 것이오이다."

"그렇소. 허나 조정에서 별다른 논의가 있지는 않다고 들었소만."

최명길이 본격적으로 복귀하여 업무를 잡지는 않았지만 대강 조정이 돌아가는 상황은 전부 그의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헌데 수십년 전 있었던 영창대군의 일을 꺼내드는 상소는 최명길 그에게는 아무런 주의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폐조 때에 대신과 종친, 양사와 홍문관이 합심하여 대군을 주벌하라 청한 것이 몇 차례나 되는지 모르오. 지금 조정에 있는 신료들도 대개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니 그들을 이제 와서 다 찾아내 처벌하자는 것도 아닐테고, 도대체 왜 그런 상소를 올렸는지."

이자원은 최명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관의 아버님께서 영창의 모살 건에 연루되어 계시오이다."

"······허."

그러나 본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일은 그보다는 심각했다.

광해의 심복으로서 정항이나 이정표처럼 암살을 주도한 위치.

세간은 이자원의 아버지를 지탄할 것이고, 송시열과 송준길이 그런 사론을 이끄리라.

"대장을 공격하는 자가 누구요?"

최명길은 은근한 알력싸움을 눈치챈듯이 물었다.

쉽게 생각하면 상소를 올린 능원대군이 그 장본인이겠지만, 최명길은 그것이 불가함을 알았다.

'능원대군은 저번 호란 때 심병(心病)을 얻어 지금까지도 두문불출하고 있다 들었다. 그런 그가 상소를 썼다는 것은 누군가 부추긴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

"청서의 산림 출신 인사들, 대군사부 송시열과 성균관 학유 송준길이 그것을 가지고 소관을 압박하더이다."

"그 두사람이."

최명길은 인조대에 송시열과 송준길을 천거한 장본인이다.

이렇게 듣게 되니 입맛이 썼다.

"그래서, 내게 부탁할 일이란 것은 무엇이오?"

"두 송씨는 능원대군과 직접적인 끈이 없사오이다."

최명길의 물음에 이자원은 말없이 차를 들이키며 말했다.

잔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 중간에 다리를 놓은 사람이 있겠지요."

"······봉림대군이군."

이자원과 최명길의 생각은 일치했다.

송시열과 사제 관계를 맺은 봉림대군을 통해 올렸을 공산이 컸다.

"두 대군이 끼어든 이상 쉬이 승기를 잡지는 못하겠지요. 어심이 되도록이면 종친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움직일테니."

"그럴 것이오."

단순히 임금의 가족애 때문이 아니다.

원래 역사의 경완군(慶完君) 석린(石磷)과 경안군(慶安君) 석견(石堅)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슬하에 보위를 이을 사람이라고는 원자 한 사람 밖에 없는 상황이다.

만약 이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임금은 이자원이 파직까진 가지 않도록 보호하겠지만, 동시에 이자원의 반격 또한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맡을 일은 그 두 사람을 이 일에서 떼어놓는 것이겠구려."

"조용히 정리해주십시오. 소관이 말한다면 지레 발이 저려 그러는 것으로 알겠지만, 대감께서 나서신다면 대강 알아들을 것이오이다."

이자원의 말에 최명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송씨 모두 준재인데. 아깝게 되었구려."

"그들이 먼저 시작한 일이오이다."

똥물을 뿌려놓고 봉림대군의 뒤에 숨는다 해서 살아날 길이 없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아두어야한다.

===

"손을 떼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대군."

봉림대군을 만난 최명길은 단호하게 말했다.

"괜한 일에 끼어드신 것입니다."

최명길의 말에 봉림대군은 뭐라 항변하려 했다.

그러나 최명길은 손을 들어 그를 가로막았다.

"송시열이 대군 대감의 사부라고는 하나 그 또한 당파의 일원. 그와 친근히 지내어 공연한 일을 도모한다는 의심을 사고 싶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나는 추호도 그런 뜻이 없습니다!"

봉림대군이 열변을 토했다.

"단지 사부의 부탁이고, 또 지금 형세가 훈국의 독주나 다름이 없기에······."

하지만 최명길은 그의 말을 듣자 봉림대군의 손을 움켜쥐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봉림은 깜짝 놀랐지만 기세가 기세인지라 무골인 그도 쉬이 뿌리치지 못했다.

"대감. 이 늙은이의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무슨······."

"대군께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면 생사가 위험하오이다."

최명길의 말을 들은 봉림대군의 표정이 차츰 심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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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대군이 손을 모두 뗐다."

최명길로부터 소식을 들은 이자원이 말했다.

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유생들을 움직여서라도 계속 여론을 조성하려 들겠지."

아마 성균관 교수인 송준길이 나서지 않을까.

"지금이오이까?"

"그렇다."

이자원이 말했다.

"벽서를 드러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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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대군은 선조대왕의 적자인데 무도한 폐주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폐주 광해는 아직까지 그 목숨을 부지해 교동(喬桐)에 살아있고, 이하 문무백관과 종실 또한 이제 와서 충신인체 복록을 누리고 있다. 그러니 어찌 선조와 소성대비께서 눈을 감겠는가?

의로운 선비들은 이 땅에 법도가 바로 서는 길을 알고 있다. 그것은 폐모와 살제에 부역한 자들을 낱낱이 밝혀 죄주고, 만세(萬世)에 이를 전하는 것이다.

하여 이미 산 자와 죽은 자를 막론하여 그 이름을 적는다.

폐주 이혼(李琿) 이하

기자헌(奇自獻)·이경검(李景儉)·이공(李珙)·이성·박정길·한찬남(韓纘男)······」

이튿날 도성 사람들은 곳곳에 나붙은 벽서를 구경할 수 있었다.

벽서가 벽서인지라 그 내용이 도성에 살고 있는 모든 양반들의 귀에 들어가는데에는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영창대군의 죽음을 낱낱이 밝혀 처벌하자고? 미친놈!"

"이놈들이 누구를 죽이려고 이따위 짓을 벌이는 것이냐?"

공서와 청서, 북인과 남인을 가리지 않고 각집마다 튀어나오는 소리였다.

이른바 폐모살제는 인조 집권 후 광해군을 비판하는 명분이 되었지만, 애초에 광해군 대에는 공론에 가까웠다.

자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가담해있었고, 대신과 양사, 종실과 홍문관이 함께 상소하거나 2품 이상의 대신과 종실들이 나서서 영창을 처벌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이름까지 모조리 적혀 있으니 졸지에 본인을, 아버지를 처벌하라는 벽서를 보게 된 사람들은 당황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판이니 임금에게 벽서의 내용이 들어가는 것 또한 시간문제였다.

"밤사이 괴서(怪書)가 나붙었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영창대군의 죽음을 살펴 처벌하자고 하는 것이옵니다. 그런데 그 범위가 몹시 광범위하여 폐조 때에 벼슬지낸 이, 혹은 종실의 이름이라면 적혀 있지 않은 자가 드무니 옛일을 꺼내어 작금 조정을 흔들어보려는 수작이겠습니다."

"이런 짓을 저지른 자가 누구인가? 혹 저번 권가처럼 불온한 자들이 포석으로 삼는 바는 아니냐?"

임금은 신하들의 낯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은밀히 나붙은 벽서인지라 순라꾼들도 알 수가 없다 하옵니다. 하오나 전하, 이것을 보시옵소서."

임금은 도승지 박로가 올린 상소를 보고 눈을 치떴다.

"성균관 유생들이 올린 상소라?"

"예, 전하. 하오나 그 내용이 심상치 않사옵니다."

임금이 읽어보니 벽서의 내용과 비슷했다.

영창의 죽음이 원통하고 억울하니, 한을 풀어달라는 것.

차이가 있다면 여기에 적혀 있는 이름은 하나 뿐이었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중전이 정말 모살에 가담했는지를 살펴 벌주어야겠는가?"

"그럴리가 있겠사옵니까? 영창의 죽음이 있은지도 벌써 수십 년이고, 이미 인조대왕께서 살펴 처결하셨거늘 이제 와서 묻는 것은 우환만을 불러 일으키는 행위이옵니다."

"신 등이 생각하건대 이는 어리석은 선비들의 좁은 소견이나, 한편으로는 우리 조정을 들쑤시려는 자들의 계략이 아닌가 두렵사옵니다. 벽서를 붙인 자들과 이런 상소를 한 이들은 내용으로 보아 한패인듯 하니, 모쪼록 잡아 배후를 밝히시옵소서!"

따지자면 수십, 수백 명 사이에 끼어 영창의 처벌을 상소한 이들과 직접 대군의 살해에 가담한 이자원의 아버지가 같을 수는 없었다.

인조 집권 후 처벌받은 쪽은 후자였고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도성 전역에 주청한 자들까지 전부 처벌하라는 괴서가 나붙은 이상, 더는 이중전의 죄만 죄가 아니다.

"그대들의 말이 옳다."

임금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마음속에선 이미 이를 이용해 불온분자들이 준동하는 것이라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의금부는 속히 상소를 올린 자들을 추포해오라!"

어느 누가 어명을 어길까.

금부도사들은 즉각 나는듯이 달려가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추포해왔다.

"전하, 신들은 억울하옵니다!"

"전 감찰 박승길이 말하길 여, 영창대군의 죽음에 훈련대장의 아버지가 연루되어 있다고······."

"시끄럽다! 너희는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런 상소를 올린 것이냐?"

임금의 외침에 겁먹은 유생들이 하나둘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하, 학유(學諭)의 말을 듣고 저지른 짓이옵니다. 그러나 대군을 모살한 자의 자손이 중용받는 것은 온당치 않다 생각했기 때문이지 결단코─"

"송준길을 끌고 오라!"

임금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김집이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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