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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81화 (81/213)

< 세상의 움직임 (6) >

어둠이 짙게 깔린 곳.

남자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있었다.

끝이 어딘지도 모른 채로 정처없이 앞으로 나아가던 남자의 발에 무엇인가가 채였다.

"헉!"

그것은 엎어져 있는 시체였다.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지른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그 시체를 천천히 뒤집었다.

피투성이가 된 시체.

남자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세자야."

별안간 시체가 눈을 부릅떴다.

눈알이 있어야 할 자리가 뻥 뚫려있는 광경에 남자는 소리쳤다.

"아, 아바마마!"

인조가 얼굴에 피를 바르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찌 이 아비의 죽음을 숨겼느냐? 네 왕권에 방해가 될까봐 그런 것이냐?"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시끄럽다!"

인조가 그에게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뿌리치려 해도 남자의 완력으로는 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그를 산채로 잡아먹으려는 듯 다가오는 인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남자가 눈을 파르르 떨고 있을 때였다.

"전하, 전하!"

강하게 몸을 흔들며 부르는 소리에 남자의 의식이 떠올랐다.

눈이 떠지고, 어슴푸레한 새벽의 침전이 눈에 들어왔다.

"꿈이구나."

남자, 이 나라 조선의 임금은 가까스로 상황을 파악했다.

옆에는 중전 강씨가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몸이 땀에 절어 온통 축축했다.

"또 악몽을 꾸신 것이옵니까?"

"그렇소."

인조대왕이 돌아가신 그날로부터 벌써 몇번째 꾸는 꿈인지 몰랐다.

남들은 꿈에서 부모 한번 뵈어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건만, 임금은 몸서리가 쳐졌다.

"도저히 깊이 잠을 청할 수가 없구려."

이런 악몽을 꾸고 나면 하루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슬픔과 분노.

아버지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한심함.

임금은 잠시나마 이 주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은 오랑캐들의 탓이다."

언젠가 이자원이 했던 말이다.

임금은 이런 날이면 그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나 최명길의 탓이 아니라, 이 나라에 쳐들어온 오랑캐로 인해 말미암은 참사다.

"이자원은 환도했는가?"

"예, 전하. 어제 들어왔다고 들었사옵니다."

"입궁하라 일러라."

임금은 내관의 도움을 받아 의관을 정제하고 침전을 나섰다.

정무를 볼 시간이었다.

===

이자원이 도성에 도착함과 더불어 최명길의 복귀 소식도 파다하게 퍼졌다.

인조의 죽음과 함께 끈이 떨어져버린줄 알았던 최명길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되어 화려하게 돌아오자 조정은 물론이고 사론(士論)마저 들끓었다.

그런 시국이었으니 이자원이 곧장 임금의 앞에 대령한 것도 당연한 처사였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혹 옥체에 미령(靡寧)한 구석이 있으시옵니까."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이자원이 임금의 안색을 살피더니 물었다.

"티가 나는가."

임금은 머리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요즘 몸이 그리 좋지 않구나.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그날의 일이 떠오르시는 것이옵니까?"

굳이 부왕이 나온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자원은 대충 눈치채고서 말했다.

"······어떻게 알았는가?"

속을 읽힌 것 같은 뜨끔함에 임금이 묻자 이자원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신 또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사옵니다."

악몽을 꾸는 것은 PTSD의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다.

평상시에도 발작을 일으켜 사회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까지는 아니니 다행이지만 이것이 반복되어 임금의 몸에 누적된다면 결코 좋은 영향은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의학적인 문제는 전문적 지식이 없는 이자원이 어떻게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판이 영상의 임명을 극렬히 반대하더군."

임금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말했다.

"애초에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강행한 일이긴 하나, 그때부터도 시간이 많이 흘렀지 않은가."

임금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말했다.

두 동생, 봉림과 인평마저 그를 찾아와 재고를 청하고 있었다.

주화를 주장한데다 선대왕을 잘 보필하지 못하여 훙서에까지 이르게 한 자를 어찌 쓰겠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럼 같이 그 자리에 있었던 나는 무엇인가.'

임금은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동생들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거기서 역정을 냈다간 오히려 그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 적당히 물리친 그였다.

그렇잖아도 최근 몇년간 동생들이 임금을 어려워하는 기색이 더해가고 있었다.

"그 제자들의 말로는 대의를 위해 영상의 임명을 찬성하겠다 하였사옵니다만."

이자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애초에 이럴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산림은 고고히 도학에 매진하는 선비들이니, 말바꾸기를 하지 않으리란 순진한 생각 따윈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정치에 몸담은 이상 진흙탕에 구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다.

그러니 저 두 송씨들도 그의 약점을 잡고 흔들려 하지 않는가.

"어차피 영이 선 판이고, 좌상과 우상 또한 찬성하고 있으니 조정의 반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판은 영상을 임명하려 한다면 자신은 물러나겠다고까지 하는 판이니 고민이로구나."

임금이 말했다.

"사직하라고 하시옵소서."

그러나 이자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사직을 허락하라고?"

임금이 물었다.

"김집은 산림의 수장으로 그 명망이 높으니, 내가 구태여 불러올려 북벌에 동참시키고 예판의 직을 맡긴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사직케 하면 사론이 어찌되겠는가?"

"사론을 생각한다면 북벌도, 대동도 모두 포기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이자원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북벌의 완수는 예판이 있고 없고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옵니다."

'오랑캐에게 항복한 인조'의 아들로서 명분이 부족했기에 그것을 채워줄 수 있는 산당과 협력해야했던 효종과는 달리, 지금의 임금은 누구보다 강력한 명분과 왕권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산림은 어디까지나 도구에 불과하다.

선비들의 중지를 모으고 북벌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한 도구.

그런데 그들이 발목을 잡는다면, 더는 쓸모가 없다.

이자원의 말에 임금이 편치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강하게 나가라는 말이렷다."

확실히 산림은 기존 청서 일부와 합세하여 그가 왕권을 마음껏 휘두르는데 있어 비판을 가해오긴 했다.

그것이 정도를 넘지 않았기에 무시하면 그만이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는 전하의 뜻대로 처결을 해오셨지만, 만약 예판의 사직을 두려워하시어 영상의 등용을 철회한다면 다른 사안에 있어서도 수시로 방해를 받을 것이옵니다."

"그 말이 맞다."

임금이 결심을 굳혔다.

"예판이 뭐라하건 간에 이번 일은 강행해야겠다. 인사권은 순전히 임금의 것이거늘, 어째서 일개 신하가 왈가왈부한단 말이냐?"

'이쪽은 되었군.'

송시열의 제안을 거부한 이상 이쪽으로도 공격이 들어올 것은 예상한 바였다.

김집이 설마 직까지 걸고 나올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김집이 사직하면 오히려 곤란한 것은 그쪽이겠지.'

지금 송시열과 송준길의 위상은 어디까지나 스승의 위치에 기반한 것이다.

정말 극한까지 일이 치달으면 뿌리뽑혀 나가는 것은 오히려 산림이 될테니, 그것을 막기 위해선 서둘러 나서야 하리라.

'무슨 칼을 언제 빼어들지 안다면 두려울 것이 없지.'

역습을 준비할 때였다.

===

「영창대군은 선조의 적자로서, 혼조(昏朝)가 대군을 몹시 시기하고 모후를 원수처럼 보아 폐모(廢母)와 살제(殺弟)의 대죄를 저지르니 이제까지도 그 일을 말하는 자는 실로 목이 메이는 바입니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아 선대왕께서 계사하신 후로는 이에 관계한 자들이 벌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듣기로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천수를 누렸다는 자가 있으니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들어 상소를 올립니다.

폐군의 손발 노릇을 하여 대군을 모살한 것은 천고의 중죄인지라 그 아비가 이미 죽었다면 자식에게라도 죄주어 후대에 기강을 세워야 하는 법입니다. 바라옵건대 이 일을 명명백백히 밝히시어 돌아가신 대비의 한을 풀어주시옵소서.」

능원대군 이보(李俌)의 상소에 조정에서는 한바탕 입방아가 찧어졌다.

이미 수십년전 죽은 영창대군이고, 인조의 즉위 후 다 결론난 사안이 아닌가.

"도대체 대군의 상소는 누구를 말함인가?"

"폐조 때 근무하던 자들 중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인데 이제 와 어찌 밝히고?"

진실로 남아있는 연루자가 있다면 밝혀내야겠지만, 신하들은 그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기에 곧바로 정국의 폭풍으로 화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신임 영의정의 임명을 둘러싸고 김집이 배수진을 친 것만이 더 관심을 받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자원만큼은 이것이 공격의 전초임을 알 수 있었다.

"대장 영감께서 소관들을 먼저 부르신 것을 보니, 대장께서도 이미 알고 계신 사안인가 보오이다."

"다행한 일입니다. 대화가 쉬워질테니 말이지요."

송시열과 송준길을 바라보며 이자원이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그러자 송시열이 대답했다.

"산림과 대장께서 손을 잡는 것이 대의를 위해서 좋은 일이라 말씀을 드리지 않았사오이까."

"이것이 그대들이 말하는 대의던가?"

이자원의 물음에 송시열이 집념으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대답했다.

"천하가 혼란스러운데 아직 조정에는 오랑캐와 화친을 논하던 이들이 이름만 바꿔단채로 이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지요. 성품은 조악하고 주머니는 부패한 이들. 반정 떄의 공만 내세워 뇌물이나 챙기려 드는 소인들과 차마 그들을 쳐내지 못하는 정승들이 조정을 차지하고 있으니 북벌은 고사하고 나라는 제대로 되겠사오이까?

그래서 스승님과 대장 영감의 연대를 제안한 것이오이다. 하지만 대장께서는 거절하셨지요."

"그런 궤변에는 관심이 없다."

이자원은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여기에서 멈춘다면 더 피를 보지는 않을 것이다. 약속하지."

"이미 스승께서 직을 거셨습니다."

김집이 예조판서 자리를 내놓겠다고까지 버티고, 임금은 그럼에도 영상 임명을 철회하지 않으면서 이들의 입장은 곤란하게 되었다.

정말 김집이 홧김에 판서 자리를 던지고 낙향해버리면 어떡하는가.

"대장 영감께서 처음부터 제안을 받아들이셨다면 저희도 스승님의 뜻을 돌려보려 노력했을 것이오이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대장 영감께서 전하를 설득해주시는 수밖에 없지요."

최명길과 김집 둘 중 하나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러니 이자원을 통해 임명을 철회하려 드는 것이다.

"능원대군의 상소에는 대장 영감의 부친 함자가 담기지는 않았사오이다. 지금이라면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넘어갈 수 있지요. 어떻게 하시겠소이까?"

송준길이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마음대로 해보게."

그러나 이자원은 담담하게 받아쳤다.

마치 날씨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태평한 어조였다.

"여, 영창대군의 시해 건이 걸려있사오이다. 파직, 아니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대장 영감의 관로에 애로사항이 꽃필 것인데······."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닐세."

이자원은 가볍게 웃어넘기며 말했다.

정말 세속에서 초탈한 것 같은 모습에 송준길은 예상이 빗나간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송시열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허장성세로군요. 대장 영감처럼 뜻을 펼치려는 분이 관로가 막혀도 상관이 없다라······. 단순히 무관으로 남으려드는 분이 아니라 여겼지만. 뭐, 좋소이다."

송시열이 일어섰다.

"기어이 소성대비의 한을 풀어드리게 되었군요."

이자원은 송시열과 송준길이 나가자 시립해있던 적비를 호명했다.

"적비."

"예, 대장 영감."

"개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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