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의 움직임 (5) >
양주땅은 이미 이 시대에 떨어지고 나서 한번 들른 곳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단순히 안주로 가기 위해 지나가던 길이었으므로, 이자원은 딱히 본가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마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굳이 시간을 내어 와불 일이 없었을 것이다.
약점을 확인하기 위해선 필히 방문해야만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양주를 방문한 이자원은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훈련대장께서 본향(本鄕)을 찾아주시니 기쁘기가 한량이 없사오이다. 변변치 않게나마 음식을 차려놓았으니 잠시 즐기고 가시지요."
"이게 다 무엇이오?"
양주 고을 어귀부터 목사가 마중을 나온 것도 모자라, 한사코 모실데가 있다며 잡아끌자 도착한 곳은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들이 차려지고 있는 관아였다.
품계는 이자원이 높다지만 이렇게 깍듯한 태도에다 기생까지 불러모아 숫제 잔치판을 벌여놓았지 않은가.
"대장 영감께서 그간 공사가 다망하여 고향에 내려오지 못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깝게 여기던 차에, 마침 후사를 얻어서 모친께 이를 전하러 오신다니 목사 영감께서 마련하신 주연입니다. 이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이오이까?"
"어서 훈련대장께 한잔 올리거라. 이 나라 제일의 상승장군(常勝將軍)이시다. 네가 기생 머리를 올린 후로 이만한 분을 어디 또 뵈었겠느냐?"
아전이 은근히 목사가 신경썼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목사는 기생에게 술 한 잔을 올리라며 주고 받는 광경을 보던 이자원은 조용히 곁에 앉은 그의 당숙(堂叔)을 쏘아보았다.
"그, 그게······. 자네가 생전 찾지도 않던 고향에 오겠다하니 내가 신이 나서 우리 동네 사람들에게만 전한 것 뿐일세. 그런데 그것이 목사 영감 귀에 들어간 것인지······."
본신 아버지의 사촌동생으로서, 그나마 가까운 피붙이요 도성에 올라와 안면을 텄던 사이인지라 당숙에게 이야기를 미리 전해놓으라 명했던 이자원이지만, 그것이 이런 효과를 불러오자 한숨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고향에 와서 어머님도 뵙지 않고 주연을 받는 것은 도리가 아니오."
이자원이 달라붙는 기생을 밀쳐내며 벌떡 일어섰다.
"아, 아니 그래도 기왕 마련한 음식들인데 조금 즐기고 가시는 것이······."
이자원은 대답없이 양주 관아를 휙 나섰다.
놀란 당숙이 허둥지둥 그의 뒤를 따랐다.
"목사 영감이 고을의 큰 인물인 자네를 대접하기 위해 베푼 잔치인데 조금 앉아있다 가도 되지 않겠는가? 우리 집안이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보았겠는가 말이야!"
당숙의 말에 이자원이 나지막이 물었다.
"아버님 생전에는 어땠습니까?"
"음?"
당숙이 눈을 크게 떴다.
"폐주가 아버님을 많이 신임하신 것 같은데 말이외다."
무관은 한 곳에 눌러앉기가 쉽지 않다. 몇년이면 보직을 바꾸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본신의 아버지는 금군별장으로 제법 오래 근무했던 터였다.
끈없는 무반 집안에다 별다른 공을 세운 적도 없으니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지금이야 광해군과 엮이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 되었으니 쉬쉬하고 있겠지만, 아마 눈 앞의 이 당숙도 그 시절에는 아버지의 위세를 빌리고 다니지 않았을까.
그 과정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도 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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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원의 아버지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에 따라 집안의 흥망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말에 당숙은 입을 떡 벌렸다.
"아, 아니.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일인데······."
20년이 훌쩍 넘은 일이다.
이자원이 캐묻는다고 바로 기억을 해낼 수 있을리가 없었다.
당숙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주저 앉아 생각을 거듭했다.
"대충 짐작이 가는 일도 없소이까?"
계속되는 이자원의 추궁에 당숙은 간신히 하나를 더듬어낸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형님이 그즈음하여 고향에 내려오셨던 기억이 나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아도 대답않고 한참 폭음(暴飮)만 하셨지."
당숙은 일찍이 그런 일이 없었기에 이상하게 여겼다는 말을 덧붙였다.
'과중한 스트레스를 받은건가. 누설해서는 안되는 일로.'
하지만 아직까지 윤곽은 잡히지 않았다.
"선친께서 남기신 문집(文集) 같은 것은 없습니까?"
이자원이 묻자 당숙은 고개를 저었다.
"내 알기로는 없네. 형님은 글에 재주가 없으셨으니 말일세. 무슨 기록을 남기는 것도 싫어하셨지."
제법 기록을 남기던 본신과는 성격이 달랐던 모양이었다.
'다음 사람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이자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던 바와 같이, 당숙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자네 자당(慈堂)께 물어보는 것은 어떤가? 자네와 형수님 사이가 좋지 않음은 알고 있지만, 설마 사안에 따라 집안이 절단날 수도 있는데 알고 있는 바를 말해주지 않으시겠는가."
적모(嫡母)는 그저그런 향반 집안 여식으로 아버지에게 시집온 이라 들었다.
본신의 기록에는 드러내놓고 구박하진 않았지만 그를 거북하게 여기고 있음을 숨기지도 않았다던가.
그러나 본신이 유년기부터 느꼈던 껄끄러움 따위는, 그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당숙의 안내를 받아 이자원은 본가로 향했다.
본신의 동네 역시도 그를 맞이하기 위해 한바탕 잔치를 벌일 태세였지만 이번에는 이자원도 당숙도 그를 피해 곧장 목적지에 도착했다.
"형수님, 계십니까?"
사람없는 썰렁한 집안.
자식이라곤 이자원 하나 뿐인데, 그와 처는 모두 도성에 있으니 머무는 사람은 적모 한 사람 뿐이었다.
희미한 대답 소리에 이자원과 당숙은 안으로 들어섰다.
이자원의 혼인 때 기력이 쇠해 올라오지 못한다 전했을 때는 그저 핑계로 여겼었지만, 실제로 보니 적모는 정말 몸을 일으킬 기운도 없어보였다.
"당숙께서는 잠시 나가계시오."
이자원의 말에 눈치를 살피던 당숙은 방을 나섰다.
이자원이 당숙이 엿듣지 못할 정도로 멀어졌음을 확인했을 때 적모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시오."
잘지냈냐는 안부인사 따윈 하지 않았다. 아니, 숫제 남처럼 말을 높이지 않는가.
이자원 또한 그것이 편했다.
"24년 전."
이자원은 말했다.
"아버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듣고 싶소이다."
"······."
오래 전 일이지만 당숙과 달리 적모의 눈빛은 바로 변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허탕은 아닌 모양이군.'
적모는 한참 천장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귀한 씨를 끊었으니 어찌 제 자손이 번성하기를 바랄까."
"방금 뭐라 하시었소?"
이자원의 물음에 적모는 희미하게 냉소를 띄며 말했다.
"모르셨소? 영감의 아버지께서 선묘조의 적자를 모살(謀殺)했다는 사실을."
"······!"
이자원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선묘조, 즉 선조의 적자라면 한 사람 뿐이다.
영창대군(永昌大君) 이의.
"그랬군."
이자원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것이었어."
본신의 아버지가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던 이유.
사헌부 감찰 박승길이 뒤를 캐다 금군에게 폭행당했던 이유.
'설마 영창대군이 연관되어 있었다니.'
이만하면 이자원, 그의 약점이라 하기에 충분했다.
반정 이후 조선 조정은 대대적으로 영창대군에 대한 동정론을 일으켰다.
폐모살제야 말로 광해가 피에 미친 폭군임을 명백히 드러내는 증거가 아니던가.
실제로 그 이면에 복잡한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한들, 영창 본인은 어린 나이에 무고히 죽은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영창대군의 죽음에 연관된 자들은 단순히 비난을 받는데만 그치지 않았다.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죽음에 연관되었다고 지목된 정항과 이정표는 사후 관직을 추탈당하고, 그 아들들은 유배되었다.
'훈련대장을 협박할 만한 근거는 된다는 것인가.'
설사 임금이 보호한다 하더라도, '영창대군을 죽인 자의 아들'이라는 주홍글씨는 끝까지 따라다닐 것이다.
그러나 알게 된 이상 대처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자원은 곧장 도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 뿐이오?"
그때 적모가 물었다.
"다른 무엇이 또 있소?"
이자원이 되물었지만 적모는 입을 꾹 다물었다.
더 캐물어도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았기에 이자원은 고개를 젓고 방문을 나섰다.
"대장 영감."
나가는 이자원의 귀에 적모의 말이 꽂혔다.
"다른 마음을 품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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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4년(광해군 5년) 2월 10일 영창대군이 죽었다.
구들을 달구어 증살시켰다고도 하고, 혹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고도 하나 그 방법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리라.
중요한 것은 그것을 누가 지시했냐는 것.
그 끈을 타고 들어가다보면 끝에 폐주 광해가 있음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가 직접 아랫것들을 시키지는 않았음이라.
"그 가교 역할을 맡은 사람이 바로 이자원의 아비 금군별장 이중전이었사옵니다."
"어찌 확신하느냐?"
스승 김집의 물음에 송시열이 대답했다.
"20여 년 전 금군을 탐문했던 박승길이 말해준 사실이니, 거짓은 없을 것이옵니다."
박승길이 금군에 폭행당했던 까닭은 바로 주상의 치부를 건드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집의 의문은 남아있었다.
"만약 박승길의 말이 맞다면, 진작 정항이나 이정표처럼 그의 이름을 꺼내놓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폐군 때야 입을 다물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박승길의 말로는 동생이 폐모(廢母) 논의에 앞장선 까닭으로 죽었기 때문에 오히려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하옵니다."
김집은 송시열과 송준길을 보며 말했다.
"이것을 무기로 삼아 훈련대장을 따르게 할 셈이더냐?"
꺼림칙한 말투에 송시열이 말했다.
"불초 제자들의 깨우침이 아직 부족한지라, 더 나은 방법을 생각지는 못했사옵니다. 하오나 완성군 대감까지 영상으로 복귀하는 마당이 아니옵니까."
김집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최명길은 주화를 주장하며 오랑캐와 협력하던 자가 아니던가.
"내가 결코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완성군을 불러올린 사람이 바로 훈련대장이 아니옵니까. 그것을 막자면 다시 그의 힘을 빌려야 하옵니다."
그 말에 김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암묵적인 허락의 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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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대비(昭聖大妃, 인목대비)께서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일이 훨씬 쉬워졌을 것인데, 아쉽네."
송준길의 아쉬움 담긴 말에 송시열이 가볍게 부정했다.
"대비께서 살아계셨다면 오히려 일을 통제하기가 어렵게 되었을 것이야. 이런 사실을 우리가 숨기는 것조차 중죄가 되었겠지. 그렇지 아니한가?"
인목대비가 살아있었다면 아들을 죽인 자의 자손이 훈련대장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눈이 돌아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인조의 즉위 명분을 그녀가 내려준 것인 만큼 지금의 주상도 크게 휘둘렸을 것이고 말이다.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훈련대장의 도움을 받는 것일세."
대의에 공감하여 동맹 관계를 맺는 편이 가장 좋았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때때로 사안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이미 죽은 영창대군의 복수를 할 필요까지야 있겠는가.
"만약 훈련대장이 끝까지 권주(勸酒)를 마다하겠다면?"
"그럼 이를 밝혀야지."
굳이 손을 직접 더럽힐 필요도 없었다.
이 일이 밝혀진다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이들은 많았으니까.
단순히 영창대군에 대해 동정적 인식을 가진 자들부터 이자원과 악연 관계에 있는 사람까지.
이자원이 파직까지 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매우 많은 상처를 입을 것은 분명했다.
"그리되면 영안위(永安尉)나 정명공주 자가께서 나서주시는 것이 좋을텐데."
영안위 홍주원은 영창대군의 자형이요, 정명공주는 대군의 누나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나서기엔 사정이 어려웠다.
"임신년(1632년)의 불궤에 연루된 이후로 거의 칩거하고 계시니 말일세."
6년 전 임해군의 양자인 경창군이 역모를 도모하고 있는데, 죽은 인목대비 또한 그것을 알고 있다는 내용의 고변이 있었다.
게다가 홍주원의 숙부마저 연루되었으니, 인조가 어떻게 무마는 시켰으되 두 사람은 그 뒤로 쥐죽은듯이 살아야했다.
"허면 누구를?"
송준길의 물음에 송시열이 답했다.
"적당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작가의말
박승길이 금군에 폭행당한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한편 박승길의 동생 박정길은 형보다 관운이 좋아 광해군 때 병조참판까지 올랐으나 폐모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주살당했습니다.
영창대군의 죽음에 연관된 이정표의 업보는 그 손자대까지 내려갑니다. 손자 이후선은 정언으로 있었는데, 위인이 용렬하고 ‘조부가 영창대군을 혹독하게 죽였다’는 이유로 탄핵당해 파직되고 맙니다.
사실 표면적인 명분은 저렇고 뭔가 밉보인게 있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