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79화 (79/213)

< 세상의 움직임 (4) >

인천.

어릴 적 영흥부사를 지낸 아버지 최기남이 이곳에 농장을 마련해놓았던 연고로, 낙향한다며 이곳에 내려왔던 최명길이다.

신하로서 선대왕을 지키지 못한 죄를 셈하자면 절해고도에 안치되어도 할말이 없다 생각하던 그였으니, 애초에 도성과 그리 멀지 않은 이곳에서의 생활은 호사나 다름이 없었다.

“요즘 지내시기는 어떠시오이까?”

“부사께서 신경써주시니 심신이 편안하오. 이 사람은 그저 낙향한 선비에 불과하거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대감 같은 분이 조정에 계셔야지요.”

한참 입발린 소리를 늘어놓던 인천부사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물었다.

“인천이 도성과 가까운 동네라고는 하나 그곳에 비해서는 고을이 작으니, 어찌 심심하지는 않으신지요?”

“아니, 괜찮소. 요즘 진귀한 광경을 많이 보고 있으니 말이오. 얼마 전에는 인천 남동쪽에 대규모로 조성 중인 소금밭을 구경하고 왔소.”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수십 구획으로 나뉘어 끝없이 펼쳐진 염전들.

이뿐이라면 모르되 이 천일염(天日鹽)이라 하는 소금은 가마솥에 끓일 필요가 없이 햇볕에 말리므로 땔감도 들지 않고, 기존의 자염(煮鹽) 방식과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산출이 많이 나온다 들었다.

실로 백성을 평안케하는 묘책이 아니겠는가.

“대신 맛이 쓰다 들었사오이다.”

“그것이 당장 소금이 귀한 백성들에게 무슨 상관이겠소?

또한 궁가에서 차지하고 있는 염전을 위해 마구잡이로 목재를 남획하는 터에, 구들을 덥힐 땔감마저 구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지 않았소?

그러한 폐단을 생각하면 소금맛이 조금 쓴 것 쯤이야 가볍게 웃어넘길만 하오.”

최명길은 인천부사의 말을 반박하며 말했다.

‘이것도 훈련대장 그 사람의 생각이라.’

이자원.

남한산성에서는 종사의 안위를 위하여 그를 묶어 보내라 하였지만, 결국 그가 없었다면 국난을 극복할 수 없었으리라.

이후로도 군공은 끊임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재주마저 지니고 있을줄이야.

“나가서는 장수(將帥)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宰相)이 된다(出將入相)라······.”

최명길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돌아가신 인조대왕께서 가장 잘하신 일은 바로 이자원을 살려서 승차시킨 것이 아닐까.

“전 이판 최명길에게 영의정을 제수하니 즉각 도성으로 돌아와 이를 받들라.”

그리고 임금이 내린 교지를 받았을 때, 그의 머릿속에 가장 처음 떠오른 사람은 이자원이었다.

===

적비는 이자원의 조사를 명받은 이후 그의 행적을 쥐잡듯이 뒤졌다.

문제의 소지가 있는 일이라면 이자원 본인이 잘 알테지만, 그것을 알아낼 수 있는지 여부를 탐색하기 위해 자신에게 맡긴 임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사를 거듭한 결과 그는 자신의 생각이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장군.”

적비가 이자원을 찾았을 때, 그는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알아낸 것은 있는가?”

그 물음에 적비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초관 시절부터 탐문을 해보았지만 걸리는 것은 거의 없었사오이다.”

벼슬에 오른지 몇년되지 않은 훈련대장이다.

같이 부방을 살았던 초관들부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파고 들었지만 크게 수상한 점은 없었다······.

‘······그 광경은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지.’

‘사람을 말과 함께 통째로 절단해버리다니.’

‘왜 한사코 부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있기야 했지만 대장이 묻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리라.

적비는 서둘러 기억을 털어내고 입을 열었다.

“장군 본인에게서는 특이점을 찾을 수가 없었사오이다.”

“허면?”

“그래서 장군께 찾아왔던 두 사람의 뒤를 밟았지요.”

송시열과 송준길.

둘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은 확실하니, 그쪽을 파보면 무엇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던 적비였다.

“그들은 옛날 사헌부에서 벼슬을 지낸 박승길(朴承吉)이라는 사람을 만났사오이다.”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다.”

그러자 적비가 종이 한 장을 이자원 앞에 바쳤다.

박승길의 간략한 인적사항이 적힌 것이었다.

“폐주 시절에 벼슬에 나아갔고, 반정 후로 관운이 펴지 못했군. 게다가 지금은 칠십된 노인이 아닌가.”

학맥으로 딱히 얽혀있지도 않은 것 같은 자를 무엇하러 만났을까.

게다가 광해군 때의 인물이라면 일견 이자원과 별 관련도 없어보였다.

“이 노인이 폐주 시절에 사헌부 감찰으로 있다가 무슨 이유로 금군에게 폭행을 당했었다 하오이다.”

“금군이라면.”

이자원은 방금 읽고 있던 본신의 기록을 내려다보았다.

“대장 영감의 부친께서는 금군 별장을 지내셨다고 알고 있사오이다. 무슨 관련이 있지 않겠소이까?”

이자원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박승길이란 노인은 지난날 본신의 아버지가 가한 폭행 때문에 앙심을 품고 있다가, 그때 수집한 어떤 정보를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넘겼다.

“하지만 왜 이제 와서······라는 의문이 생기는군.”

본신의 아버지는 이미 죽은지 오래다.

그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든, 그것이 연좌되어 지금 자신쯤 되는 사람을 날려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반역이 아닌 이상.

“설마.”

이자원이 중얼거렸다.

‘아니, 그렇다 해도 이제 와서 터뜨릴 이유는 없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진작 꺼내들었을 것이다.

그리되면 광해군이나 인조가 아버지의 목을 날려버렸을 것이고.

“너는 박승길 쪽을 더 캐보아라. 그리고 나는······.”

이자원이 말했다.

“본가에 들러보아야겠다.”

===

훈국 한켠에 마련된 건물에서는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듣기 좋은 미성과 달리 그 언어는 일찍이 조선 사람들이 들어본 바가 없는 것이었다.

조선어도, 한어도, 일본어도, 하다 못해 만주어도 아닌 그 언어의 이름은 라틴어였다.

“Sequentia sancti Evangelii secundum Ioannes.”

“Gloria tibi Domine.”

1570년 제정된 트리엔트 미사에서는 강론을 제외한 모든 절차는 라틴어로 진행된다.

그러나 여기 모인 조선인들이 그 말을 알아들을리가 없기에 자구책으로 통역이 따라붙었다.

“성 요한에 의한 거룩한 복음의 연속입니다, 천주님 영광 받으소서, 라는 뜻입니다.”

어느새 어색하게나마 조선말을 할 수 있게 된 수사 게오르크 리프만(Georg Lippmann)의 말에 훈국 병사들이 수군거렸다.

“요한이는 누구래?”

“이 사람, 그 천주님이 상제니까 상제 모시는 신선 같은 분이겠지.”

병사들의 잡담 내용을 짧은 조선어 실력과 눈치로 알아챈 게오르크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여기 모인 병사들은 천주교라는 종교에 대해선 생전 듣도보도 못했던터라 그 이해도가 턱 없이 낮았다.

그나마 옥황상제를 모시는 용한 승려들이라는 소문이 나지 않았다면 이쪽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을 이들 아닌가.

조급해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바로 저기 앉아있는 훈련대장 때문이었다.

‘성당이 완성될 때까지 훈국 건물 하나를 내어주고, 병사들에게 포교를 허용한 사람이 저 장군이지만······.’

그러나 정작 이자원 본인은 영세(領洗, 세례)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끊임없이 반대급부를 요구할 뿐이었다.

‘훈국 내 장인들에게 조총과 화포에 관한 지식을 전수해라. 또한 관상감(觀象監)과 혜민서(惠民署) 관원들을 붙여줄테니 그들에게 천문학과 의술을 가르쳐라. 아, 그리고 공조(工曹)에서도······.’

농담이 아니라 이자원이 요구한 사항을 들어주느라 수사들 대부분의 발이 묶여 있을 지경이었다.

미사를 집전하고 4대 복음서와 주기도문 등의 조선어 번역을 진행할 짬조차 쉽게 나지 않는 것이다.

‘동양에는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가 삶긴다는 말이 있다지.’

어쩌면 자신들도 그리되는 것이 아닐까.

게오르크가 흠칫 몸을 떨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미사가 끝나자마자 이자원은 게오르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의 조선어 실력이 가장 나았기 때문에 그를 통해 일러둘 것이 있었다.

“무, 무슨 일이시오이카?”

그렇지 않아도 썩 좋은 인상이라고는 할 수 없는 훈련대장이 그를 향해 다가오자 게오르크의 목소리가 본능적으로 떨렸다.

“문제가 생겼다.”

“무, 문제라니효?”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울 것이고, 아마 무리없이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이자원의 시선이 그의 푸른 눈에 꽂혔다.

“만약 내가 잘못되더라도, 이 나라를 떠나지 마라.”

“예?”

“이 나라에는 너희가 필요하다. 너희가 끌고 오는 변화가. 그러니까, 끈질기게 살아남아라.”

이자원의 단호한 말에 게오르크는 영문도 모른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자원은 다음날 양주로 떠났다.

아내의 회임 사실을 알리러 본가를 찾는다는 이유에서였다.

===

“훈련대장이 며칠간 쉬고자 청했다고? 어디 아픈데라도 있는가?”

임금은 파리한 기색으로 물었다.

요즘 부쩍 피곤에 시달리고 있는 그였다. 일은 많았고 답답함은 쌓였다.

이자원의 강철같은 체력이 부러웠지만 정작 그와는 달리 임금은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부인이 회임한 까닭으로 어머니께 이를 아뢴다고 하옵니다.”

“그 일이었구나. 다행이로다.”

임금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처제의 임신 소식은 그로서도 반가운 터였다.

지금 원자 외에는 슬하에 자식이라곤 군주(郡主) 하나 밖에 없었으니, 든든히 그를 받쳐줄 친척이 필요했다.

이자원이 아들을 낳는다면 그보다 좋은 친구요, 신하가 어디 있겠는가.

이자원의 청을 들어준 임금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아민이 확고히 영고탑의 총관 자리에 앉았다니 다행한 일이다. 남강, 훈춘, 야춘에 호시를 제때 열 수 있겠구나.”

“교역품은 어찌 하오리까?”

“철기를 저들이 원하는만큼 맞춰주도록 하고, 훈련대장의 말에 의하면 조만간 소금이 많이 나올 것이니 그것을 말과 맞바꾸도록 하라.”

이윽고 반란 진압의 후유증을 다스리고 대동법의 실시 현황을 물으며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던 그가 문득 상소 하나를 펼쳐 들더니 물었다.

“요즘 폐주의 동향은 어떠한가?”

도승지로 승차한 박로를 쳐다보며 임금이 묻자 박로가 답했다.

“작년에 착용하는 갓이 심하게 떨어졌다하여 새로이 갓과 망건, 금관자를 보낸 것 외에는 별다른 소식이 없사옵니다. 아마 큰 문제없이 살고 있을 것이옵니다.”

“헌데 어찌하여 이런 상소가 올라오는가?”

임금이 보여준 상소는 다소 뜬금없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폐위된 후 강화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옆 섬인 교동으로 옮겨져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광해군이 가까운 교동에 있으면 삿된 무리들이 연계하여 변란을 꾀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하여, 제주로 이를 옮기라는 상소가 올라온 것이다.

“이미 광해가 폐위된지가 십 수년인데 이제 와서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최근 충청도의 반란 같은 경우만 보아도 권대용은 스스로 칭왕했을 뿐이지, 광해군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병자호란의 패전으로 권위가 크게 실추되어 이미 실각한 광해군마저 제주로 옮겨야 했던 인조와 달리, 지금의 임금은 전혀 손쓸 이유가 없었다.

“상소에는 폐세자가 권채(權綵) 등과 모의하여 탈출했던 일 등을 거론했으나, 이제는 잊혀진 폐주를 위해 목숨을 걸 자 따윈 없을 것이다. 이 일은 논하지 말라.”

광해군의 아들이었던 폐세자 이지는 동궁에 있을 적 친하게 지냈던 금군별장 권채의 도움으로 유배지를 탈출했다.

하지만 채 섬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붙잡혀 자결하고 만다.

“그러고보니 이자원의 아비도 폐군 시절 금군별장을 지냈다 했었지.”

“예, 전하.”

문득 생각난 임금이 말했다.

“그 아비는 비록 폐주의 신하였으나 이자원은 인조대왕과 나의 신하이니, 청출어람이라 아니할 수 없구나.”

“실로 그러하옵니다.”

은근히 광해에 비교해 자신과 인조를 높이는 모양새에 신하들이 잔잔한 웃음을 지으며 찬동했다.

평화로운 한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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