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의 움직임 (3) >
“박 파총은 아직 등청하지 않았사오이까?”
김충선이 이자원을 보고 물었다
“그에게는 잠시 쉬라고 했소.”
이자원이 담담히 대답했다.
“제 형들의 상은 치루어야 하니 말이오.”
박철균의 두 형은 강압으로 인해 단순 가담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권대용을 비롯한 반군 수뇌들의 증언은 달랐지만, 이미 당사자들이 죄다 죽은 마당에 대질심문을 할 수도 없고 하여 적당히 뭉개고 넘어간 것이다.
박철균에게는 고향에서 조금 쉬다 도성으로 올라오라 일러두었다.
“허면 박 파총이 맡고 있던 업무들은 어떻게 하오리까.”
“다른 파총들에게 적당히 배분하여 주시오.”
이자원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그리 하실 필요 없사오이다!”
바깥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박철균의 것이었다.
“아니, 벌써 올라왔는가?”
김충선이 놀라서 묻자 박철균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본가는 초상이 났으니 쉬기에는 영 수월치가 않아서 말이지요. 차라리 훈국서 일에 빠져사는 것이 좋겠다 싶었소이다.”
그리고는 어쩐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수님과 조카들 얼굴 보기도 힘들고 말이외다.”
자신이 손을 쓰지 않았으면 그들은 전부 역적의 처자가 되어 노비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나마 ‘바깥양반들이 부끄러움을 느껴 자결했다’는 이유를 들어 처벌을 면했기에 - 여기에는 물론 이자원이라는 백이 작용했다 - 망정이지만.
어쨌든 박철균으로선 그들의 낯을 볼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후회하지 마라.”
“예?”
이자원이 박철균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길은 없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박철균에겐 그러했다.
그의 형들은 헛된 욕심을 부리다 죽었고, 거기에 박철균이 어찌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해라.”
박철균은 이자원의 말에 무어라 입을 열려했지만, 바깥에서 들려온 소리에 의해 중단되고 말았다.
“대장 영감, 유생 두 명이 찾아왔사온데 어찌 하오리까.”
“유생?”
이자원이 나가보니 유생은 유생이되 보통 유생들은 아니었다.
“중군 영감, 박 파총. 잠깐 자리를.”
“예, 대장 영감.”
김충선과 박철균은 이자원의 말뜻을 깨닫고 자리를 비켰다.
빈 자리에 젊은 인상의 유생 둘이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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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원은 찻물을 홀짝이며 말했다.
대군사부 송시열과 성균관 학유 송준길.
나이는 이자원보다 많아 각기 이립(而立, 서른)을 넘겼지만 품계로 따지면 종9품에 불과하니, 사실 이리 약속도 없이 훈련대장과 직접 만나러올 정도의 급은 되지 않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보통 선비가 아니라 예조판서 김집의 제자요, 충청 땅에 있으면서도 오래전부터 그 이름이 도성까지 전해져온 유망주들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이자원은 그들을 안으로 들였다.
“뒤에 일이 많으니 이야기는 짧게 끝내주었으면 좋겠군.”
대뜸 던지는 반말에 송준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송시열은 그런 그를 보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명보.”
“알고 있네.”
이 자리의 윗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히 하고 들어가겠다는 뜻을 읽은 두 사람이다.
“완성군 대감을 영상으로 삼는다는 교지가 작성 중이라고 들었사오이다.”
“소문이 빠르군.”
이자원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미 승정원에 명령이 내려갔으니 신하들이 이를 전해들었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결정에 훈련대장께서 개입을 하셨다고도 들었지요.”
그러나 뒤에 이어진 말은 그렇지 않았다.
표면상 상소한 이는 심기원이었고, 이를 결정한 사람은 주상이다.
이자원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송준길은 어디서 들었는지는 몰라도 그 점을 찌르고 들어온 것이다.
“나는 단지 군문에 든 무부에 불과한데 어찌 재상의 등용을 좌지우지하겠나? 헛된 말을 삼가시게.”
이자원이 가볍게 부정하자 송준길은 의뭉스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요즘 저자에는 삼공보다 훈련대장이 윗사람이란 말이 떠돌고 있는데, 그 또한 사실이 아니겠지요?”
“물론.”
이자원은 송준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풍문거핵과 불문언근의 특권은 모두 사라졌거늘 이제 와서 저자의 소문을 가지고 나를 탄핵이라도 할 셈인가?”
“탄핵이라니요, 훈련대장과 우리 산당(山黨)은 동지가 아니오이까? 아직까진 그리할 뜻이 없사오이다.”
송준길이 갑자기 그리 말하자 이자원이 피식 웃었다.
“동지라니. 봉림대군을 통해 우려의 뜻을 전한 것이 산림이 아니었던가?”
“그때는 그랬지만 이미 훈련도감의 대장직도 훌륭히 수행하고 계시고, 북벌의 대의 또한 함께하고 있으니 우리 모두 동지나 다름없지요.”
송준길이 주눅드는 기색없이 말을 이었다.
“완성군 대감을 등용하는 일을 산림은 반대하지 않을 것이오이다. 공서는 완성군의 재등장으로 힘을 좀 받겠지만, 북벌을 이끌 재상으로 그만한 분이 없는 것이 사실이니 붕당을 떠나 찬성해야겠지요.”
최명길은 주화를 주도한 일, 그리고 인조의 죽음을 막지 못한 일로 인해 청서의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산림 출신들은 이에 앞장서면 앞장섰지 타협하러 나설줄은 생각지 못했던 이자원이었다.
“원하는 것이 뭔가?”
정치는 거래다.
최명길을 잡음없이 조정에 들이는 대신 산림은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이자원의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바로 송시열이었다.
“청서의 손을 잡아 주십시오.”
“호오.”
이자원이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군.”
“대장께선 북벌을 원하시기 때문이지요.”
송시열이 이자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가 다섯 살이 위지만 품계로는 아랫사람이다.
그러나 송시열은 당당했다.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던가?”
“대장 영감은 말로만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외치는 무리들과 스스로를 같다고 여기시오이까?”
송시열이 말을 이었다.
“공서의 무신들은 반정 때부터 공을 세웠다 하여 거드럭거리고, 그 밑의 무관들 또한 거기에 부화뇌동하여 움직이고 있지요. 저번 중군의 비리 건만 봐도 그렇지 않사오이까?”
사사로이 군기를 제조해 방납을 자행하고, 공신인 심기원과 결탁했던 이현달.
그나마 무기의 점고라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훈련도감이기에 비리가 그런 종류로 터진 것이지, 지방 속오군은 훨씬 개판일 것이다.
훈련도감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조선에서 부정부패가 자행되고 있는 이상 북벌에 앞서 손을 보기는 해야한다.
“그러나 공서에 기대어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사오이까? 공서의 영수인 좌상 대감이라 해도 예외는 아닐 것이요, 훈련대장께서 나선다면 오히려 그들의 제지를 받겠지요.”
송시열이 계속해서 말했다.
“반면 청서는 고위직에 있는 무신 따위는 없으니, 대장 영감께서 뜻만 품는다면 당파가 힘을 모아 대장을 지원할 수 있사오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청서의 이름으로 청렴하고 유능한 무관들을 키울 수가 있겠지요.”
“청서가 아니라 산림의 이름이겠지.”
이자원이 딱 잘라 말했다.
“그대들의 말대로라면 내가 손을 잡아야할 대상도 청서가 아닌 산림일 것이고. 그렇지 않은가?”
강석기는 개인적으론 청렴하고 강단있는 사람이지만, 당파의 우두머리로서는 왕명에 따를 뿐, 주도적인 면은 찾기 힘들었다.
이런 칼질을 지원할 대상으론 적합하지 않으니, 자연히 저들의 스승인 김집이 힘을 받을 것이다.
결국 송시열과 송준길이 이자원에게 와서 한 말은 이것이었다.
‘북벌의 대의 아래 최명길의 등용도, 당신의 개혁도 용인해줄테니 김집이 청서의 영수가 되는 것을 도와달라.’
하지만 이자원은 딱히 그것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내가 북벌에 진심이란 것은 바로 보았네. 그러나 그 실행은 모두 내가 알아서 할 일.”
이자원이 천천히 말했다.
“내 상관은 공서의 영수이신 좌상 대감이시고, 내 장인께선 청서의 영수이신 우상 대감일세. 또한 주상 전하께서 내 동서시지.”
다른 복안은 얼마든지 있었고, 이자원은 그것을 실행할 능력 또한 있었다.
“붕당 따위는 내게 큰 의미가 없네.”
“······실로 실세다운 발언이시오이다.”
송준길이 이자원을 노려보며 말했다.
“허나 대장 영감께서 쥐고 계신 권병은 어디까지나 하룻밤에도 사라질 수 있는 것! 그때가 되어 소관들의 바짓가랑이를 잡으셔도 이미 늦었을 것이오이다.”
“명보!”
송시열은 흥분할 기미를 보이는 송준길을 강하게 제지한 뒤, 이자원에게 대신 사과를 건넸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대장 영감. 방금 말은 명보의 본의가 아닐 것이오이다. 그렇지 않은가?”
“······.”
송준길은 눈치주는 송시열을 모른체했지만, 재차 송시열이 나서자 마지못해 사과했다.
“송구하오이다.”
“알겠네.”
이자원은 고개를 까딱여 송준길의 사과를 받았다.
딱히 저들과 돌아오지 않을 강을 건널 작정이 아닌 이상 서로 얼굴 붉힐 이유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사오이다.”
송시열의 말에 이자원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오늘은 물러간다는 말은, 다음에도 또 오겠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이자원의 말에 송시열이 말했다.
“한번 거절당했다 하여 포기하는 것은 성정에 맞지 않아서 말이오이다.”
잠시 뒤.
송시열과 송준길은 훈국 담을 따라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주위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뒤, 송준길이 입을 열었다.
“우암, 이미 우리는 이자원을 누를 수 있는 약점을 쥐고 있지 않은가? 왜 그것을 꺼내놓지 않았나?”
이때까지 이자원에게 실컷 당위만 호소하다가 축객당한 셈이 되지 않았는가.
“논어 이인(里仁)편에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는 가르침을 잊었는가?”
송시열이 말했다.
“그것을 가지고 협박했다면 뜻을 이룰 수 있었을지는 모르되, 나는 이자원이란 사람을 속으로 비루하게 여겼겠지.”
“허면 지금은? 대의를 내세웠지만 저자는 들어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데 말일세.”
“대의라······. 이자원은 그리 생각하지 않은 것이겠지.”
송시열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눈치챘기에 받아들이지 않은 것 아닐까.
‘그러나 우리의 뜻이 대의임에는 틀림없다.’
송시열은 그렇게 되뇌였다.
===
이자원은 훈련대장이 된 뒤 적비에게 일 하나를 맡겼다.
훈련도감에서 정보업무를 담당할 부서를 만들라는 지시였다.
적비가 금의위 출신답게 이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훈국 안에서는 그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이 없게 된 것이다.
“약점이라.”
확실히 이 시대에 떨어진 이후로 켕기는 일이 몇번 있긴 했지만, 대부분 임금 또한 알고 있거나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적비.”
“예, 장군.”
“사람 하나를 조사해야겠다.”
“대상은 누구이외까?”
적비의 말에 이자원은 자신을 가리켰다.
“장군을 파라 하심은······.”
말꼬리를 흐리는 적비에게 이자원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내 약점과 악행, 과거까지. 얼마나 알아낼 수 있겠느냐?”
“대강은 다 알아낼 수 있을 것이오이다.”
“대강 정도로는 부족하다. 무엇이 연루된건지 확실히 알아내야 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적비.
정체가 정체이니만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는 자다.
그러나 이 시대 가장 유능한 정보기관의 일원이니 이 조선땅에서 그보다 적합한 자는 없으리라.
‘그냥 묻어두려고 했거늘.’
본신의 과거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이런 식으로 파게 될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뭐가 발목을 잡을지는 알아내야했다.
작가의말
송시열은 이경석과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지만, 속으로는 삼전도비의 비문을 지었다는 이유로 그를 고깝게 생각했습니다. 이경석이 궤장을 받았을 때 수이강(오래 살고 건강했다)이라는 글을 써주었는데, 알고 보니 금나라에 항복한 손적이란 인물의 고사에 빗대 비꼰 바였습니다.
이런 일화를 봤을 때 송시열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상관없이 인간성 자체는···흠···
각설하고 과연 우리의 송자는 적이 될 것인가 아군이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