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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77화 (77/213)

< 세상의 움직임 (2) >

"외람된 말씀이오나 이 대장과 악연이 있는 것은 이판 대감과 그 당여분들 뿐이지요. 반면 우리 산림은 애초에 북벌의 동지가 아니옵니까."

송시열의 도발적인 언사에 정온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북벌은 조정의 국시. 이판 대감과 나 또한 적극 협력하고 있거늘, 우리는 북벌의 동지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잖아도 금상이 주도하는 조정의 분위기 속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느낌을 받고 있는 이들 청서 정온계(系)다.

산림과의 연수도 그런 뜻에서 추진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산림의 새파란 후배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니 이식은 노해서 소리쳤다.

"스승이 육조의 수장에 올랐다고 보이는 것이 없는겐가? 어찌 그런 언동을 하는가?"

이식의 노기가 쉽게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송시열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소관의 생각이 짧았사오이다. 부디 용서해주시지요, 참판 영감."

"이 사람의 얼굴을 봐서라도 한번 봐주시구려. 아직 이 아이가 깨우치지 못하여 한 소리이니, 엄히 꾸짖겠소이다."

예판 김집마저 이리 나오자 이식은 그제야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송시열은 사과했지만 이미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금의 형세에서 두 세력 중 누가 아쉬운 입장에 있는지 분명히 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림은 이자원과 별다른 악연이 없으니 이대로 우리와의 협력에서 발을 빼겠다 이건가?"

분위기가 조금 진정되고 나자, 정온은 이식과 달리 차분한 표정으로 송시열에게 물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자원이 꺼내든 대동법(大同法)을 김집이 막아선 악연이 있긴 하지만 김집과 직접 그 문제를 가지고 싸운 사람은 심열과 김육이 아니던가.

저들 산림도 다수파인 강석기 쪽에 붙겠다는 속셈인가 싶어 정온은 심기가 불편했다.

"그럴리가 있겠사옵니까. 스승님과 이판 대감, 두분 모두 조정이 엇나가지 않도록  모으셨으니, 당연히 연대는 유지하여야지요."

다시 나선 송준길의 말에 정온은 헛웃음을 지었다.

"우상 대감 쪽에 서지 않겠다, 우리와의 연수는 유지해나가겠다, 그러면서 훈련대장은 끌어들이겠다······. 이것이 말이 되는 일이라 생각하는가?"

정온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송준길을 지긋이 바라보았지만, 그는 당당히 말을 이었다.

"우리 산림이 가운데 서면 되지 않겠사오이까?"

"허."

정온이 김집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야망 있는 제자를 두셨구려, 예판."

"······."

비록 청서 정온계가 정축옥사 후로 금상이 주도하는 정국에서 밀려난 상황이라곤 하나, 산림은 얼마 전까진 이름은 있으되 고향에서 경전이나 읊는 선비들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제는 산림이 이들을 제치고 청서의 가운데 서겠다니.

예조판서 김집을 강석기 대신 청서의 영수 자리에 올리는데 협력이라도 하란 말인가.

너무나도 광오(狂傲)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사오이까? 이대로라면 공서와 우상 대감이 주도하는 지금의 형세가 영영 굳어져버릴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지요."

김집을 비롯한 산림 출신들은 그나마 낫다.

그들은 애초에 북벌의 파트너로서 임금이 끌어올린 이들이니까.

하지만 정온과 이식은 그렇지 않다.

지금 있는 세력마저 모두 떨어져나가는 순간, 그들은 자리를 내어놓아야할 것이다.

"······훈련대장을, 포섭할 비책은 있는가? 그는 우상의 사위이니 보통 계획으론 힘들 것이네."

이자원과의 악연이고 뭐고 간에 그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말짱 헛방이다.

"맡겨 주십시오."

송준길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정온과 이식이 반쯤 하는 수 없이 동의하고 나자, 이젠 김집의 결정만이 남아있었다.

'우암, 네 생각이겠지.'

김집이 송시열을 잠시 바라보며 생각했다.

송시열은 송준길과 달리 방금 전 한마디 거든 것 외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김집은  직감적으로 그가 내어놓은 계책임을 알 수 있었다.

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할 정도로 총명한 제자다.

김집의 제자들은 스승의 덕인지 전반적으로 학문의 성취가 뛰어났지만, 그 중 단연 수좌(首座)라 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그 능력을 드러내보이고 있으니, 스승으로선 이런 제자를 아껴주어야 할지 씁쓸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대장이 오기만 한다면야, 그만한 경사가 없겠지요. 나 또한 찬성하오이다."

김집의 허락이 떨어짐으로써 오늘의 회합은 끝이 났다.

===

"스승님께 먼저 말씀을 드리는 편이 낫지 않았겠는가?"

회합이 파하고 돌아가는 길.

본래라면 스승을 댁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도리겠지만, 김집이 내일 등청을 위해 일찍 들어가보라며 그들을 재촉했기에 둘만 걷고 있었다.

송준길의 물음에 송시열은 쓴웃음을 지었다.

"스승님께 직접 말씀을 드렸다면 오히려 거부하셨을걸세."

이자원을 포섭한다는 계획은, 청서의 외연확장을 위함도 있지만 김집을 청서의 영수로 옹립하는데도 중요한 요소였다.

한손에는 이자원을, 다른 한손에는 정온의 파벌을 잡고 강석기 파벌을 누르겠다는 심산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직 그의 스승은 그런 모략 자체에 껄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차라리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툭 던져 놓아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것만 못했다.

"그건 그렇고 자네 말대로 큰소리를 쳐놓고 오긴 했네만, 정말 그 비책이 있긴 한겐가?"

"물론일세."

송준길이 묻자 송시열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원이 완전히 우리쪽으로 돌아서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발을 같이 맞춰볼 수는 있을걸세."

성공한다면 그들 산림이 움직일 수 있는 폭은 더욱 넓어지리라.

스승께서 권병을 잡으셔야 그간 생각해오시던 도학(道學)의 정치를 펼치실 수 있지 않겠는가.

나라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

「전 이조판서 최명길은 만고의 충신으로, 폐군 때에 배척을 받아 쓰이지 않다가 반정할 때에 대계(大計)를 협찬하여 선대왕을 세우는데에 공을 세웠습니다. 또한 재주가 많고 진심으로 국사를 보필하니 실로 명신(明臣)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명길이 정축년에 임금의 죽음을 당하여 스스로 뉘우치고 인천(仁川)에 은거하였으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으니 이제 그를 재차 등용하여 대임을 맡기신다면 여러 신하들이 절로 안심할 것이옵니다······.」

임금은 심기원이 올린 상소를 한 손에 들고 말했다.

"드디어 때가 왔군."

"예, 전하."

최명길은 인조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로 조정에 밀려나 어린 시절 오가던 인천에 머무르고 있었다.

임금은 진작 여러 차례 관록 많고 능력 있는 그를 부르고 싶었으나, 자칫 주화론자를 등용한다는 비판에 시달릴 소지가 다분했기에 미루어야만 했다.

조정을 대부분 제 뜻대로 할 수 있게 된 후에도 사실 논란이 일어날 소지가 다분했기에 총대를 대신 멜 중량감 있는 인사가 필요했고 말이다.

"심기원 정도면 딱 적당한 인선이었다."

본인은 정작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이 일을 맡고 싶어하지 않아 했지만······.

"이현달에게 받아먹은 뇌물을 다 까발리고 귀양을 갈 것이냐 아니면 단순히 상소를 올리고 미운털이 박힐 것이냐. 둘 중 하나라면 말할 것도 없지 않겠사옵니까."

이자원이 말했다.

그가 황익을 통해 전달한 의사는 분명했다.

최명길을 복권시키는데 앞장서라.

'지금 시점에서 최명길만한 재상감이 없다.'

임금과 이자원 둘 다 조정을 총괄할만한 인물로 그를 꼽았다.

외교면 외교, 내정이면 내정.

재상으로 부족함 없는 이가 아닌가.

"전하, 전 도원수 심기원 입시이옵니다."

"들라하라."

때마침 상소를 올린 장본인인 심기원이 입궐했다.

임금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가 불안한 표정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들어왔다.

"신 기원이 주상 전하를 뵈옵니다."

거의 머리가 바닥에 닿다시피하여 납작 엎드린 심기원이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다급해보이는 모습이었다.

"오랜만이오, 심 도원수."

임금은 그렇게 말했다.

"저, 전하. 신은 전하께서 분부하신대로······."

"어허."

심기원의 입에서 속사포처럼 말이 튀어나오려고 하는 것을 임금이 급히 막았다.

사관이 있는 자리가 아닌가.

"그대가 올린 상소는 읽어 보았소. 최명길을 등용하는 것은 나도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일. 그대 같은 중신 또한 이리 생각하고 있음을 알았으니 더 망설일 이유가 없겠지."

임금이 외쳤다.

"완성군(完城君) 최명길에게 영의정을 제수코자 하니, 선전관은 어서 가서 이를 전하라!"

그냥 재상도 아니고 영의정이다.

심기원은 임금의 발언에 놀라 옆에 있는 이자원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태연했다.

'조정의 바람이 이미 바뀌었구나!"

임금과 이미 교감이 있었음을 깨달은 심기원은 고개를 다시 처박았다.

영의정이 되어 돌아오는 최명길과, 그 과정에도 개입한 실세 훈련대장.

'가만, 이건 기회 아닌가?'

처음에는 엄한데 엮여들었다 생각했지만, 지금 보면 의외로 발을 잘 들인 것일수도 있었다.

어쩌다보니 실직(實職)에서 밀려나버린 그가 공을 세운 셈이 아닌가.

여기에 한발 걸쳐서 자신도 다시 복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도원수, 그대는."

최명길을 등용하는데 힘을 써주었으니 어떤 보상이 내려질까?

혹시 김자점이 앉았던 병조판서가 아닐까.

그리 되면 그가 전에 노리던 훈련대장보다 훨씬 좋은 자리임이 분명했다.

"아니, 훈련대장. 그대가 말하는 것이 낫겠군."

꿈에 부풀어있던 심기원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왜 이자원에게 발언이 돌아가는 것인가 싶어 의문이었던 그때, 이자원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대감을 천조에 가도 부총병으로 천거할 것이오이다."

"가, 가도?"

심기원이 눈을 크게 떴다.

병조판서는 어디 가고 갑자기 가도란 말인가.

"그렇사오이다. 본관은 대명의 가도 총병이기도 하니 천거 권한이 있지요. 아마 실제로도 받아들여질 것이오이다."

"그, 그런······!"

심기원이 경악해서 외쳤다.

분명 슬슬 가도의 복구가 다 되어가 조선군의 군정(軍政)이 끝나고 새로이 부총병을 임명해 관리케 할 것이란 말은 들었지만, 그게 본인이 될줄은 몰랐던 것이다.

"가도면 이곳 도성에서 7, 800리 길이옵니다!"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니오."

임금은 심기원의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재밌다는듯 바라보며 말했다.

"대감, 잘 생각해보시오."

심기원의 격렬한 반응에 이자원이 입을 열었다.

"대감께선 지금 백의의 몸이신데다가, 이번 상소로 당분간 조정에 발붙이기도 힘들게 되었지요. 그런데 천조의 벼슬, 그것도 조선과 명의 온 물산이 모이는 가도 부총병직이 대감께 온 것입니다."

그 말에 심기원이 흠칫 몸을 멈췄다.

"한 몇년 가도에서 쉬고 오면 천조의 장수라 하여 조정에서도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말이오이다. 그런데도 싫으시오이까?"

"아, 아니 싫다는 말은 아니고."

"정 사양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천거하지요."

한번 몸이 달았던 심기원은 이자원의 노림수에 걸려들고 말았다.

"저자 정도로 괜찮겠는가?"

결국 심기원이 수락한 뒤, 비척거리며 나가는 꼴을 보고 임금이 물었다.

"심기원은 탐욕스러운 자지만 그렇기에 가도에 적합한 자이옵니다."

이자원은 냉정하게 분석했다.

심기원은 훈련도감 건에서 보듯 욕심이 많고 제 사람을 심는데 능하다.

가도 쪽에 얽히고 설킨 수많은 이권과 관계들. 저 멀리 북경의 대신들에게까지 닿아있는 그 실들을 파악하고 관리해줄 사람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제 스스로 딴 마음을 품을 능력은 없는 소인배이니 놔둬도 안심할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적당히 주머니만 채울 수 있게 해준다면 심기원은 발목을 물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이현달의 건으로 목줄까지 잡혀있는 상태가 아닌가.

"그러고보니 부총병은 두 명이 될 것이라 들었는데, 다른 하나는 누구로 할 작정인가?"

임금의 물음에 이자원은 선선히 대답했다.

"총병 오양의 아들이 잘 컸사옵니다. 저번 가도 정벌 때에도 공을 세웠지요."

오삼계(吳三桂).

한 사람은 정치질을 시키러 보냈으니, 다른 하나는 전쟁을 시켜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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