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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75화 (75/213)

< 대의멸친 >

- 퍽

박철균의 편곤이 농군 하나의 머리를 후려쳤다.

“비켜라!”

산발적인 총격이 진입하는 토벌군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화망이 형성되지 않고, 명중률조차 크게 뒤떨어지는 총격에 맞고 쓰러지는 자는 드물었다.

“남문의 병력들을 모두 장악한 것이 아니었소?”

“성에 들어온 것이 불과 오늘이요, 저 군사들은 본래 내가 아닌 처남과 재종동생이 데리고 있던 자들이니 어찌 전부 장악할 수 있었겠소이까.

성문을 열어젖힌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기시는 것이 좋을 것이오이다.”

홍영진이 은근히 공을 드러내며 자신이 성문을 연 경위를 자세히 늘어놓으려 들자 박철균은 곧장 화제를 돌렸다.

“감영은 어드메쯤에 있소?”

“이곳 진남루에서 북서쪽으로 길따라 똑바로 나아가면 되오이다.”

“다른 역적들은?”

“우선 역적 권가의 일가는 감영에 머무르고 있고, 이지혐, 유탁 등과 그 식솔들은 영은사라는 절간을 빌려 머물고 있사오이다.”

홍영진의 말에 박철균은 허응선과 이사룡을 불렀다.

“그대들은 일군을 거느리고 가서 영은사를 점거하도록!”

“예, 파총 나리.”

===

감영에는 본래 부임해오는 감사를 위하여 내아라 불리는 숙소가 존재한다.

이곳은 당연히 우두머리인 권대용과 그 일가를 위해 내어졌는데, 권대용이 왕을 참칭하고 감영의 격을 행궁으로 높인 후에는 이곳을 임금의 침전(寢殿)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내아라 부르든 침전이라 부르든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혼란 앞에선 그 명칭 따윈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 탕! 탕!

총소리와 함께 훈련도감 병사들 몇이 쓰러졌다.

대부분 팔다리에 맞은 정도였지만 재수없게 머리와 가슴에 직격당한 자들이 보였다.

“파총 나리, 적들이 감영의 담벼락을 끼고 사격을 가해오고 있사오이다!”

그나마 김예상이 ‘임금’을 위해서 제가 데리고 있던 공주 속오군 중 훈련이라도 조금 받아본 자들을 배치해놓은 것이 빛을 발했다.

“어찌 할깝쇼? 이대로 돌격하면 피해가 클 것입니다요.”

“역적 권가를 사로잡고 나면 반란은 진압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무엇을 겁내느냐?”

박철균이 호통을 쳤다.

“누가 앞장서서 공을 세우겠는가?”

“소인이 가겠습니다!”

덩치큰 병사 하나가 나섰다.

이번에 홍영진을 사로잡는데도 공을 세운 안익신이었다.

안익신은 박철균이 채 말릴 틈도 없이 총탄이 빗발치는 감영으로 돌격해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웬놈이 뛰어들어왔다!”

“사다리도 걸치지 않고 뛰어들어 오다니!”

감사의 안위를 위하여 제법 높이 세워놓은 담벼락이었다.

숙위를 서던 반란군은 이런 경우는 예상치 못한 것인지 당황했다.

곧 무언가 으깨고 깨지는 소리가 난 뒤, 감영의 대문이 끼익 열렸다.

“어서 들어오시오!”

안익신은 생채기는 입었으되 멀쩡해보였다.

“대문이 열렸다! 돌격하라!”

박철균의 명령이 떨어지자 훈련도감과 어영청 병사들은 곧장 감영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토벌군과 반란군이 얽힌 아수라장에서 양군이 떠드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어, 어서 몸을 피해야 한다.”

토벌군이 감영까지 육박해왔다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권대용은, 대문까지 열리자 제 식솔들을 챙길 틈도 없이 달아났다.

그러나 대문이 토벌군에게 점령당한 마당에 도망갈 길이라곤 개구멍 밖에 없었다.

“제기랄······.”

체통이고 뭐고 일단 살아남고 보아야 하니, 개구멍에 몸을 집어넣은 권대용이었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곧 그가 있는 곳까지 토벌군이 들이닥쳤다.

“저기 역적 권가 놈이 있다!”

“역적을 잡아라!”

안익신이 권대용의 등덜미를 잡아 내동댕이쳤다.

“이놈들아, 이것 놓아라! 나는 호서의 임금이니라!”

권대용은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면서 그렇게 소리쳤다.

안익신이 그런 그를 비웃듯이 말했다.

“네깟 놈이 무슨 임금이냐? 옛날 원술도 수천리 회남땅을 차지하고서야 칭제했거늘, 고작 궁벽한 산성 하나를 얻어 임금 노릇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 이런 천한 놈이!”

분노한 권대용이 그의 멱살을 잡으려고 달려들자 안익신은 역으로 그를 메쳐버렸다.

허리라도 부러졌는지 권대용은 게거품을 물며 기절해버렸다.

“파총 나리, 큰 역적은 잡혔사오이다.”

“잘했다, 감영의 장악은 끝냈는가?”

“예, 나리.”

그때 이사룡이 달려와 말했다.

“나리, 허 초관이 영은사를 점령했고, 유탁과 이지혐 같은 역적의 손발도 모두 그 식솔과 함께 포로가 되었사오이다.”

“좋아. 그럼 남은 곳은 어디인가?”

“공북루오이다. 그곳은 김예상이 지키고 있으니, 그가 순순히 투항하지 않으면 힘든 싸움이 될 것이오이다.”

홍영진의 말에 박철균은 잠시 생각했다.

아직까지 형들이 잡혔다는 소식이 없으니 아마 김예상과 함께 있을 공산이 컸다.

“가자.”

박철균은 편곤을 단단히 움켜 쥐었다.

결착을 내야할 때였다.

===

포성은 멈추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이미 남문으로 토벌군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이상, 이미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형님, 지금이라도 투항하시지요.”

아우 김예진이 턱을 덜덜 떨며 말했다.

그러나 김예상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역적이 된 이상 우리는 한양으로 끌려가 고신당하다 죽고, 식솔들은 노비가 될 운명이다.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여기에서 죽겠다.”

김예상은 완강한 태도로 그리 답한 뒤, 부하들에 의해 사로잡힌 박성균과 박중균을 내려다보았다.

“너희는 어찌 생각하느냐?”

“도, 도원수 대감. 우리가 동생을 잘 설득해보겠사오이다. 사람이 반드시 죽으란 법은 없으니 도원수께서도 부디 희망을 가지시고······.”

박씨 형제들은 권대용이 준 웃기지도 않는 벼슬로 김예상을 부를만큼 다급했다.

“어리석은 소리.”

김예상은 그렇게 일축하며 성벽 아래 펼쳐진 금강을 내려다보았다.

어느덧 저 멀리서 어스름하게 동이 터왔다.

“기총 나리, 관군들이 오고 있사오이다.”

현순철이 김예상에게 속삭였다.

“김 기총, 모두 끝났소! 어서 항복하시오!”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진남루를 지키던 홍영진이 저기 붙어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나를 역적질에 끌어들인 자가 바로 그대이거늘, 이번에는 다시 관군에 붙으라 떠들어대는군.”

김예상의 나지막한 말에 홍영진의 말문이 막혔다.

“앞서 오는 분은 훈국 박 파총이 아니시오?”

어딘가 옆에 꿇어앉은 박씨 형제들과 닮은 모습에 김예상이 그리 떠보자, 덩치큰 훈국 군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예상이 칼을 냅다 뽑아들어 박씨 형제들의 목에 겨눴다.

“히익!”

“파총의 형들이 내 인질로 잡혀 있는데 어찌하실 작정이시오? 이대로 형들을 떠나보내겠소?”

김예상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음대로 하시오.”

그러나 박철균은 태연하게 답했다.

“뭐, 뭣?”

박철균의 말에 박성균과 박중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처, 철균아!”

“막내야!”

그들이 애타게 외쳤지만 박철균은 그쪽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이 개같은 역모 때문에 죽어나간 사람이 몇인지 셀 수도 없소.

저 멍청한 형님들을 인질로 잡아 무슨 요구를 할지 내 모르겠소만, 그것을 들어주면 여기 있는 내 부하들은 다 같이 화를 면하지 못하겠지.”

박철균은 이어서 말했다.

“춘추좌씨전에 대의를 위해선 친족도 멸한다(大義滅親)고 했소. 내가 비록 머리는 나쁘지만 그것 하나만큼은 잊어먹지 않았수다.

그러니, 마음대로 하시오.”

박철균이 강경한 태도에 김예상은 잠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의군들은 들어라.”

“예, 기총 나리.”

김예상의 말에 공주 속오군들이 답했다.

“창칼을 버리고 모두 항복해라. ”

“기총 나리!”

현순철이 소리쳤지만 김예상은

“모든 것은 헛된 꿈을 꾼 나의 탓이요, 너희들은 속은 죄 밖에 없다. 추국을 당하더라도 책임을 다 나와 내 집안에 돌리고, 최대한 죄를 피하도록 하라.”

애초에 이따위 반란에 발을 들이미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야 욕심 때문에 신세를 그르쳤다 하지만, 그를 믿고 거사에 따라준 속오군들까지 화를 당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말을 마친 김예상은 즉각 칼을 들어 자신의 경동맥을 그어버렸다.

- 스르릉

“커헉!”

누가 말릴 틈도 없이 김예상의 목에서 피가 흘러 넘쳤다.

“형님!”

김예진이 기겁해서 외쳤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절명했사오이다.”

급히 달려간 이사룡이 김예상의 맥을 짚어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대장 영감이 지은 ‘야전교범’에는 지혈을 하는 요령 등도 적혀 있어, 초관들은 모두 그것을 익히도록 되어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의 피를 막아보았자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 살았다······.”

“살았어!”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안도하고 있는 것은 방금까지 생명의 위협을 받던 박철균의 두 형 뿐이었다.

“형님들의 오라를 풀어드려라.”

박철균의 말에 병사들이 다가가 두 형제를 묶고 있던 밧줄을 풀어주었다.

박성균과 박중균은 오랫동안 꿇어앉아 있던 탓인지 쥐가 난 탓에 오라가 풀리고도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형님들과 잠시 얘기를 나누어야겠다.”

대장의 신임을 받는 파총이 그리 말하는데 막아설 자가 누가 있겠는가.

박철균은 그래도 이사룡이 호위역으로 따라붙으려는 것을 제지하고, 외진 곳으로 형들을 데려갔다.

“고, 고맙다, 막내야.”

“오늘의 은혜는 잊지 않으마.”

심상찮은 공기를 감지하지 못한 것인지 두 형은 박철균에게 연거푸 감사 인사를 했다.

동생이 진압군 파총이니 어쩌면 구명(救命)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어서 말이다.

“고마울 것 없소.”

박철균은 스스로도 두려울만큼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결하시오. 칼을 쓰는 것도 좋고, 저기 금강에 뛰어들어도 좋소.”

“······!”

“지금이라면 기회가 있소. 김예상이 형님들에게 칼을 들이밀던 것을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보았고, 협박에 못이겨 가담한 것 뿐이라고 우길 수 있겠지.”

권대용이나 유탁, 이지혐 등이 박철균의 형들이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진술해도, 죽은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으로 보일 터다.

하지만 두 사람이 살아있다면 일을 꾸미는 것은 더욱 힘들어진다.

박철균은 이 둘이 모진 고문을 버티면서까지 말을 맞출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동생이 이렇게 부탁하겠소. 형님들이 죽어야 집안이 삽니다.”

“처, 철균아······. 살려다오!”

“네게 피해가 가지 않게 어디 눈에 띄지 않는 절해고도에 들어가 평생 숨어 살마. 절대 네 앞을 가로막는 일이 없을게다.”

형들이 간청했지만 박철균은 끝내 자결하지 않겠다는 이들의 생각만 확인했을 뿐이다.

“결국······ 내가 해결하는 수밖에 없겠구려.”

박철균이 편곤을 움켜쥐고 형들에게 다가섰다.

- 휘익!

- 퍽!

박철균이 눈을 질끈 감고 편곤을 휘두르자 박성균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형의 피와 뇌수를 뒤집어쓰고 벌벌 떨고 있는 박중균 쪽으로 박철균이 천천히 다가갔다.

“내세에는 우리, 만나지 맙시다.”

다시 한번 비명이 울려 퍼졌다.

===

“대의멸친이라.”

이자원은 금강 너머 공산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의를 위해선 친족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은 진실된 신념인가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일 뿐인가.

둘 중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런 것을 따지기에는 너무 멀리 왔으니까.

작가의말

안익신은 원래 역사에선 이 역모의 주동자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개변으로 역설적으로 관군 편에······

이지혐의 증언에 따르면 기운과 힘이 남보다 나아 담장을 뛰어넘을 정도였다고 하니, 서전트 점프의 달인이 아니었을지 추측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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